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박정희 2
 닉네임 : 박정희  2022-03-16 15:23:39   조회: 333   
연도별로 본 증가


자원빈국엔 성장의 젖줄


62년후 평균성장률 42%로 세계 1위

중진국으로의 발돋움 주도 .... 국민의 35% 종사

초기엔 농산물 ... 올해는 공산품이 91%




우리나라의 수출이 1백억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사에 새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정부가 수출제일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첫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던 지난 62년의 수출 실적은 5천6백만달러였다. 2년뒤인 64년 11월30일 수출이 1억달러를 마크했다. 정부는 수출 1억달러를 기념하여 이날을 '수출의 날'로 책정했다. 한국경제가 비로소 성장의 돌파구를 찾았다고 해서 요란하고 떠들석한 수출의 날 기념행사가 베풀어진지 만 13년이 지났다.


이제는 수출이 1백억달러-. 수출실적이 제1회 수출의 날 이래 무려 1백배나 늘어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재정통계는 한국이 국별 수출증가에 있어서 세계 제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62년 이후 우리나라의 연평균수출성장률은 42%. 세계무역증가율 17.8%의 2.2배에 이르고 있다. 대만의 28%, 일본의 20.8%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비약적인 수출신장으로 산유국을 제외하고는 세계17위의 수출국가로 군림하게 되어 중진공업국의 기반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랭킹17위의 수출국가로 비약함에 따라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세계무역량중 한국의 비중은 1억달러 수출이 기록됐던 지난 64년 겨우 0.08%에 지나지 않았으나 올해는 0.98%로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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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12.22. 경향신문



1백억불 수출의 날

- 민족사의 새 장을 여는 감회를 깊이 새긴다



오늘 우리는 감격적인 1백억불 수출의 날을 맞이했다. 수출 1백억달러의 달성은 비단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사적 분수령을 그어 주는 것이며 새로운 비약을 위한 거대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해 마땅하리라고 믿는다.


수출 1백억 달러 달성을 기점으로 우리는 80년대 초까지 수출 2백억 달러 달성을 자신 있게 내다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5년 내지 6년안에 수출 5백억 달러 달성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수출 1백억 달러 달성은 이를테면 우리가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는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계기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보다 큰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선진국과의 격차를 줄이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수출 1백억 달러 달성의 기쁨과 보람을 이같은 다짐과 노력으로 승화시킬 때 우리는 보다 알차고 밝은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 틀림 없다.



사실 수출 1백억달러만 가지고도 우리는 세계에 어깨를 겨룰만한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백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는 나라는 세계 1백여개 국가 가운데 17개 국가밖에 안되는 것이 현실이며 이러한 계산에 따른다면 우리는 세계 수출랭킹 17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세계 17위의 의미



세계 부유국의 모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24개국 가운데도 우리의 수출입규모와 GNP 규모를 밑도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수출 1백억 달러의 달성은 바로 국력의 상징이며 민족능력의 우수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한국의 수출 신장과 경제성장에 경이의 눈을 보내고 각국의 매스컴이 '한국인이 몰려 오고 있다'는 식의 특집보도를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특집 보도나 한국평가가 어떤 형태로 전개되든간에 우리는 이제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자신감을 갖고 세계에 웅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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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호] 박정희대통령, 1968년 '고속도로시대' 열다



유하룡 기자 you11@chosun.com

2009.10.27




"이 도로야말로 인간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전으로써 이루어진 공사요, 우리나라의 도로 시대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970년 7월 7일 대구. 박정희 대통령은 감동에 들뜬 목소리로 대한민국 도로 혁명의 새 시작을 알렸다. 총 연장 428㎞(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 305개(현재 353개)의 교량과 12개의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됐던 것이다. 계획보다 1년이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완공이었다. 당시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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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그는 '아우토반'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박 대통령은 손수 도로망을 그려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은 "밤늦게 청와대로 불려 들어가면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 있는 서재로 데려가 직접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 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1967년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들고 나왔다. 야당 등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부유층 유람로를 만들려고 하느냐", "국가 재정이 파탄 날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경부고속도로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 건설했다. 1967년 3월 착공된 경인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개통되면서 국내 고속도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서울 영등포~인천 가좌동을 잇는 총 연장 23.9㎞, 왕복 4차로였다.


1968년 2월 착공된 경부고속도로의 노선, 공정 계획, 추진 방식은 대통령이 직접 결정했다. 당시 김정렴 상공부장관은 "대통령이 마치 전쟁처럼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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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외로운 결단과 이에 대한 집념, 그리고 목표의식이 투철한 사명감의 결과였다 ....... ]


[....."경부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 ........ ]



경부고속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64년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과의 회담 때문에 서독을 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박대통령은 쭉 뻗은, 시속 160Km로 달리는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박정희에게 에르하르트 수상은 분단국가일수록 경제개발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수상의 말에 귀를 귀울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에도 경제개발의 기초로서 고속도로건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각 나라의 고속도로에 대한 기록도 검토하고, 전문가들로부터 보고서를 받는 등 열심이었다. 고속도로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2년여 동안의 연구를 끝내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4월 29일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공표했다. 그의 이같은 발표는 당연히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살기도 힘든 형편에 고속도로라니...

하지만 패기만만한 40대의 젊은 대통령은 그의 의지를 꺾지 않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건설 계획 발표가 있은 다음 8개월 정도 흐른 후 비로소 착공됐다. 드디어 건설 계획 조사단이 1967년 12월 15일 발족함으로써 세계의 건설사에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하며 착공 2년 5개월만에 준공을 본 경부고속도로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시공 전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먼저 떠오른 것이 공사비였다. 그 당시 경제사정으로는 장기간의 공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선 개통 후 보완'이라는 정책을 택하고 공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단기간의 공사를 계획으로 약 300억 정도의 예산을 세웠다.

그 다음 제기된 문제는 노선을 확정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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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일,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를 위한 첫 삽질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야당의 비난은 처음부터 끊이지 않았고, 드디어는 1968년 5월 2일 제65회 국회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비난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겉치레를 위한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각계 각층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쳤고, 그 와중에 외로운 공사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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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12월 30일, 공사를 착공한지 10개월만에 서울에서 수원-오산까지의 구간이 준공되었는데 이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당초 예상한 시기보다 일찍 완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각계 각층의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이었고 비판적이었다. 그러한 반응을 뒤로하고 열의를 보인 끝에 드디어 경부고속도로의 완성을 보였다.



민족의 대동맥을 뚫는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강행한지 2년 반만인, 애당초 세운 공사기간보다도 6개월 앞당겨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되었다. 서울-수원간은 68년 12월 21일에, 수원-오산간은 12월 30일에, 오산-천안간은 69년 9월 29일에, 그리고 12월 10일에 천안-대전간이 완공되었고, 대구-대전간은 그 뒤 20일 후인 12월 29일에야 개통되었다.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도로였다. 바로 1970년 7월 7일이었다. 혼자만의 외로운 결단과 이에 대한 집념, 그리고 목표의식이 투철한 사명감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결실에도 불구하고 진행 당시에는 1969년 9월에 3선 개헌안이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된데다 1971년의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건설자체가 정치 공사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그러한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특유의 오기로 밀어붙여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


추풍령 고개에 세워진 준공기념탑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휘호를 쓴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에 애착을 두었고 큰 의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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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까지의 428Km의 경부고속도로는 외국의 도움없이 순수노력으로 이룩했다는 사실에 민족적인 긍지의 원천이며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는 현존하는 역사인 것이다.








[ ..... 서울대 상대 교수 전원이 성명서를 내고 "소수의 부자들이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다니는 유람로가 될 것" ........ ]



50년前 경부고속도로, 화장실도 돈내고 갔다



조선일보 곽래건 기자 김효인 기자

2020.07.08




[오늘의 세상] 고속도로 개통 반세기, 달라진 삶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 50주년을 맞았다. 건설 당시 서울대 상대 교수 전원이 성명서를 내고 "소수의 부자들이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다니는 유람로가 될 것"이라고 비난했던 도로는 대한민국의 대동맥이 됐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날 서울 서초구 한 호텔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50년 전 경부고속도로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며 "미래를 내다보고 시작한 경부고속도로가 서울과 부산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들고,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땅 불로 녹이며 공사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밝힌 것은 1967년 4월 29일이다. 그는 이날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 전 대통령은 3년 전인 1964년 독일을 방문했다. 당시 '아우토반'에서 시속 160㎞로 달려본 다음 충격을 받고 고속도로 건설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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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공사는 1968년 2월 1일 시작됐다. 현대건설을 포함한 16개 건설업체가 시공에 참여했고, 1201건설공병단 등 3개의 군 공병대도 투입됐다. 정확히 2년 5개월 7일 만인 1970년 7월 7일 서울∼부산 전 구간이 개통됐다. 지금까지 건설된 고속도로 중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짧은 공사 기간에, 가장 적은 공사비를 투입해 완성한 고속도로였다. 인부들이 하루 3교대로 잠잘 시간도 없이, 겨울엔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언 땅을 녹여가며 공사해 가능했던 일이다.



◇수학여행, 고속버스도 등장



경부고속도로 완공 이전엔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로 15시간이 걸렸다. 완공 뒤 4시간 30분으로 줄었다. 이로 인해 전국 일일생활권 시대가 열렸다. 경공업 중심이던 산업구조는 중화학 공업과 수출 중심으로 탈바꿈했다. 경부 축을 중심으로 산업단지가 늘어나고 생산활동인구가 유입되며 대도시가 성장했다.



수학여행이란 문화도 생겼다. 이전엔 서울에서 경주까지 10시간은 가야 해 학생들의 단체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이동 시간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여행·관광 목적으로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국민 삶의 질도 높아졌다. 고속버스도 처음 등장했다. 고속버스 기사와 안내양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직업이 되기도 했다.



1970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1300원(일반 승용차 기준·편도)을 내야 했다. 지금은 14배 정도인 1만8600원을 내야 한다. 요금만 올라간 것이 아니다. 1970년 1만대에 불과하던 경부고속도로 통행량은 2019년 77만대로 늘었다. 같은 기간 자동차 등록 대수는 13만대에서 2368만대가 돼 182배로 폭증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쌓인 토목기술 노하우는 국내 건설사가 중동 등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 YS·DJ도 처음엔 반대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이지만 처음엔 반대가 많았다. 경부고속도로에 들어간 건설비 429억7300만원은 건설 구상이 처음 나온 1967년 국가 예산의 23.6%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춘궁기엔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때였다.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컸다. 신민당 유진오 당수는 1968년 언론 인터뷰에서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춰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는 완공 15년쯤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기존 4차선 고속도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단계적으로 확장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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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8/2020070800115.html








[ .....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 ....... ]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1968년 2월1일 오전에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의 무장공비 침입 사건에 대한 위로 전문을 보내온 일본의 사토 수상에게 감사 電文을 보냈다.


이날 오후 朴正熙 대통령은 서울 영등포구 阮趾桐(現 양제동 교육문화회 관 부근)에서 거행되는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起工式에 참석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바위 산을 절개하는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폭음과 함께 다이너마이트가 작렬하면서 암벽이 쪼개졌다. 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처럼 형성된 서울의 남쪽은 조국 근대화의 조류를 타기 위해 처음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 통로 개척은 육군 220 重건설 공병단에 의해 추진되었다.



京水間 고속도로 건설공사는 행정절차를 무시한 事前공사로 진행되었다. 정상적인 행정절차를 따른다면 경제기획원에서 각 부별 예산이 배정되고(1월 말) 이 예산을 부처 별로 再배정해야 비로소 건설부 고속도로 건설단에 예산이 확보된다. 이후 재무부 國庫局으로부터 사업발주 승인을 받으면 조달 청으로 서류가 넘어가 발주가 공고되고, 건설업체들의 입찰-심사-낙찰과정을 거쳐 선발된 업체와 계약을 해야 비로소 착공과 준공 날짜가 정해지면서 착수금이 전달된다. 빨라야 5월 말에 착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陸士 8기 출신으로 고속도로뿐 아니라 소양강 댐, 京仁運河 등과 관계한 「살아 있는 시방서」라고 불리는 崔鍾聲(최종성·8代 국회의원 역임) 당시 건설부 차관의 증언.


『당시 고속도로 계획은 2차 5개년계획 연도 안에 완성해야 3차 5개년 계획 때 이 도 로를 이용한 경제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겁니다. 朴대통령이 원하던 기간內에 건설해야 한다는 임무가 朱源 건설부장관 이하 직원들의 가슴속에 사명감처럼 와 닿아 있었지요.


