여론광장
 금강경
 닉네임 : 대한민국  2022-03-28 09:56:02   조회: 207   
1919. 이승만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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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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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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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1945.9.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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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했던 이는 남한 점령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었다. 하지는 이승만과 상하이 臨政(임정) 사람들이 귀국해야 한국의 혼돈 상황이 정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9월 13일자 하지 사령부 일일보고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孫中山(손중산·孫文)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익 사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중장은 인천에 상륙한 9월 8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잘하는 해군중령 윌리엄즈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민심동향을 파악했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는데 왜 모셔오지 않는가?”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했고, 미군과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이라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9월 14일 좌익들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이승만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승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승만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傳說的(전설적) 이미지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民心(민심)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이 본국에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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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810100078&catecode=C&cpage=1

2008년 10월호

다시 생각하는 國父 李承晩 - 李承晩의 미국다루기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賢人” (리처드 닉슨 前 美 대통령)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조갑제닷컴 대표








* 김구



[ ..... 이동휘가 ....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

.... 그러니 ....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


.....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 "안 되지요" ........ ]




[ .....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 ......

.....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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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백범의 생각은 <백범일지>(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 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 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 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 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 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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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4. 김좌진



[ ......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 ......


.....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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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취임사에서 천명한 대로 李?(이탁), 金東三, 吳東振, 李裕弼, 尹世葺(윤세용), 玄天默, 尹秉庸, 金佐鎭, 曹成煥의 9명을 국무원으로 추천하여 10월10일과 12일의 임시의정원에서 가결되었다.11)


이상룡이 추천한 국무원 9명은 상해에 있던 이유필 이외에는 모두 이 시기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세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와 新民府와 參議府의 지도자들이었다. 이탁은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장이었고, 김동삼, 오동진, 윤병용은 모두 중앙행정위원이면서 외무위원장, 생계위원장, 교통위원장을 각각 겸하고 있었다.12) 유명한 청산리전투를 지휘했던 김좌진과 조성환, 현천묵은 1925년 3월에 북만주지역에서 새로 조직된 신민부의 간부들이었다. 김좌진과 조성환은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군사부위원장겸 총사령관과 외교부위원장을 각각 겸임하고 있었다. 현천묵은 사법부에 해당하는 檢査院 원장이었다.13) 대한독립단, 한족회, 大韓統義府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던 윤세용은 이때는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참의부의 참의장이었다.14)



金佐鎭 등은 李承晩에게 忠誠편지 보내


그러나 이러한 인선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거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새로 선임된 국무원들 가운데 이유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취임하지 않았다. 국무원에 선임된 정의부 간부들이 부임하지 않은 것은 중앙의회가 결의한 4개항의 선결조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상룡이 독단으로 국무령에 취임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신민부 간부들이 국무원 취임을 거부한 데에는 더욱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개조파그룹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신민부 간부들은 1921년 이래로 白純을 통하여 李承晩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5)


그러한 사정은 신민부 창설 1주년이 되는 1926년 4월15일자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金爀과 김좌진, 朴性儁(박성준) 두 위원이 연명으로 李承晩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해외 성상에 각하의 분투 노력하심은 우리 일반이 감읍하는 바외다. 저희들은 경신참변 이후에 북쪽으로 가서 북만주 일우에서 옮겨 다니던 중 작년 3월경에 北路軍政署, 義軍府, 光復團, 獨立團 및 내지 각 단체와 북만주 각 지방 주민대표들과 함께 통일회를 촉성한 결과 신민부를 조직한 이래 1년 동안 軍民行政을 실시하고 있는 바, 지금은 차츰 정리되어 기반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어서 다행이오나, 어찌 이것으로써 대업의 기본이라 하오리까.


3·1운동이 발생한 이후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우리 운동의 최고기관이 되어 절대로 대동적 통치의 본위가 되지 않고는 밖으로 국제의 동정을 구하며 안으로 군중의 정신을 全一케 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견지에서, 연래로 다소의 노력과 고통을 겪지 아니함은 아니오나, 시국의 복잡은 갈수록 더욱 심하야 수습책이 큰 난관에 이르렀으니, 우러러 바라건대 각하는 東風西潮(동풍서조)가 점점 박두한 위기를 당한 우리 민족의 전도를 장차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저희들이 연래로 荒漠(황막)한 구석에 있으면서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하거늘 불행히 야욕자의 간사한 농간과 私利를 도모하는 자의 편견으로 우리 운동의 전도를 가로막으며 사업의 발전을 저지케 함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바이 올시다. 그러나 최후의 노력은 우리의 천직이므로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우리의 목적을 속히 도모케 하심을 바라나이다.〉16)



李承晩이 임시의정원에서 탄핵 면직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李承晩을 임시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면서 이들은 개조파그룹을 독립운동의 방해세력으로 규정하고 「선후판법」으로 1) 내정, 2) 외교, 3) 무력준비, 4) 경제문제의 네 가지 사항에 관한 李承晩의 지도를 요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상룡의 조각작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상룡을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려고 했던 개조파그룹은 낭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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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4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內務總長 사임 2년 만에 國務領으로 선출되다










1945.8.24. 소련 경원선 차단

1945.8.25. 소련 경의선 차단

1945.9.6. 소련 통신 우편 차단


1945.9.6. 미군 진주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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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8/2009062800858.html






* 당연히 이런 사실은 전국민 공지의 사실이었읍니다.

또한 전국민이 수시로 얘기하고 성토하던 사실이었읍니다.
2022-03-28 09: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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