또 다른 문제는 당시 重機를 다루는 업체가 30個社나 투입되는데, 이 重機들은 모두 상업 차관 5000만 달러로 도입한 것 들이어서 행정 절차를 기다리며 놀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자만 해도 어딥니까. 게다가 토목공사는 해빙기인 2월부터 5월까지가 최적기입니다. 雨期도 없고 땅도 잘 파지거든요. 이런 이유로 朱源 장관이 밀어부친 겁니다』



기공식에 참석한 朴正熙 대통령은 致辭 도중 1·21 사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아무리 우리 국민이 自由와 평화를 사랑하고 남북 통일을 전쟁수단에 호소하지 않 는다 하더라도, 은인자중하는 데는 限界가 있다는 것을 엄숙히, 그리고 分明히 북괴에게 경고한다』고 그는 말했다. 朴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처음으로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一面 국방, 一面 건설의 구호를 사용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대한민국의 건설이 빨리 이루어 지고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나날이 향상됨으로써 가장 위협을 느끼고 질투를 하고 배가 아파하는 자 들이 이북에 있는 金日成 도당들입니다.


그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 공산당은 입으로는 평화 통일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목표와 전략은 해방되던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 그들의 기본 전략이 무엇이냐 하면 전쟁 준비를 해서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침략해서 적화통일을 하자는 것입니다(중략).


우리는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이 건설 사업을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그야말로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 주의자들과 투쟁을 하면서 한쪽으로는 건설을 추진해 나가는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중략).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모든 국민 앞에서 북한에 있는 金日成 괴뢰 집단들에 게 한 가지 경고를 해 둡니다. 아무리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통일 문제에 있어서 전쟁 수단에 호소하겠다는 그러한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은인자중하고 자체하고 인내하고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와 인내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을 북한 김일성 괴뢰 집단들에게 우리는 엄숙히, 또한 분명히 경고를 해 두고자 합니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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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金日成의 도전으로 한국이 위기에 빠질 때 朴正熙 대통령은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유명한 구호를 내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런 구호가 나온 것은 1968년1월21일 金日成이 보낸 무장특공대가 청와대를 습격하여 朴대통령을 죽이려다가 문전에서 저지되어 온 나라가 戰時 상태로 돌입했던 긴박한 시점에서 치러진 경부고속 건설 기공식에서였다.


서울 영등포에서 있었던 기공식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대한민국의 건설이 빨리 이뤄지고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나날이 향상됨으로써 가장 위협을 느끼고 질투를 하고 배가 아파하는 자들이 이북에 있는 金日成 도당들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하면서 한쪽으로는 건설을 추진해나가는 ''싸우면서 건설해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金日成이 朴正熙를 죽이려고 한 1.21 사태에 대한 최초의 응전은 향토예비군 창설이었다.

''향토예비군의 노래''에도 ''총을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는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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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도 확보안된 민간인 용지 582만 7,000평은 지주와의 합의로 사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민심은 한없이 순후했었다. 고속도로 용지대금을 낮추는 것이 곧 애국하는 길로 생각됐고, 백성들도 그렇게 믿고 따랐다.


582만 7,000평 용지대금으로 지급된 총액이 18억 7,667만 3,000원이었으니, 평당 평균 236원으로 매수한 것이다. 아무리 30년 전의 일이라해도 믿을 수 없이 싼 값이다. 담배 한 갑에 40원(파고다), 쌀 한가마에 4,350원 하던 때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정확한 착공일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공식적인 착공일자는 68년 2월 1일이지만, 서울_오산간의 공사는 그보다 훨씬 앞선 67년 11월 시작됐다. 단 한 푼의 예산 뒷받침이 없는 사전공사였다. 또 이 공사는 초기 설계도 채 끝나기 전에 시작됐다. 즉 설계와 공사가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실현시키고 싶은 박대통령의 조급한 심정 때문이었다.


노선결정은 물론 공정계획까지도 박대통령이 직접 지휘했던, 「원맨쇼」였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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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화당과 경제 장관들은 신중론이었고 언론과 학계는 반대였다 ....... ]

[ .....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하면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 ]



경부 고속도로 개통


돌격, 그리고 돌관(突貫)-당제터널 공사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당시 현대건설 사장 회고에서




큰일을 할 때는 대개 그렇듯 반대가 있게 마련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화당과 경제 장관들은 신중론이었고 언론과 학계는 반대였다. 이에 더해 [고속도로를 놓기에는 교통량이 적다]는 세계은행의 지적은 반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68년 2월1일.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는 첫 번째 톨게이트 근처에서 발파음을 터뜨리며 기공식을 가졌다. 4백30억원의 최저 공사비로 4백28Km의 고속도로를 [3년 안에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모험일 뿐 아니라 건설 회사로서도 잘못하다가는 결손을 보게 될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나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랄 수 있는 8백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하였는데 내가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들여온 중장비는 1천9백대였다. 이 때문에 현대는 경영에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70년대 이후 경영 합리화 촉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탈법, 부실공사는 있을 수 없었다.


이익을 남기려면 우선 공사일정을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하면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현장에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작업을 독려했다. 공기 단축뿐 아니라 공사의 질도 좋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직원들도 한 달에 한 번 집에 갈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열심히 일하다가 더워서 옷을 갈아 입으면 여름이었고, 다시 정신없이 일하다가 추워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이 내리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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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여름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러,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라. 만약 임자도 못 할 것 같으면 나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묻는 정 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에 달러가 넘쳐나고 있다, 그 돈으로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어하는데도 너무 더운 지역이라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는 국가가 없어 한국에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급히 정부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2주 만에 돌아와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해 공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정 회장은 바로 중동행(行) 비행기를 탔다. 5일 만에 돌아온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다.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이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다.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다.”


중동이 사막지역이라 물 걱정을 하는 대통령에게 정 회장은 물은 어디서든 실어오면 된다고 답했고, 더운 나라이므로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정 회장에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정 회장 말대로 한국의 개미 같은 일꾼들이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시절, 30만명의 노동자가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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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써준 「종이마패」



「포철 神話」의 연출자는 朴正熙, 주연배우는 朴泰俊이었다.

1969년 12월 포항종합제철 공사현장에서 朴泰俊 사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외쳤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이대환 지음, 현암사 발간 「박태준」에서 인용)



朴泰俊 사장은 포철을 지을 때부터 정치적 압력이나 관료적 행정처리, 그리고 인사청탁을 배제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우선 일본에서 설비를 구매할 때 포철이 공급업자의 선정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부기관을 통해서 해야 하는 것을 시정해야겠다고 별렀다. 문제는 朴대통령에게 直訴(직소)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일이었다.

1970년 2월3일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고 비서실에서 朴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위에 인용한 책에 따르면 朴사장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브리핑을 하려고 하니 대통령은 배석 비서관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말했다.



『완벽주의자인 임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텐데, 보고는 무슨 보고. 그래 일은 순조롭게 되어 가나?』

『구매절차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건가』

朴대통령은 설비구매 과정에서 포철이 당면한 어려움과 시정건의를 朴사장으로부터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 봐』

朴사장이 메모지에 쓴 것을 읽어본 朴대통령은 메모지의 상단 좌측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한 뒤 도로 내밀었다.

『내 생각에 임자에게는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어려울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오기 거북할 것 같아서 아예 서명해 주는 거야. 고생이 많을 텐데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포철 역사에서 「종이마패」로 불리는 이 메모지를 朴사장은 한 번도 써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등뒤에 있다는 확신이 朴사장으로 하여금 포철을 정치와 행정의 견제나 간여로부터 지켜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공기업 사장 중 朴泰俊 사장만 청와대에서 獨對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어떤 면에선 기업인들의 조련사이기도 했다. 鄭周永 같은 야성의 인물도 朴대통령 앞에서는 유순해졌다. 대통령의 私心 없는 독려가 기업인들을 마음에서부터 움직였다.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 조선업을 권유했던 이는 金鶴烈 당시 경제부총리였다. 鄭회장은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본·미국을 돌아다녔다. 鄭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신 나간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鄭회장은 金부총리를 찾아가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기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鄭周永을 몰아세우다



金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鄭周永 회장이 나서서 하겠다고 했으니 조선소가 꼭 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金부총리는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보고를 올릴 수 없으니 함께 들어가서 직접 대통령한테 말하라』고 했다. 며칠 후 金부총리, 鄭회장, 朴대통령이 한 자리에 앉았다. 鄭회장이 말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녀 봤지만 일본도 미국도 아예 상대를 안 해줍니다. 「아직 초보적인 기술단계에 있는 너희가 무슨 조선이며 몇십만t이냐」는 식이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朴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金부총리, 앞으로는 鄭회장이 어떤 사업을 한다고 해도 전부 거절하시오. 정부가 상대도 하지 말란 말이오』


그러고는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鄭회장한테도 권했다. 鄭회장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 대통령이 불을 붙여 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래, 그거 하나 못 하겠다고 鄭회장이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해요? 처음에 하겠다고 할 때는 일이 쉽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것 알았을 거 아뇨? 그러면서도 나선 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그저 한 번 해보고는 안 되니까 못 하겠다, 그러는 게 있을 수 있소?』


鄭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꼭 해야만 하오. 鄭회장! 일본·미국으로 다녔다니, 그럼 이번에는 구라파로 나가 찾아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빨리 구라파로 뛰어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中에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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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

.....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 ]





<박정희>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朴正熙는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말한 평화란 것은 평화공존을 가장한 분단 고착화가 아니라 자유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란 뜻이란 것과 합치되는 이야기이다.

그는 1966년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두 개의 한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식 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간의 대결은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누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쟁취하는가의 싸움이며, 그 정통성을 확보한 쪽만이 1민족 1국가의 월계관을 써야 한다는 역사관에 투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7년 4월23일 대구 유세(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통일이 된 연후에 북한 땅에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니까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의 배양이 필요한 것이다>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1966년 2월15일 대만 방문시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 ..... 심지어 자기 아버지마저 '동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는 해괴망측한 북괴에게서, 우리는 단 한쪽의 민족성도 찾아볼 수 없는 것 ........ ]





< 그러므로 나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얼과 역사의 正統性을 이어받아 이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민족의 主體세력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떳떳하고 영예롭게 自覺하고, 통일한국 실현의 역사적 사명이 우리 세대의 임무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바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으로도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에 있다는 自覺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비록 국제정세의 제약으로 4반세기 동안 국토가 兩斷되어 왔으나, 민족전통을 이질적인 공산주의 사상과 광신적인 개인숭배로써 파괴하고, 우리 북한동포들에게 심지어 자기 아버지마저 '동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는 해괴망측한 북괴에게서, 우리는 단 한쪽의 민족성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민족主體사상을 확립하고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自覺하여, 주변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의연한 자세로서 이에 대처하면서, 북괴의 남침야욕을 저지해 나가기 위하여는, 국민 모두가 총화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



-1972년 3월24일 교육자 대회 치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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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질을 높이려면 먼저 교육자의 질을 높여야 하는데, 권력우상화의 결과로 인해 교육자를 희망하는 인재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교육자는 인텔리이고 인텔리는 혁명화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지배하기 때문에, 누구도 선뜻 교육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예로 들면, 대학을 졸업하고 당위원회의 지도원으로 배치된 자가 자기 스승에서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욕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교육자를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학교(초등학교) 교원도 ‘선생’이라고 높여 불러야 하는데, 당에서 근무하는 젊은 놈들은 교장선생이건 나이든 선생이건 가리지 않고 “동무, 동무” 하면서 아랫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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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0.16. 중공 원폭 실험 성공

1967.6.17. 중공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8.1.21. 무장특공대 31명, 청와대 습격시도. 1.21사태.

1968.1.23. 美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1968.2.1.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 ....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 ]

1968.4.1. 향토예비군 정식 발족


1968.8.24. 중앙정보부, ‘통일혁명당’사건 발표 .

1968.11.2.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1969.7.25. 괌에서 닉슨 독트린 발표 .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독트린을 세계에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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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핵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하고 미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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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2.18. 미국 외교백서,"....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


1970.4. 중공 인공위성 발사 성공


1970.6.5.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1970.6.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암살미수.


1970.7.5.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통고

1970.8. 애그뉴 부통령, 약 5년 후에는 완전 철수할 계획 요지의 발언.


1970.10.2. 중공 국지전 계속지원 호언


1971.3. 주한 미 제7사단 병력 2만 철수

1971.7.9 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키신저 비공개담판

1971.10. 유엔총회는 미·일의 반대를 넘어 중국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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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행색은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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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3월 2일부터 1985년까지 대우정밀에서 M16A1(콜트 모델 603K) 면허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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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일본 메이지 13년식 무라다(村田)총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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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2. 닉슨 독트린



[ .....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 ........

.....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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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2월 18일에 발표된 미국의 외교백서에는 「어떤 나라의 국방과 경제도, 미국 혼자만이 떠맡을 수는 없다.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했다.

또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1) 우방군이 핵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미국은 「다시는 아시아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였고, 주한 美 지상군의 철수나 감축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다. 이것이 소위 닉슨 독트린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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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0. 김대중 대통령후보



[ ...... 향토예비군폐지 ... 노자공동위구성과 소득의 균분 .......

......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를 위한 미·일·소·중공의 공동보장책 ....... ]


불균형 고쳐 대중시대 구현

[중앙일보] 1970.10.16





197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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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는 대전·부산·인천·광주유세에서 향토예비군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자신이 집권하면 미·일·소·중공에 한반도서의 전쟁 억제에 대한 공동 보장을 받겠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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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備無患


1971년 1월 11일



이날 연두 기자회견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작년까지 1, 2차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결과 군사적인 측면을 제외한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북괴를 앞서게 되었다"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이 처한 위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서두에 북괴의 위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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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 구상은 잠꼬대"


이날 朴대통령은 한 달 뒤에 중공을 방문하게 될 닉슨 대통령이 작년에 친서를 보내 美中 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공개하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여하한 경우라도 우리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정부와 상의없이 우리 이익에 위배되는 여하한 결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 태도라는 것을 확실히 천명해둡니다"



朴대통령은 기자회견을 빌어 전해 金大中 후보가 주장했던 한반도 평화에 대한 '4대국보장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 소련 중공 일본이 그렇게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믿을 수도 없고 안심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혹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북괴가 쳐들어오면 네 나라가 뜯어말릴 것 아닌가 할지도 모릅니다. 작년 연말에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 났을 때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두 나라 배후에 있는 美蘇中 3대 강국은 앉아서 입씨름만 했습니다. 아마 미국측은, 이것은 북괴가 먼저 전쟁도발을 한 것이다, 당장 원위치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소련과 중공은 김일성이 먼저 도발한 것을 뻔히 알지만 김일성이가 먼저 도발했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이쪽에서는 북괴가 먼저 했다, 저쪽에서는 남한에서 먼저 했다, 이렇게 입싸움만 하고 있는 동안에 승부는 결정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미방위 조약이 북괴의 전쟁 도발을 막는 유일한 방파제가 되는 것이지 4대국 보장론 운운은 잠꼬대 같은 이야기입니다"



朴대통령은 전해의 남북적십자 회담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점에 경고를 보냈다. 그는 신라가 진흥왕 때부터 120년 동안 준비하여, 그것도 唐의 힘을 빌어 삼국통일을 했다가 그 唐을 내쫒는 전쟁을 통해서 통일한 완수한 史實을 설명한 뒤 이렇게 요약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내실을 키워야 하고,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어야 하며, 그때 우리가 기민하게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통일이 안됩니다"


그는 해방이 왔을 때 우리의 내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독립국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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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4.28.


“김대중 뭘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


낙심한 박정희의 화살, 과녁 벗어나 “큰일 나겠어” … 유신을 작심했다



[중앙일보] 2015.06.2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0> 유신의 책사 이후락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634만여 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95만 표는 상식적으론 많은 차이지만 박 대통령의 기대치에 미흡했다. 그의 생각이 깊어졌다.


 대선 다음 날 중앙선관위의 대선 결과를 통해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인한 나는 충남 서산농장으로 내려가 있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열리는 충무공 탄신 기념행사에 참석하니 오라는 주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매년 4월 충무공 탄신일(4월 28일)이 되면 육영수 여사와 함께 현충사에 들러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행사를 마치면 으레 경내의 활터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평소 활 쏘는 것을 좋아했다. 오른손잡이지만 가끔 왼손으로 활을 잡기도 할 정도였다. 145m 거리의 먼 과녁에 열 발을 쏘면 서너 개는 맞혔다. 그런데 그날은 하나도 안 맞았다. 박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그땐 짐작을 못했다. 뭔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요동을 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현충사 행사에 참석한 뒤엔 늘 온양관광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박 대통령이 5층 숙소로 올라오라고 했다. 육 여사는 옆방으로 가 있으라고 했는지 대통령 혼자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한참 ‘음…’ 하고 있더니, 말문을 열었다.

“이것 봐. 내가 그래도 그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이 일어서서 일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김대중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더 났고, 선거비용을 써도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말이야.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긴 하지만 이게 큰일 날 수도 있어.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선거를 하다 보면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고 건전하게 나라를 열어 갈 위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뽑힐 수 있어. 그럴 땐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 과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니 내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7대 대통령선거에서 나는 적어도 100만 표 이상 차이로 박 대통령이 이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후락은 200만 표라고 장담했다. 그러니 박 대통령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69년 3선 개헌 찬성으로 돌아서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나로서는 또 한 번의 개헌을 시사(示唆)하는 박 대통령의 말을 걱정 반(半), 긍정 반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알게 됐지만 그날 박 대통령의 마음속에 10월 유신(維新·72년)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국내외 안보 상황은 긴박했다. 한 달 전인 3월 27일 미국 닉슨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주한미군 2만2000명(7사단)이 철수했다. 북한의 무력과 경제력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앞서 있는 가운데 김일성은 자신의 환갑잔치를 서울에서 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박 대통령은 안팎의 위기를 돌파할 비상한 정치체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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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8.26. 제임즈· 레스턴



[ ..... 미국이 대만으로부터 깨끗이 철군하고 유엔으로부터 국부대표를 몰아내지 않는 이상 중공과의 궁극적 국교정상화는 절대 불가능 ....... ]



대만미군 철수해야 중공과 국교정상화


[중앙일보] 1971.08.27




【홍콩26일AFP합동】 6주간 북평에 머무르는 동안 중공수상 주은래와 5시간 회담한바 있는 뉴요크·타임스지 부사장 제임즈·레스턴씨는 26일 홍콩의 외신기자 구락부에서 5시간에 걸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대만으로부터 깨끗이 철군하고 유엔으로부터 국부대표를 몰아내지 않는 이상 중공과의 궁극적 국교정상화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확언했다.


닉슨 대통령의 중공방문에서 얻어질 성과가 무엇인가에 관해 캐묻는 기자질문들에 닉슨 대통령은 유엔에서의 중국대표권과 인지사태에서 어떠한 양보도 얻지 못할 것이며 얻는 것이 있다면 오직 그의 재선일 것이라고 냉소적인 대답을 한 레스턴씨는 주는 닉슨 대통령과 만나면 동남아지역으로부터 철군하고 장개석 정권과의 안보조약을 폐기할 것을 강력히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공방문 마친 레스턴 기자회견 | 대만문제 두 중국간 해결 주 | 주는 미 관계 광범히 독서 | 닉슨, 대담준비 철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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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문제에 관해서는 당장은 아니라도 가까운 장래에 핵 강대국이 될 중공은 유럽이 영국의 무력『팽창주의』를 별로 염려하고 있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무력팽창주의』를 별로 염려하지 않고 있으나 다만 일본이 강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2차대전시의 『대동아 공영권』과 같은 꿈을 되살리려 하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고 레스턴씨는 전했다. 일본이 대만과 한국에 대한 야심을 버려야만 중공은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할 용의를 갖게 될 것으로 느꼈다고 그는 덧붙였다.


소련에 대한 중공의 공포가 단기적인 것이라면 일본에 대한 그것은 장기적인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주는 굉장한 독서가이며 미국에 관한 글을 극히 광범위하게 탐독함으로써 미국의 사정에 관해 훤히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닉슨 대통령은 북평 방문을 하기 앞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할 것이며 닉슨의 북평 방문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으로 본다고 레스턴씨는 말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300704






1971.9.



[ ..... 중공의 목적이 한국과 여타 아시아에서의 미군철수에 있다는 점이 심히 우려됩니다…... ]


[ ..... 북측은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 남침기회만 노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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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9월20일(현지 시간)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로 향하는 김용식 당시 외무장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셜 그린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만나러 가는 그의 가방 속에는 닉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대중국 관계개선과 주한미군 감축을 시도하고 있는 백악관과 펜타곤에 대한 분노가 절절이 녹아있는 편지였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 대해 끊임없이 침투공작과 무력도발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정책은 ‘중공’의 지원을 공공연히 받아왔습니다…중공은 북한에 대한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북한의 군사력을 더욱 증강시키기 위해 군사원조 합의를 통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중공의 목적이 한국과 여타 아시아에서의 미군철수에 있다는 점이 심히 우려됩니다…한반도에서 외국군이 철수되어야 한다는 ‘붉은 중국’의 주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만약 붉은 중국이 진정으로 긴장완화와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 공산집단의 무력 통일정책 지원과 북한을 강화하는 군사지원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북한이 한반도 긴장완화를 돕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Fm : EA-Marshall Green to : The Secretary, 1971.9.20, ‘Letter from President Park to President Nixon’)



이 편지에서 박정희는 중국정부를 한번도 정식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표기하지 않고 대신 ‘중공(Communist China)’ 혹은 ‘붉은 중국(Red China)’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 수뇌부 사이의 인식 격차를 뚜렷이 드러낸 것이다. 적십자회담 성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북관, 대중관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이 서신은 중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박정희가 당시 상황을 긴장완화가 아닌 긴장고조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으므로 전쟁재발 방지와 한반도 안보에 필수요소인 한미상호방위체제는 강화되어야 하며, 한국군 현대화 프로그램도 신속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목적이 아시아와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인 만큼 중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해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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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말 박정희의 특별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북한 내부를 세밀히 관찰·분석한 결과 ‘북측은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 남침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바 있다. 심지어 1972년 4월에 이르러서도 주한 미 대사관이 분석한 박대통령의 의중은 여전히 ‘북한 위협론’에 기울어 있다(Fm : Amembassy Seoul to Secstate, 1972.4.16, ‘President Park’s View of North Korea Threat’).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가 남북협상을 준비하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크게 대북한 노림수와 대내용 노림수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주한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은 “박정희가 정홍진에게 대북 비밀접촉을 제의하도록 한 것은 적극적인 남북대화 추진 그 자체보다는 북한의 평화공세를 잠재우기 위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전하고 있다(Fm : Amembassy Seoul to : Secstate, 1972.7.7, ‘Assistant Secretary Green’s Conversation with President Park Chung Hee, July 6,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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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남북협상에 부정적이었던 한국 정부와 달리 북한은 1970년대 초반 내내 공세적으로 남북협상을 주장해왔다. 북한의 이러한 ‘평화공세’는 한미관계를 갈라놓겠다는 전술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7·4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이 통일문제 해결에서 일체의 국제정치적 요인을 사상하고 순수한 국내문제로 단순화한 것도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71년부터 계속된 남북대화 분위기가 7·4공동성명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김일성의 ‘남조선 고립’ 계획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이 1972년 2월말 미중정상회담과 5월말 미소정상회담을 통해 미국, 중국, 소련으로 이루어지는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남북대화 지속이 기대한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북한은 공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남과 북은 공동성명 직후부터 그 문구의 해석을 두고 대립한다.



공동성명을 발표한 7월4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박성철은 “(통일 3원칙은) 김일성 수령이 내놓은 제안에 남조선측이 찬동한 것”이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이상 미제국주의자들은 더는 우리나라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침략 군대를 걷어 가지고 지체 없이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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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2.27. 미-중공 공동성명



[ ..... 미국은 대만으로부터 모든 미군 및 군사시설을 철수시키는 궁극적 목적을 긍정한다. .......


...... 대만에 있는 미군과 군사시선들을 점진적으로 감축시킬 것이다. ........ ]




미-중공 공동성명 전문


[중앙일보] 1972.02.28



【상해27일 UPI동양】 닉슨 미국대통령과 중공수상 주은래가 27일 발표한 공동 코뮤니케 전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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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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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은 중국과 미국간의 다년간에 걸친 심각한 견해적 대립을 검토했다.


중국 측은 그들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대만문제는 중국과 미국간 관계 정상화를 가로막는 관건적인 문제이다. 중공정부는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조국에 오래 전부터 반환되어온 중국의 1개성이다. 대만의 해방은 어떤 다른 나라도 개입할 권리가 없는 중국의 내정문제이며 모든 미군 및 군사시설은 대만으로부터 철수되어야 한다.


중국정부는 『1개의 중국·1개의 대만』 『1개의 중국·2개의 정부』 『2개의 중국』 또는 『독립된 대만』 등을 만들어 내려는 목적의 어떤 행동도 또는 『대만의 지위는 앞으로 결정할 문제』라는 주장도 강경히 반대한다.



국민대국민 접촉확대


미국 측은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은 대만해협의 양측에 있는 모든 중국인들이 중국은 하나밖에 없으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을 인지한다.

미국은 이 같은 입장에 이의를 제기치 않는다. 미국은 중국인들 자신에 의한 대만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재확인한다. 이 같은 전망을 염두에 두고 미국은 대만으로부터 모든 미군 및 군사시설을 철수시키는 궁극적 목적을 긍정한다.

미국은 그러는 동안에 대만지역의 긴장이 감소되는 대로 대만에 있는 미군과 군사시선들을 점진적으로 감축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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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8.7. 다나카



[ ...... 일·중공간에 국교가 정상화하면 대만과의 외교 관계가 소멸될 것 ....... ]


[ ..... 일본 재계는 금년 안으로 북한에 대규모 경제 사절단을 파견키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 중 ....... ]



일본 대중공 접근의 파문


[중앙일보] 1972.08.09



일본의 전중 수상은 7일 『중공과 국교를 맺은 나라가 소련과의 관계를 그대로 지속하고 있는 나라는 없으며, 일본도 그 예외일 수 없다』고 언명함으로써 일·중공간에 국교가 정상화하면 대만과의 외교 관계가 소멸될 것임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일본의 「아사히」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일본 재계는 금년 안으로 북한에 대규모 경제 사절단을 파견키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중공과의 국교 정상화를 최대의 정치적 과제로 내세우고 등장한 일본 전중 내각이 중공과의 국교 정상화를 하기 위해 우선 대만을 희생하고, 다음에 이른바 「정경 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키 위한 정지 공작을 벌이겠다는 의도를 선명히 노출시킨 것이다.


전중 수상이 언명한대로 중공과 국교를 맺은 나라 가운데 대만과의 관계를 그대로 지속하고 있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일본이 중공과 국교를 정상화함과 동시에 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경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본이 중공과의 관계 개선에 빙자하여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공과의 국교 정상화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스스로 개별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양자를 고의적으로 결부시키고자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국제적 지위를 상승시켜주어 그 종주국의 하나인 중공의 비위를 맞추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본 상의 회두와 경단련 회장 등 거물급을 포함한 대규모 경제 사절단을 북한에다 파견할 구체적 작업을 벌이는 것을 우리가 용납키 어려운 까닭은 사절단 파견이 일·북한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정치 공작의 일부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북한 관계의 정상화란 궁극적으로는 서로들 국가 승인, 정부 승인을 하고, 상주 외교 사절을 교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기로는 한·일 기본 조약은 이러한 일·북한 관계 정상화를 배제하고 있는 것인데 앞으로 일본이 「두개의 한국」을 양성화시키는 정책을 공공연히 추구코자할 때 한·일 기본 조약을 어떻게 다루어 나갈 것인가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해명을 듣고 싶다.


일본 정부는 9월 하순 전중 수상이 북경 방문 후 한국이나 대만의 반발을 무마키 위해서 특사를 파견할 예정이라 하는데 인국의 이익을 희생시켜 놓고 특사를 보내 무마 공작을 벌인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일본 정부가 중공과의 국교 정상화와 대북한 관계 개선을 명백히 분리하는 사고 방식의 기조 위에서 대한 정책을 추진해 줄 것을 요망한다. 7·4 성명으로 남북 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붙잡혔다 하지만 남북간에 적대적 대립이 지속하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요, 또 이번 상황 속에 일본이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바로 한국에 해를 주는 것임을 일본 정부 지도자들은 명백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대 중공 정책과 관련하여 또 하나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일본이 조만간에 한국 및 대만에 관한 미국의 방위 공약에 대한 외교적 지지를 철회하고 주일 미군 기지를 한국 및 대만 방위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미국 의회 증언에서도 미국의 극동 문제 전문가들은 이런 가능성을 솔직히 지적한바 있는데, 이런 가능성이 자못 현실화하면 한국과 대만은 군사적인 불안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일본 정부는 적어도 한반도에 관한한 미국의 방위 공약에 대한 일본의 지원이 남북간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지 않도록 최선의 대책을 강구함이 일본 자신의 국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임을 지적해 둔다.







1972.9.29. 일중 수교



[ ..... 중공은 『대만이 중공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임을 강조하고, 일본은 이 『중공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 ]


[ ..... 일본은 북한을 「사실상」 승인하고 영사관 설치를 교환하게 될는지 모른다. ....... ]



일·중공 「코뮤니케」가 의미하는 것


[중앙일보] 1972.09.30



29일 일본과 중공은 정상 회담을 끝내고 전문 9개항에 달하는 공동 성명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27년간 양국간에 지속되어온 전쟁 상태는 종결되었으며 외교 관계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이 공동 성명은 앞으로 양국이 평화 우호 조약을 맺기로 합의하였는데 이 조약이 성립되면 양국간의 우호 친선의 유대는 급속히 강화 될 것이다.


현하의 세계 대세로 보아 「아시아」의 두 거인국인 일본과 중공이 전쟁 상태를 종결 짓고, 국교 정상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고 또 망언한 일이다. 그러나 일·중공의 수교는 단순한 국교 정상화의 범위를 벗어나, 사실상의 불가침 묵계를 하고, 또 우호 친선을 빙자하여 「반 동맹 관계」를 형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중공이 어찌하여 미국과의 수교에 앞서 일본과 수교하게 되었는가. 또 일본이 어찌하여 소련과 강화 조약을 맺기에 앞서서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국제 권력 정치상 착잡·미묘한 요인들이 얽히고 설켜 있어 경솔한 판단이나 평가를 불허케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소 양극 체제가 무너지고, 4강 대립하 동「아시아」의 세력 분포를 재편성하는 전환기적 과정에 있어서 일·중공이 결탁하여 미·소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의 새 정치 판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이니셔티브」를 취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중공 공동 성명 제7항은 『일·중공은 그 어느 편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패권을 추구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패권을 확립하려는 다른 어떤 국가 또는 국가 집단에 의한 시도에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항목은 정히 일본 및 중공이 제휴하여 합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당권을 추구코자 합의했다는 뜻을 표명한 것으로 봄이 옳은 관찰일 것이다.



일·중공의 화해·접근은 미·일 안보 조약의 지속을 유명무실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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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성명 제3항에 의하면 중공은 『대만이 중공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임을 강조하고, 일본은 이 『중공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했다. 국제법상으로 보면 일본이 중공을 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임을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된 이상, 1951년 상항 강화 조약 직후에 맺은 중·일 조약은 자동적으로 폐기되는 것이다. 이 중·일 조약은 국민당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의 강화 조약이었으므로 국제법상 그 폐기는 법적으로 두 정부가 전쟁 상태에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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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 정세로 보아 일본이 중공과 수교해야 할 필요성은 중공이 일본과 수교해야될 필요성보다 긴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미국에 앞질러서 중공과의 수교를 서둘렀기 때문에 일본은 중공에 대해서 저자세를 취하고, 수교의 대가로 대만을 희생하게 된 것이다. 이점 일본 외교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아 졸렬했다는 평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중공 관계 정상화는 한편으로 분단 동결하의 한국 정세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앞으로 일본은 북한을 「사실상」 승인하고 영사관 설치를 교환하게 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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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9.30. 자유중국, 일본과 단교



[ ..... 『일본이 중공과 협력하는 날은 일본이 멸망하기 시작하는 날이 될 것』 ....... ]



대만, 일본과 단교


[중앙일보] 1972.09.30



【대북 29일 AP동화】국부는 29일 일본의 대 중공 국교 정상화에 뒤이어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했다.


국부 외교부는 강경한 어조로 된 성명을 발표하고 『양국간의 조약 의무를 전적으로 외면한 일본 정부의 불성실한 태도』로 인한 일·국부간의 외교 관계 단절에 관해 일본 정부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 단교 통고 l2시간 뒤-야비·불성실 드러나


국부 외교부의 단교 성명은 일본이 국부와의 절교를 발표한지 12시간 후에 나왔다.

외교부의 장명은 『일본의 이같은 행동은 그들의 야비성과 성실치 못함을 단적으로 증명했다』고 선언했다.

이에 앞서 장경국 국부 정부 행정 원장은 29일 『일본이 중공과 협력하는 날은 일본이 멸망하기 시작하는 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72.10.16.



[ ..... 미국은 ... 특별선언문에서 닉슨의 ‘중공’ 방문을 특별조치의 동기처럼 서술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는 요구 .....


..... 일본도 ... 일본-‘중공’ 수교와 다나카 총리의 ‘중공’ 방문이 .... 빌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 ]



[ ..... 유신을 단행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인 미국, 일본의 대중국 수교 문제를 특별선언문에서 빼게 된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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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나쁜 미국, 기분 나쁜 박정희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미국과 협의하거나 미국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국무총리 김종필이 주한미국대사 하비브를 통해 미국에 공식적으로 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에 대해 통보한 것은 유신 선포 하루 전인 1972년 10월16일 저녁이었다. 하비브는 뒤늦은 통보에 불쾌해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비밀공작의 윤곽을 꼬집어 말할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던 초헌법적 조치가 곧 취해질 것이라는 점을 미국이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 한 발을 빼기 시작한 미국은 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반공독재체제를 강화하여 미국이 한 발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는 것을 묵인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3주 앞선 9월21일,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적 위기상황을 촉발하고 있다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마르코스의 독재체제 강화를 묵인했던 것처럼 미국은 박정희의 독재체제 강화를 묵인해 주었다. 하비브는 미국이 즉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박정희가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을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고 보고했지만, “미국이 앞으로 몇 시간 내에 박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도록 만드는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고 덧붙였다. 마르코스와 박정희의 시기 선택은 그들로서는 적절했지만, 미국의 외교당국 입장에서 볼 때는 교활한 것이었다. 미국의 정치판은 대통령 선거로, 일반 시민들은 월드시리즈로 아시아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였다.



미국은 계엄령 선포는 한국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을 표했지만, 미리 전달받은 특별선언문에서 닉슨의 ‘중공’ 방문을 특별조치의 동기처럼 서술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는 요구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발표를 몇 시간 앞둔 최종 점검 회의 중 미국의 요구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가 답답해서… 우리가 거짓말했나…”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국내의 반발도 상당할 텐데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는 것을 피하자는 참모들의 건의로 이 대목을 삭제했다. 일본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역시 일본-‘중공’ 수교와 다나카 총리의 ‘중공’ 방문이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의 빌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볼 때 유신을 단행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인 미국, 일본의 대중국 수교 문제를 특별선언문에서 빼게 된 것에 대해 유신이 뼈다귀 빠져 흐물흐물한 ‘곤냐쿠’가 되었다고 일본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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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0708.html#csidx8d35671454af18bbb9cad4b692cb70f

극비, 그러나 천하가 다 아는 극비
2012-02-24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③공작명 ‘풍년사업’









10월 유신에 대한 해외논조


[중앙일보] 1972.11.18



<국제정세 급변대처>


◇ 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지=11월3일자) = 한 미국외교관은 금반사태를 평가하면서 한국정부가 취한 언론검열, 국회해산 및 대학휴교 등의 조치를 단순히 박 대통령의 집권계속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논평하고 박 대통령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은 일·중공관계정상화의 신속한 움직임과 월남평화조건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정말 염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영 외상 한국을 적극지지


◇ 영 (「흄」외상연설=10월17일) = 영국「흄」외상은 10월17일 한·영 협회만찬회에서 요지 다음과 같은 뜻을 전달했다.


『한·영 양국간의 관계는 만족할 정도 이상의 것이 되어있으며 영국정부는 양국간의 우의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금번 계엄령선포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하며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국내문제이므로 영국정부로서 이에 관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정부로서는 한국정부가 어떤 결정을 취하든 간에 한국정부를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평화통일 교섭 대비>


◇ 일본 (일본경제신문) = 남북 쌍방의 개헌의 움직임은 다같이 조국통일을 부르짖고 있는 점이며 한반도가 당면하는 최대의 정치과제를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측은 이 남북한의 평화통일 이 실현될 때까지의 과도적 헌법으로 용인되고 또한 과도기의 타개책으로서 현 체제의 유지 및 강화를 눈앞에 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한국의 비상사태 선언 및 계엄령 선포 등 이러한 일련의 체제를 굳게 한 것은 예상외에 자세가 강한 북한상대로 평화통일교섭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정 감안해야>


【동경신문=10월30일자】 한국의 민주정치의 뿌리는 얕으며 과거에도 동요를 되풀이한 역사가 있다. 북한의 바위와 같은 체제에 비해 이것을 한국의 약점으로 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남북은 지금까지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것이 돌연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놓여있는 곤란한 사정을 감안할 것 같으면 이를 한마디로 비난하는 것은 가혹할 것이다.

여기에 다소나마 밝은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국개헌의 움직임과 병행해서 북한도 헌법개정을 진행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또 한국의 유신헌법안에 대한 북의 반응이 비교적 온전하다는 것이다.


【저팬·타임스=11월1일자】 한국의 박 대통령은 전중정부가 북경을 위해 자유중국을 버린 것을 잊지 않고 있으며 박 대통령이 국제조류에 대비해서 국가를 보호한다고
2022-03-16 15: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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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2022-03-16 15:25:36


10월 유신에 대한 해외논조


[중앙일보] 1972.11.18



<국제정세 급변대처>


◇ 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지=11월3일자) = 한 미국외교관은 금반사태를 평가하면서 한국정부가 취한 언론검열, 국회해산 및 대학휴교 등의 조치를 단순히 박 대통령의 집권계속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논평하고 박 대통령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은 일·중공관계정상화의 신속한 움직임과 월남평화조건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정말 염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영 외상 한국을 적극지지


◇ 영 (「흄」외상연설=10월17일) = 영국「흄」외상은 10월17일 한·영 협회만찬회에서 요지 다음과 같은 뜻을 전달했다.


『한·영 양국간의 관계는 만족할 정도 이상의 것이 되어있으며 영국정부는 양국간의 우의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금번 계엄령선포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하며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국내문제이므로 영국정부로서 이에 관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정부로서는 한국정부가 어떤 결정을 취하든 간에 한국정부를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평화통일 교섭 대비>


◇ 일본 (일본경제신문) = 남북 쌍방의 개헌의 움직임은 다같이 조국통일을 부르짖고 있는 점이며 한반도가 당면하는 최대의 정치과제를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측은 이 남북한의 평화통일 이 실현될 때까지의 과도적 헌법으로 용인되고 또한 과도기의 타개책으로서 현 체제의 유지 및 강화를 눈앞에 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한국의 비상사태 선언 및 계엄령 선포 등 이러한 일련의 체제를 굳게 한 것은 예상외에 자세가 강한 북한상대로 평화통일교섭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정 감안해야>


【동경신문=10월30일자】 한국의 민주정치의 뿌리는 얕으며 과거에도 동요를 되풀이한 역사가 있다. 북한의 바위와 같은 체제에 비해 이것을 한국의 약점으로 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남북은 지금까지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것이 돌연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놓여있는 곤란한 사정을 감안할 것 같으면 이를 한마디로 비난하는 것은 가혹할 것이다.

여기에 다소나마 밝은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국개헌의 움직임과 병행해서 북한도 헌법개정을 진행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또 한국의 유신헌법안에 대한 북의 반응이 비교적 온전하다는 것이다.


【저팬·타임스=11월1일자】 한국의 박 대통령은 전중정부가 북경을 위해 자유중국을 버린 것을 잊지 않고 있으며 박 대통령이 국제조류에 대비해서 국가를 보호한다고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평화협상 근거 마련>


◇ 멕시코 (노베다데스) = 이창희 한국대사는 한국에서 취해진 계엄령선포·개헌 등의 개혁이 북한과의 회담과 통일노력에 필요 불가결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동 대사는 계엄령의 선포가 정부의 통일사업추진을 위한 제반계획이 공표됨에 따라 있을지도 모를 혼란의 야기를 미연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고 헌법의 일부 개정이유에 대하여는 첫째 현 헌법에 의하면 북한공산정권과의 협상이 불가능하므로 평화협상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과 둘째 한국을 침략한 중공이 국제사회에 정식으로 재등장함으로써 국제정치, 특히 「아시아」의 변화된 국제조류에 한국이 올바르게 상응하기 위해서와 세째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고 국민의 대동단결을 확보하기 위하여서라고 지적했다.



<강력 체제는 필요>


◇ 서서 (주르날·드·주네브) = 남북간에 대화가 진행되고있는 이때 박 대통령은 새로운 헌법초안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묻기로 하였다. 대통령의 권한 헌법위원회창설도 더욱 강화될 것이다. 강력한 체제를 필요로 한다는 동기는 이상할 것은 없다. 오늘날 미국의 극동정책변화에 따라 박대통령은 「티우」대통령·장개석 총통, 「마르코스」대통령과 같이 자체를 정비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미·중공의 접근, 일·중공의 수교 등은 한국이 미·일 양국에 가졌던 신뢰성을 약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한국정부는 여사한 외부적인 변화를 내부적으로 보강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또 다른 원인은 남북간의 대화이다.



<미 정책에 불안 느껴>


◇ 호주 (쉬핑·앤드·트레이드·뉴스=10월23일자) =박 대통령은 2차 대전 이후에 양분된 가족 찾기와 자유기업을 재결합시키기 위하여 북한의 공산정권과 회담을 시도하였다.


닉슨의 대 중공 및 소련 화해정책과 미군의 한국에서의 계속 감군 등이 박 대통령과 그 주위실력자들의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하였고 「닉슨」의 새로운 중공정책에 이어 일본의 9·29 북경과의 외교관계수립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 대통령에게 주어진 군대 및 정부에 대한 권력으로 미루어보아 투표를 통한 개혁이 채택될 것 같은데 박대통령은 국민투표에서 이 유신헌법안이 부결될 때 북한과의 대화를 중단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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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통과 무난>


◇ 벨기에 (라·리브르·벨기쿠=10월26일자) = 박정희 대통령이 겪는 시련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불개입정책이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지분규의 냉전상태를 종식시키도록 어떠한 조치를 취하게끔 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부압력 없이 국민들의 성원을 받아 서울과 평양간의 회담을 계속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또한 동시에 헌법 일부조항이 현재 실정과 장차 과정에 합법적으로 적응토록 수정되기를 원하고 있다.


다른 방법, 그것은 무력을 의미하며 한국이나 기타 우방들이 아무도 그것을 생각하지는 않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태 하에서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열의를 볼 때 유신헌법안이 통과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https://news.joins.com/article/1334926








1972.11.22. 유신헌법안 국민투표



[ .... 91.9% .. 참가 ..... 찬성 .. 91.5% .......

.... 새 헌법안은 압도적으로 국민투표를 통과 ...... ]



유신헌법의 확정


[중앙일보] 1972.11.23



유신헌법안에 대한 가부를 묻는 국민투표에 있어서 유권자 총수의 91.9%에 해당하는 1천4백40만8천2백여명이 투표에 참가했고 그중 찬성표를 던진 사람의 수는 1천3백18만여명으로, 총 투표자의 91.5%를 차지한다. 이로써 새 헌법안은 압도적으로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이번 실시한 국민투표에 있어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전례 없이 높은 것은 능률극대화의 정치체제에 대해 국민이 기대를 걸고 이러한 새 체제아래서 평화와 번영, 안정을 이루어보겠다는 염원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박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제정세변화의 격랑을 파헤치고, 남북관계 개선작업에 주도권을 잡아 전환기의 난국을 돌파하여 보겠다는 이를테면, 인물에 대한 신뢰감이 강한 작용을 하게 되었음도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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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내외의 정세는 우리 국가, 우리 국민이 각오를 새로이 하여 변화의 도전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고, 영광스러운 장래를 향해 비약적인 전진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충족시키고자 국민은 주권행사를 통해 새 헌법을 채택,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데 찬표를 던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제도를 발판으로 국민의 친화단결로 자유와 번영 및 통일에의 길을 향해 용기 있는 전진을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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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33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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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에너지 위기를 맞아 일대 용단을 ........

..... 1년 국가 예산의 4배나 들어갈 대역사였다 ......... ]



북한의 핵무기와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 도입은 남북이 비슷했으나 반세기 후 한쪽은 원전으로, 한쪽은 핵무기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최성재



2009년 12월에 한국은 원자력 역사상 두 번의 쾌거를 잇달아 달성했다. 12월 4일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하여 조심조심 원자력 강국의 전족(纏足)을 내딛는가 했더니,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성큼성큼 타이탄의 걸음으로 단숨에 바다와 대륙을 건너가 프랑스를 따돌리고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140만KW(1400MW) 원자력 발전소 4기를 수주하기에 이르렀다. 건설에 200억 달러, 운영에 200억 달러 도합 400억 달러 규모다. 이승만, 박정희, 이명박 세 대통령 그리고 원자력연구원과 한국전력이 모두 큰 일을 담당했다. 짝짝!



1955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고 1959년 원자력연구소 설립하여 1962년에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가 가동된 것은 당시의 열악한 사정을 고려할 때, 국부 이승만의 용단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는 소련군 대위 김일성도 뒤지지 않았다. 북한은 1956년에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1963년에 실험용 원자로 IRT-2000을 도입했다. 기술자립을 이루기 위해 300여 명을 소련에 유학 보내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영변의 5MW 원자로는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북한이 기술을 자립하여 독자적으로 세운 것이다.



처음부터 김일성은 목표가 원자탄이었다. 그래서 시작은 한국에 못지않았으나 북한에선 원자로로 전기를 전혀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일제 덕분에 해방 전에는 전기의 90%를 38선 이북에서 생산했으나 북한은 지금 전깃불이 거의 없어서 밤하늘의 별이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관찰된다(‘재간동이’ 황석영은 좋겠지만). 전기가 엉망이니 공장도 90% 문을 닫았고 가전제품도 무용지물이다.



반면에 한국은 처음부터 원자로는 평화적 이용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에너지 위기를 맞아 일대 용단을 내렸다. 연구용 5MW가 아니라 미국의 도움으로 발전용 590MW(59만KW)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뛰어든 것이다. 1년 국가 예산의 4배나 들어갈 대역사였다. 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었다. 전쟁을 한 번 일으킬 예산을 원자로 하나에 투입한 것이다. 누가 봐도 얼빠진 후진국 지도자의 무모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광기(狂氣)는 이번에도 비전[光氣]으로 입증되었다. 1978년 한국은 원자로에서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년간 한국은 20기를 차례차례 가동하면서 200만개 부품에 대해 95% 기술자립을 이루고 독자적인 원자로도 각각 100만KW(1000MW)와 140만KW(1400MW) 용량으로 둘이나 개발했다. 이번에 수출한 것은 1400MW용 APR-1400이다. 북한에 건설해 주려던 것은 1000MW 발전시설 OPR-1000 이었다. 5년 정도 더 있으면 100% 기술자립하는 APR+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은 ‘구더기 무서우니까 된장 담지 마라!’는 식의 반핵운동(한국의 친북좌파처럼 이들은 공산독재 국가의 핵무기 개발에는 솜사탕 이해와 고무줄 인내로 대함)에 개의치 않고 안전시설의 연구와 설치에 박차를 가하여 미국, 캐나다, 프랑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그 세 나라의 기술을 몽땅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들어 전기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했다.



1982년부터 26년간 소비자물가가 178%나 올랐지만, 전기요금은 고작 5.4%밖에 안 올라 한국의 모든 가정만 아니라 모든 기업, 심지어 조폭 포함 지하경제도 크게 도움을 받은 것은 오로지 전기의 40%를 차지하는 원자력 덕분이었다. 어떤 나라보다 평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프랑스는 반핵운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 주권을 내세워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함께 개발하여 핵무장을 갖춤과 동시에 총 59기의 원자로로 전기의 70% 이상을 생산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가동률이 76.1%로 세계 1위인 한국의 93.3%에 한참 못 미친다. 원자로는 아주 미세한 사고에도 자동으로 가동이 중지되는 만큼 안전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반증이다.




미국은 총 104기 원자로 가동률이 89.9%로 높지만, ‘3마일 섬’ 핵유출 사고로 여론이 악화되어 30여년 간 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지 않아 원전 건설 능력이 형편없어졌다. 한국으로부터 배운다. 급기야 고리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준 웨스팅하우스는 일본으로 팔려갔고 이번에 한국의 하청기업으로 들어왔다. 체르노빌 참사를 겪은 러시아의 원자로는 공짜로 지어 준다고 해도 문전에서 쫓겨나는 상황이고, 자원부국 캐나다는 거의 대외활동을 접었다.



원유가 금융위기 속에서도 배럴당 70~80달러를 오르내리자, 대체 에너지에 세계적인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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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27. 휴전협정 체결. 그해 봄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 전부 철수


1973.8.26.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 시작, 1979.4.26. 철군완료


1974.2.13. 김정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선출. ‘수령의 후계자’로 결정.

1974.4.14.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

이후 김정일은 자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위반으로 규정하고 엄격히 제재. 1974년부터 사실상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 출범



1974.8.15.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육영수 피격 서거.

1974.11.15 제1남침땅굴 발견 고랑포 동북방 8㎞지점에서



1975.2. 김정일 공화국영웅 칭호. 당 중앙위원회 제5기 10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부르는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여 만장일치로 통과


1975년 4월 북경 방문시 김일성 발언을 통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1975.4.17. 캄보디아 공산화

1975.4.30.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굴욕적 패퇴로 종결.

1975.8. 라오스 공산화

1976년 태국 주둔 미군 철수


1976년 2월 2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7년 12월 22일 100억 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 9월 26일 朴대통령 서산에서 고대하던 국산 유도탄(미사일) 발사 참관


1979년 미국,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 방위조약 폐기. 주대만미군 철수.






[ ...... 5만여 명의 월맹 간첩들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여 조종 ........ ]




[ ...... 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이 .......

....... 수십 개의 언론사가 양산되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



......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도주의 운동가 등이

티우 정권 타도에 앞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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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30일 소련제 월맹군 탱크 845호가 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했다. 월남기(旗)가 내려지고 월맹기가 올랐다. 사이공 함락작전의 선봉으로 나선 월맹군 제 203 기갑여단 소속 탱크와 304사단 보병병력이 독립궁에 진입한지 45분 뒤의 일이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자유베트남은 패망 이전 수년간 시종 반미·반전 데모를 주동했던 '공산프락치'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의 조직적인 선전선동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1973년 1월27일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됐고, 그 해 3월 미군과 한국군은 완전 철군했었다. 그 이후 2년 만에 완전 공산화 된 것이다. 미군철수 후 대화로 통일문제를 다루자던 파리평화협정문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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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은 부패척결과 반미 반전평화를 명분으로 연중 계속된 반정부 집회와 시위가 티우 정권을 붕괴시킨 것이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애국을 표방하는 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기기 시작했고, 수십 개의 언론사가 양산되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도주의 운동가 등이 티우 정권 타도에 앞장섰다.



1975년 자유 베트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무릎을 꿇기에 앞서 이들에게 당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정체(正體)이다. 이들은 베트남 공산당(호치민이 1930년 창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가 1962년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전체인구의 0.5%인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이 베트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 5만여 명의 월맹 간첩들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산당 간첩들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미군 철수와 베트남 패망 이후였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가 바로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순수한 애국자연(然) 했고, 미국에서의 반전(反戰)운동에 결정적인 불씨를 지폈다.


간첩들이 시민단체 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 반전평화운동에 몸을 담는 것은 침투가 쉽고, 그것이 대중적 지지기반 확대로 연결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인사들을 '정신나간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투쟁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베트남 패망 30년을 맞는 현금의 한반도 정세는 어떤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은 그 추(錘)가 친북 좌익세력에게로 기울어져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민족공조와 반전평화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연일 공공연히 반미집회를 자행하고 있으며, 북한의 요구를 복창하듯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한미동맹 강화와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유 민주시민들은 그들에 의해 수구 냉전주의자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언론매체들이 늘고 있고,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그런 논조가 해를 거듭할수록 대세에서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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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의 반부패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티우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 ]





[ .... 정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월남공화국』을 조져댄 것입니다. .......


..... 누구에게 호소할데도 없는 사회주의 관료제의 더 지독한 부패체제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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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과 그의 남부 침투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전면 군사공격을 하기 전에,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의 내부로부터 혼란을 가져오고 와해시키는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순서였습니다. 이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을 격퇴 분쇄하는데 월남공화국이 실패한 것입니다.



언론자유와 인권보호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월남공화국이 내부혼란, 와해를 막으려면 지식인들의 통찰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지식인들이 오히려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에 가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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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제를 존경하고 따르는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영신생활을 돌보던 구엔 녹 란(Nguyen Ngoc Lan)신부가 반전과 평화(反戰과 平和)를 외치면서『반대』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하였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공산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공산전체주의와 누가 살아남고 누가 먹히느냐의 결전을 벌이고 있는 월남공화국 수도 사이공에서 가톨릭 사제복을 걸치고 평화와 무장해제를 주장하고 내세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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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딘 디엠을 지지하던 가톨릭 사제 찬 후 탄(Tranh Huu Thanh)신부까지도 1974. 9월부터 『인민의 반부패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티우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티우 대통령을 위시한 월남정부는 가톨릭 사제의 그런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인프레와 불경기로 시달리게 되고, 미국도 월남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고 있을 때, 이 가톨릭 사제들과 그 추종자들은 『월남민주공화국』과 그 산하조직인『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기획, 조직하여 사이공을 위시한 여러 도시에서 벌이게 한 식량요구데모, 공무원 처벌요구데모에 합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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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월남민주공화국』군대가 진격하자『월남공화국』군대는 어이없이 그냥 무너져 내리고, 1975. 4월 30일에 월남공화국은 이 지구상에서 멸망하여 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월남은 언론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재산과 기업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형법정주의의 법치를 잃어버리고, 가톨릭 신앙이 공산당의 허가와 제한을 받는 처지로 떨어진 것입니다.



남베트남 인민은 말레이시아, 태국과 같이 번영하는 경제 대신 공산당이 통치하는 극빈국의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누구에게 호소할데도 없는 사회주의 관료제의 더 지독한 부패체제로 타락하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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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1월의 파리평화협정 때부터 1975. 4월 30일 월남공화국 패망 때까지 2년 3개월여 동안 베트남의 똑똑한(세속적인 뜻에서) 일부 신부들이 정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이제 겨우 국가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에서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하는 『월남공화국』을 조져댄 것입니다. 이런 적대진영 안의 자해분자(自害分子)들을 두고 레닌은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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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

정치활동에 가담한 가톨릭 사제들
written by. 임광규







1975 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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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생전까지 지도부는 전쟁 발생 가능성을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의 다음 정권이나 역시 독재정권인 티우 대통령은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북베트남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비무환을 잊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북베트남도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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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전화 속의 생지옥…월남


[중앙일보] 1975.03.31



월남 제2의 대도시며 북부 지역 최대의 군사 기지인 「다낭」이 공산군에 함락된 최후의 날인 29일 「다낭」 시내는 약탈과 동족 살륙의 생지옥을 연출했으며 몰려든 피난민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었다. <사이공=외신 종합>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수송기 타려다 밟혀 죽고…| 바퀴 상자 속에 7명 탑승…기체에 매달려가다 추락도 | 약탈 성행…군단사령관·공군사단장 실종


28일 밤부터 29일 새벽에 걸쳐 공산군의 총 공격 전주곡으로 일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날이 새고 시 주변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공항에는 수만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다낭」의 공항으로 밀어닥친 필사적인 난민 군중 속에선 오직 재빠르고 힘세고 가장 비겁한 수단을 지닌 자만이 최후의 난민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난민들은 기상에 오르려고 아귀다툼하다가 밟혀 죽었고 7명은 바퀴 상자 속에 들어갔으며 간신히 기체에 매달렸던 사람들도 수백m의 고공에서 비행기의 기대를 움켜쥐었던 손의 힘이 빠지자 해상으로 떨어져 낙엽처럼 사라졌다.



<해상 수송 작전 무위>


「다낭」시 함락 최후의 날인 29일 피난민 공수 작전은 비행기의 부족과 피난민의 폭동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해상 수송 작전도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국제 개발처 (AID)는 한번에 1천7백명을 철수시킬 수 있는 「점보·제트」 수송기들을 마련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월드·에어웨이즈」 항공 사장 전용기「보잉」 727 항공기 1대 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이 항공기가 착륙하자마자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으며 일부만을 태우고 수많은 난민들을 남겨놓은 채 떠나고 말았다.



<50여명이 밟혀 죽어>


「사이공」으로 피난 온 익명을 요구하는 한 「프랑스」인은 피난 비행기에 몰려든 인파 속에 항공기계단위에서 밟혀 죽은 사람은 약 50명이나 되며 그 중에는 손에 어린이를 안고 임신까지 한 부인도 끼여있었다고 말했다.


피난 비행기에 채 타지 못한 군복 차림의 한 월남군 대위는 군복을 갈기갈기 찢고 적에 가담하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피난민 후송 작전을 담당했던 한 미국 수송기 조종사는 월남군 병사까지 서로 비행기를 타려고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였다고 전했다.
또 4백명의 정부군이 민간인들을 제쳐놓고 비행기에 올랐다고 말했다.



<먼저 타려 총격전도>



이 수송기에 타지 못한 정부군 낙오병들은 비행기를 향해 발포했으며 수류탄 1발이 주익 밑에서 폭발했다. 조종사는 멀리서 「로키트」 포성이 다가오는 가운데 수송기를 급히 이륙시켰는데 「리엔·후옹」 UPI 사진 기자는 기체에 매달렸던 난민이 고공에서 남지나 해상으로 추락하는 참경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비행기는 「다낭」 공항에서 한 정부군 병사가 던진 수류탄으로 한쪽 날개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바퀴를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었다.


조종사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태우려고 민간인들이 몰린 곳으로 비행기를 끌고 가려했으나 어느 곳에나 군인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몇몇 군인들은 기관총과 권총을 쏘아댔으나 비행기에는 총알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며 일부는 무기를 내던진 채, 그리고 일부는 수류탄과 기타 무기를 가진 채 비행기로 뛰어들어 왔다.



<정부군 수만명 투항>


월남 정부는 29일 「다낭」시에서 8명의 범법자를 현장에서 총살했다고 발표했으나 정부의 이 같은 강경책도 무법천지화한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다.


「베트콩」 성명은 「다낭」 시내에 갇혔던 수만명의 월남 정부군은 무기를 버리고 「베트콩」에 투항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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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도 최대 불안>


「다낭」 함락이란 비보가 전해진 30일의 「사이공」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는 조용했다.
이날이 부활절이라는 사실 외에 「사이공」 시내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공포나 불안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공산군의 남하가 계속되는 한 이곳에도 미구에 전쟁의 공포가 밀어닥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은 시민들의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국민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한 약 5천명의 「사이공」시민들은 29일 「사이공」시내에서 월맹과 「베트콩」의 무력 공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월남 국기를 흔들며 월맹과 「베트콩」의 「파리」 협정 위반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으며 미국이 월남에 적절한 전투수단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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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2742







난민에 무차별사격


[중앙일보] 1975.04.01



한편 월남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구 왕도 「우에」시로부터 탈주해온 한 경찰관은 31일 5명의 고위경찰관과 아직도 피 교육중인 1명의 경찰간부 후보생이 경찰서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다낭」시로 가는 어선을 타려고 해안선으로 나왔을 때 해안선을 따라 수천 구의 군인 및 민간인 시체가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경찰간부 공개처형 | 「후에」시 점령한 공산군



「다낭」시에 입성한 공산군들은 거리를 질주하며 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으며 그가 탄 연락선은 「모터」가 불붙은 속에서도 무사히 소개선에 도착. 소개선 편으로 지난달 30일 「사이공」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말했다. .






「사이공」의 명운


[중앙일보] 1975.04.02



「크메르」의 「론·놀」 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른 바로 같은 날 「사이공」의 주 방어선인 「나트랑」이 「베트콩」의 손에 넘어갔다. 바로 2일 전에는 「다낭」이 함락되었다. 「사이공」은 완전히 풍전의 등화처럼 시각을 다툴 만큼 명운이 급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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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티우」대통령에게는 꿈결같기만 할 것이다. 평화협정이 「파리」에서 조인된 것은 73년 1월 27일.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월남군의 전력이 그토록이나 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태가 완전히 「스탬피드」현상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월남의 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공격적 난중으로 변했고, 지휘관들은 탈출에만 능했다는 외신보도도 있다. 그리고 겁에 질린 군중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었나보다.



이를 또 공산 측은 교묘하게 이용한 것도 같다. 공산 측에서는 점령지구 주민들을 자기네 편에 받아들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정부측에 피난시켰다.


이리하여 생긴 1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은 정부의 행정능력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산 측은 「크메르」에서도 이런 전술을 썼다. 그리고 일견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도인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은 2백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식량보급에 실패한 것이 「론·놀」정부를 자멸로 몰아넣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월남 수도는 미군의 출동만이 유일한 구제책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군대 출동권을 크게 제한 받고 있는 「포드」 대통령으로서는 월남사태에 대한 군사개입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더욱이 협상의 마지막 기회도 이제는 잃은 게 아닌가 염려되기도 한다. 「사이공」의 목덜미를 쥐고있는 공산 측은 「티우」정권의 내부 붕괴를 기다리는 재미(?)만이 남아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https://news.joins.com/article/1402895









1975.4.



[ ...... 미국은 더 이상 협정의 사문화를 선언하거나 반격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

..... 「키신저」가 「사이공」에 약속한 사항은 『협정의 수호를 위한 도덕적인 지원공약』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 「포드」 미국대통령은 3일 미군 전투부대의 인지 재투입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 ]




사설



[중앙일보] 1975.04.05



월남사태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자유「아시아」제국에 심각한 애허와 회의를 안겨주었다. 「하노이」가 「파리」강화협정을 현저하게 위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미국은 더 이상 협정의 사문화를 선언하거나 반격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술레징거」 국방장관의 4월2일자 기자회견에 의하면 협정체결 당시 「키신저」가 「사이공」에 약속한 사항은 『협정의 수호를 위한 도덕적인 지원공약』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월남·한국·미국


그나마 허술했던 「파리」협정을 수호하는데 있어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도덕적인 공약만을 내세웠다는 사실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이제 월남국토의 3분의 2가 「하노이」의 「반도덕」적인 협정위반으로 유린된 마당에 있어 미국의 『도덕적인 지원공약』이란 한낱 때늦은 난민구제사업으로나 나타나게 되었다. 과연 「포드」 미국대통령은 3일 미군 전투부대의 인지 재투입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렇다면, 한국을 비롯한 자유「아시아」제국으로서는 두개의 중대한 의문점을 해명 받아야 하겠다. 미국의 방위공약은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 그리고 그 공약이 믿을만한 방패 구실을 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 것인가.


이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는 「포드」대통령과 「슐레징거」국방장관이 거듭 협조했다는 대한 방위공약의 신빙성은 충분히 납득될 수 없다. 미국은 과거 월남정부에 대해서도 누차 대월방위공약을 확인하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와서는 『월남엔 또다시 개입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만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공약이란 것이 또 다시 『도덕적인 것』으로만 격하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공약은 도덕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지원의 약속인 것이다.


미국의 대우방지원공약이 고작 도덕적인 언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국제공산세력은 월남에서 맛본 재미를 다시 한반도에서 맛보려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아시아」공산세력은 하나의 공통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자유「아시아」지역의 민족주의운동을 반체제화 한 다음 일단 「게릴라」전을 일으켜놓고서 미국의 공약이 한낱 『도덕적인 것』으로 후퇴하는 순간에 대규모 정규전으로 나오는 수법이다.


김일성집단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다. 저들이 내세운 「강화협정」이니 「대민족회의」니 하는 정치공세나 땅굴작전이 이틀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월남이나 한국의 내정이 불안정하게 되면 될수록 이같은 수법은 더욱 노골적으로 표면화하게 마련이다.


이것을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전쟁 또는 인민전쟁이라 부른다고 한다.


때문에「아시아」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된 혁명전략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외교나 조약이 아니라 군사적 억지력임을 알아야 한다. 공약이란 것도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군사력과 실전병력의 배치를 빼놓고서는 신통한 억지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때문에 미국은 하루속히 한·미 방위공약의 미결조항을 보강하여 북괴의 도발때의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의 자노를 명문화하고 주한미군의 억지력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한국군현대화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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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3192







사이공 최후의 목격자 | 한국인 74명 「괌」 도착


[중앙일보] 1975.05.06



월남 최후의 날 「사이공」을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인 74명(확인된 사람) 은 기아와 폭서 속에서 남지나해의 거센 풍랑을 뚫고 6일만의 긴 항해 끝에 「필리핀」의 「수빅」만에 도착했다가 비행기편으로 5일 「괌」도에 도착, 급조된 수용소에 입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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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주월 대사 등 공관 직원들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전날인 29일 상오 10시 미 대사관으로부터 즉시 철수할 것을 연락 받고 집결지 미군 「아파트」로 달려갔으나 「아파트」 경비병이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아 김 대사를 비롯한 이들은 할 수 없이 다시 제2집결지인 미 대사관 「게이트」 25로 뛰어야 했다. 미 대사관 주변은 탈출하려는 인파로 들끓어 철수 난민이 들어설 틈도 없을 만큼 탈출자들이 숲을 이루었다.


<집결지에 못 들어가>


김 대사와 이상훈 참사관은 대사관 본관으로 들어가 보니 해군 연락 장교 이문학 해군 중령(38) 등이 이곳에서 철수 「헬」기를 기다렸다.
미 해병대 경비병들은 개미떼처럼 밀려 닥친 월남인과 외국인들에게 질서를 잡기 위해 공포를 쏘아 댔다.


이 틈바구니에서도 이 중령 일행은 침착히 「헬」기를 기다렸고 「게이트」 25에 들어서지 못한 한국인 40여 명이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탈출의 길을 찾으려고 아우성쳤다.


<공포쯤엔 막무가내>


이들이 김 대사의 주선으로 미 대사관 안으로 들어온 후 30일 상오4시쯤 미 「치누크」 「헬」기가 닿아 미 대사관에서 철수가 시작됐다.

질서 있는 철수가 있을 수 없다. 저마다 먼저 타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이따금 미 해병대 경비병들이 공포를 쏘며 질서 유지에 안간힘을 썼으나 막무가내며 미 대사관 뒤뜰은 혼란 그것이었다.


이 중령은 자신이 어떻게 「헬」기 안에 들어와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필사의 탈출에 몸부림치는 인파에 저절로 밀려 「헬」기를 탄 자신을 발견했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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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5775








1975.4.30.


[ .....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 ........

.....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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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韓美 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였다. 그는 朴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고, 본부에 대해서 한국의 의도를 적극 개진하고 자신의 대안을 설명했음이 최근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서 나타난다.


다음 電文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을 개발해야겠다는 朴 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스나이더 대사의 지적이다.


바로 하루 전 사이공으로 월맹군이 진주하여 베트남戰(전)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나 서울이 위기감에 휩싸여 있을 때인 1975년 5월 1일,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요지: 어제 스나이더와의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朴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미사일 기술에 대한) 한국과 록히드社(사)의 계약을 승인해 주지 않은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나는 미국 정부가 그동안 한국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여러 차례의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이는 미국 정부가 일본이나 西(서)유럽 국가들 같은 선진국에도 개방을 통제하는 첨단 기술의 수출 문제이며, 미국은 이 분야에서 강력한 독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요청에 대해서는 우리가 韓美 양국 간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되는 한국의 장기적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며, 분명히 알려준다면 개별 항목들에 대해서는 수출허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향후 수년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하면서, 국방과학연구소장을 나와 접촉토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향후 3~5년 이내에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미국이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한국으로서는 제3국으로부터라도 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朴 대통령은 그로 인한 한국의 재정적 부담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駐韓미군의 철수 계획을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할 때까지 미사일 개발을 늦춘다면 그것은 너무 늦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朴 대통령에게 미사일 개발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바람직한 방법은 미국과 협력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朴 대통령은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는 군수품 조달에서 自立(자립)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며,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중시하고 있으니 미국이 이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駐韓미군 철수에 관한 朴 대통령의 우려를 다시 한 번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미사일 전략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그처럼 중차대한 전략적 결정은 상호 합의가 따라야 하니 향후 안보협의회에서 다루자고 제안했다. 朴 대통령은 한국의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내가 워싱턴에 신속히 보고할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상세히 브리핑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의견: 지금까지 수차에 걸친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駐韓미군 철수에 대비한 한국의 자주국방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혀 왔다. 이번 면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駐韓미군 철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그래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는 동안 자립적인 군수산업을 신속히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朴 대통령의 국방 정책에 대해 충분하고도 조속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현재 美 의원들의 태도를 감안할 때,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朴 대통령의 우려도 무시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그의 계획도 무시할 수 없다〉



이 電文에서 보듯이, 朴 대통령은 이날 3~5년 이내에 地對地(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스나이더 대사에게 밝혔는데, 그 3년 4개월 뒤인 1978년 9월, 사정거리 180km의 국산 地對地 미사일인 ‘백곰’의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朴 대통령이 목표달성의 시기를 밝힌 계획들은 거의 이뤄진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公言(공언)한 것은 지켰다.


駐韓 미국대사 스나이더에게 朴 대통령이 직설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예상하고 있다고 밝힌 점은 인상적이다. 朴 대통령은 월남이 망해 가는 과정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미군이 파리휴전협정에 따라 월남에서 철수한 뒤엔 對월남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고 월맹의 명백한 협정위반을 방치한 사실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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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秘話/미국은 박정희의 核개발을 이렇게 좌절시켰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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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 ]





[ 박정희 대통령 일기 중에서 ]




1975년 4월 30일 : 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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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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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日記



만고역적에게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千秋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 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大業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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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까 유신에 대한 얘기가 중간에 끊어져서 말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레야 뗄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간 안에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또 아버지가 생전에 유비무환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유비무환 정신이 이 자주국방에서와 같이 잘 나타날 수가 없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그 동안 몇 십년동안 미국에 의존해서 국방을 했는데, 나라를 지켜왔 는데, 그 동안 미국이 우리의 국방을 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미국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나라에 의존해서 지켜야 한다고 할 때 그 서러움, 그 허망함이라는건 아버지 시절에 있었던 일로 잘 나타난다고 생각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65년도에 아버지와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 협상을 하시고서 곧 이어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미국대사로 와있던 브라운씨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 각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단단히 약속을 받은 게 있어요. 그것은 한국군을 현대화시키겠다는 것, 또 하나는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절대 미군을 뽑아가지 않겠다는 것,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4년후에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그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자 72년까지 뽑아가겠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 협상도 소용이 없었지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뽑아가는 판이었으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군대의 사정을 보게되면 그 당시 미국의회 청문회에서도 다 증언이 되었던 얘긴데 그때 우리나라의 군장비가 6·25 당시때 것, 2차대전때 것, 이런 것이 섞여 가지고 완전히 고물부대라는 거죠. 그런 것을 미국에서 뻔히 알면서도 그냥 그 정책에 의거해서 그대로 뽑아가겠다는 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로선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1대 1로 대결해도 힘든, 우리가 그땐 승산이 없던 때였죠. 그런데 북한은 그때 중공과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대통령이 그 다음에 포드 대통령으로 바뀌니까 더 이상 추가 철군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 몇 년 못가서 카터가 당선되니까 이번에는 또 철군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나왔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남에게 의존해서 국방을 하게 될 적에는 그쪽의 정책에 따라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변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유비무환 말씀을 아까 드렸지만, 71년도에 닉슨 대통령이 여기서 7사단을 뽑아갈 때 잔여 2사단에 대해서 언제 뽑아간다는 언질을 미국에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국에게 약속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끊나면 반드시 잔여부대에 대해서도 얘기가 있을거다, 그때, 미리 짐작을 하시고서 71년부터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굉장히 서두르셨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그런 방만한 체제를 갖고는 빠른 시일내에 방위산업과 자주국방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셔 가지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셨죠. 72년도에. 그것이 유신이죠.


그리고 73년도에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부족해서 거기에 우리 자체 전력증강 계획을 추가시키셨고, 75년도에는 우리나라의 국방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방위세를 신설하셨어요. 그래서 75년까지 그렇게 하신 후에 아버지 계획은 1980년도까지는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어서 1대 1로 북한하고 대결할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갖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또 경제면에 있어서는 4차 5개년 계획이 1981년도에 끝나는데 그것도 1년 앞당겨서 1980년도까지 4차 5개년 계획을 마무리 지어 가지고 그때까지 자립경제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말씀이 그때부터 즉 71년부터 그렇게 자주국방을 위해서 미리미리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80년도까지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계획이 우연히도 카터 대통령이 4, 5년 후에 미군을 마저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그 연도하고 우연히도 맞아 떨어져서 만약에 미리 그런 대비를 안했다면 카터 대통령의 그런 정책이 나왔을 때 상당히 당황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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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방송






1970


[ ..... 북한군과 남한군의 군사력 비교(Military Balance)를 3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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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1970년 11월 2일에 개최된 제5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은 "당의 4대 군사방침이 훌륭히 관철된 결과 인민군대는 강력한 공격수단과 방위수단을 다 갖춘 불패의 혁명무력으로 되었다. 전체 인민이 다 총을 쏠 줄 알며, 총을 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지역에 방위시설이 구축되었고 주요 시설이 요새화 되었으며, 소총은 물론 다른 여러 가지 현대적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들까지 만들 수 있는 자립적 군수공업기지가 건설되었다"고 호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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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표는 영국 전략연구소 보고(1970년 9월 14일)에 의한 남북한 군사력 비교이다. 몇 가지 항목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전차(戰車)를 보면 한국군의 주력 탱크는 M-4인데, 이 전차는 2차대전 때 쓰던 구식 병기로서 장착한 포는 76㎜이다. 이에 반해 북한군은 T-54, T-55, T-59 등을 보유하고 있는데 100㎜ 포를 장착하고 있으니 한국군의 탱크로는 대적할 수 없다. 전차 대수도 무려 900대나 된다. 화포(火砲)에 있어서도 북한은 대공포 1,500문, 화포 6천 문으로 한국군을 압도하고 있다. 전투기에서는 남한이 200기를 보유한 데 비해, 북한에는 최신예기인 MIG21 90기를 포함, 총 580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인 전략 평론가는 북한군과 남한군의 군사력 비교(Military Balance)를 3 : 1 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꼭 같다. 한국전쟁 때 남한은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 없는 상태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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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1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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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은 1월 11일에 있었던 연두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과 관련, 미국 대신 일본을 반공 대역(反共 代役)으로 내세우자는 논의도 있는데, 만약 일본의 이런 역할이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의 일환으로 제기된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에 의한 극동지구의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의 역할에 대해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으로서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애그뉴 부통령은 美 7사단의 철수는 1971년 6월 말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미군은 계획보다 3개월을 앞당겨 71년 3월 27일 부랴부랴 한국을 떠났다. 후에 안 일이지만 닉슨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온 신경을 쓴 나머지 제7사단 철수를 강행했으며, 철수 시기도 앞당긴 것이었다. 닉슨으로서는 약소국인 한국에 대한 고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고별식에서 美 제 7사단을 부대 표창하고 사단장에게 보국훈장 국선장(保國勳章 國仙章)을 수여했으며, 특히 6·25 전쟁 중의 무공과 희생에 대하여 치하와 애도를 표했다. 美 제7사단 2만 2천 명이 철수하자 서부전선에서 약 18마일에 대한 제1선의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주한 美 제2사단은 이 임무를 한국군에 인계하고 제7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한국군은 155마일 휴전선 전체의 방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김일성이 휴전 후 18년간을 자나깨나 바라던 주한미군 철수는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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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은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美 7사단뿐만 아니라 앞으로 5∼6년 사이에 모든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계획이 추진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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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완전철수가 앞으로 5∼6년 후에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이 촉박하다. 그래서 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71년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해이며,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라고 했다. 2∼3년 사이에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국군의 현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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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10).htm






한국 미사일 개발의 산 증인 구상회 박사 회고(1)

박대통령 자리까지 날아온 탱크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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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28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70년대에 달성해야 할 국방 연구개발 목표로 첫째,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둘째, 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공업은 한 마디로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분야는 직조기의 형틀 주조가 고작이었고, 단조기술은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통신산업도 야전 전화기를 겨우 만드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가공 능력도 금성사(현 LG)의 라디오용 금형 제작이 고작이었고, 재봉틀 시계 자전거 및 자동차의 반제품 조립이 공업력의 전부였다.



방산 분야는 더욱 한심한 상태였다. 경남 양산에 미국 지원하에 M-16소총 공장을 건설중이었으나 완공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고, 총열을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대전의 국제특수금속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브로칭 머신」 한 대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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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2/nd99020340.html







1971.11.10. 경제 제2비서실 수석비서관 오원철


[ ..... 방위산업 육성은 물론 그 기본인 중화학공업 건설도 박 대통령이 몸소 챙겨야겠다면서 참모진으로서 오원철씨를 청와대비서실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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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한참 심사숙고하더니 돈이 제일 적게 들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하여 유사시에는 민수부문의 전용으로 병기생산능력을 극대화하는 일석이조의 신전략에 찬성, 결단을 내리면서 관계부처와 협조해서 우리들 안대로 진행토록 지시했다.


나와 吳 차관보는 서재를 물러 나왔는데 박 대통령이 다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급히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방위산업 육성은 물론 그 기본인 중화학공업 건설도 박 대통령이 몸소 챙겨야겠다면서 참모진으로서 오원철씨를 청와대비서실에 근무케 하라는 분부였다. 나는 경제제2비서실을 신설하여 차관대우 수석비서관에 임명할 것을 건의, 오원철씨는 그 다음날 정식발령을 받고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1971년 11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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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22).htm






1971.11.11. "번개사업"


[ ...... 총포.탄약 등 ... 4개월내에 국산화하라 .......

..... "그때처럼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들 미쳤었다" ........ ]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집념



1. 군장비 국산화 작전 "번개사업"


71년 11월 11일 청와대비서실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ADD)로 밀명이 떨어졌다.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무기와 주요 군수 장비를 앞으로 4개월내에 국산화하라"는 황당한 지시였다. 이 명령은 "번개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곧바로 실행에 옮겨진다.


금속,기계,전기,전자,화공학 등 무기 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 기반과 기술축적이 전무하다시피한 당시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국산 기관총이나 박격포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같은 무리한 작전이 감행된 데는 물론 그 이전의 1. 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대남 도발과 이 해 3월의 주한미군 철수(2만명)가 빚어낸 안보 위기 의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번개 사업에는 당시 국내 과학계의 핵심 소장들로 손꼽히던 10여명이 부문별 책임자로 동원했다. 후에 품목 변동이 있었지만 우선 소총.수류탄.지뢰 등을 11개 부문으로 나누어 연구에 들어갔다. 11개 부문에 책정된 총예산은 겨우 9백70만원이었다고 한다. "총알이 안 나가도 좋으니 일단 만들어 보라"는 엄명 아래에서였다. 연구 작업의 야전 지휘관은 물론 자타가 공인한 "맹장 오원철 수석"이었다. 당시 연구 작업에 참여 했던 과학자들은 지금도 한결같이 "그때처럼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들 미쳤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취재에 응한 뒤에는 반드시 "요즘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사심없이 일에 몰두한 사연들을 더도 말고 사실 그대로만 전해달라" 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해 연말의 성탄절은 물론 신.구정 때도 집에 들르지 못했고 연구실의 전등은 24시간 밝혀져 있었다. 사업 하나하나가 가시밭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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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주 국방 계획사업


당시 왜 이런 무리한 일들이 감행됐을까? 당시 우리의 탄약 비축량은 전쟁이 터지면 불과 10여 일밖에 지탱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개인화기의 주종이던 M1 소총도 미국이 생산을 중단하는 바람에 부품 공급이 끊겨 절반 가량만이 반자동 사격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발 사격 기능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20개 사단 병력의 예비군도 장비는 2개 사단분밖에 없었다. 거기다 북한군은 병력을 휴전선쪽으로 자꾸 전진 배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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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박정희의 야심찬 구상이 미국 유학을 거친 이들을 주축으로 한 젊은 과학자들의 정열과 맞물려 밤낮없는 연구.개발 작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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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예산은 방위산업에 20억원, 기계공업 육성에 10억원이 잡혀 있었다. 설렁탕 한 그릇 가격이 1백원일때로, 50원짜리 동전이 새로 나온다는 소식이 화제가 될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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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국과연으로 오수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제품으로 즉시 사격시험을 하라는 지시였다. 사격시험은 2차 시제품부터 할 것으로 믿고 있던 우리는 이 지시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수석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 이것 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사격시험은 1971년도 크리스마스 바로 전날이었다. 미군 군사규격의 로켓 포열재료를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어 강도가 떨어지는 창틀용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해 시제했기 때문에 사격시 혹시나 폭압을 못 이겨 파열되지는 않을지, 파열된다면 인명 피해는 얼마나 클지 등등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전차 로켓탄은 위력이 큰 병기인데다 규격 재료를 쓰지 않은 시제포여서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충분한 안전 대책을 취해야 했다. 로켓포 주위에 모래가마니를 쌓아 방호벽을 만들고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발사장치를 포에서 분리해 2m 길이의 전선으로 연결한 후 포와 사수 사이에도 모래가마니를 쌓았다. 참관인들은 로켓 발사시 뒤로 분사되는 후폭풍(後暴風)을 피해 로켓포 측방 50m 위치에 자리잡게 했다.


발사준비가 완료됐는데도 사격을 위해 차출된 병사가 겁을 먹고 쏘려고 하지 않아 첫 발은 개발 책임자인 내가 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기도가 나왔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눈을 감고 격발기를 당겼다. 순간 3.5인치 로켓탄은 『꽝』하는 굉음을 내고 날아가 표적에 명중했다. 이 순간 모두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감사 기도가 나왔다. 연구원들과 같이 로켓포를 육안 검사해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머지 시제포 3문에 대한 사격을 연구원들이 차례로 실시했다. 명중률도 높았고 염려했던 포열도 이상이 없었다. 규격 재료만 사용하면 로켓포 국산화는 문제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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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의 극비명령


1971년 12월24일 제1차 번개사업 시제품에 대한 사격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크리스마스 날 오랜만에 귀가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목욕탕과 이발소를 찾았다. 번개사업이 시작된 지 한달 반밖에 안 됐는데 마치 수개월이 지난 것 같았다.


월요일 일찍 출근해 2차 번개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있는데, 오수석으로부터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른 때는 대개 비서관을 통해서 연락했는데 그 날은 오수석이 직접 전화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수석 사무실로 들어가니 공군 작전참모부장인 김중보(金重寶) 소장이 먼저 와 있었다.


오수석의 표정이 다른 때와는 달리 굳어 있었다. 오수석은 메모지 한 장을 꺼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각하의 명령을 하달한다. 극비사항이다. 보고 난 후 즉시 파기하라. 오늘 당신들을 급히 부른 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서 사전 준비를 위한 것으로 정식 명령은 국방부를 통해 하달될 것이다. 국과연은 국방부의 명령을 받는 즉시 개발계획을 작성해서 청와대에 보고하고, 공군은 유도탄이 개발된 후 작전운영계획을 수립해서 대통령께 보고할 것. 이상』



오수석이 내민 것은 놀랍게도 박대통령의 친필 메모였고, 메모지 서두에는 빨간 잉크로 「極秘」라고 씌어 있었다. 그 내용이 하도 엄청난 것이라 나는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메모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도탄 개발지시


극비

⊙ 방침

(1) 독자적 개발체제를 확립함.

(2)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되, 1단계는 75년 이전 국산화를 목표로 함.

(3) 기술개발을 위하여 국내외 기술진을 총동원하고 외국 전문가도 초청하며 외국과도 기술 제휴함.


⊙추진계획


(1) 비교적 용이한 것부터 착수한다.

유도탄 사거리 200km 내외의 근거리

(비행거리가 멀면 투자비가 고가, 기술의 고도화를 요하게 됨).

탄두 전략표적 파괴목적으로 파괴효과가 큰 것을 개발하되 탄두의 교환성을 유지함.


(2) 유도탄 기술연구반을 ADD(국과연)에 부설하고 공군에 유도탄 전술반을 설치함.

이상.


당시 우리나라 기술 수준이 3.5인치 로켓탄도 못 만들어 쩔쩔매던 판국에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유도탄을, 그것도 4년 안에 개발하라는 것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기술수준이 어떤지 대통령이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대통령이 적극 도와준다고 해도 의욕만 갖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수석의 숨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번개사업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것만은 지나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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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월3일


朴대통령은 전해 12월에 만들었던 국산 兵器 시제품의 試射會(시사회)를 참관했다. 이날 시사회는 26사단 지구에서 있었다. 對전차지뢰를 터뜨리는 것을 朴대통령은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다.


고물탱크 밑에 파묻어놓은 지뢰가 터지자 불기둥이 쏫았다. 그 순간 내빈석에서 보니 무슨 검은 물체가 '휙'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악'하면서 몸울 움츠렸다. 그 물체는 내빈석을 넘어 멀리 날아가렸다. 모두 '휴'하고 안도하는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당담수석비서관 吳源哲의 발밑으로 '탁'하면서 떨어지는 게 있었다. 쇠조각이었다. 吳수석이 대통령을 보니 쌍안경으로 폭발지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파편이 날아온 것을 모르는지 '지뢰란 대단한 것이구만. 砲身이 떨어져 나갔어'라고 했다.


劉載興 국방장관은 '중지!'라고 외쳤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순서대로 진행하세요'라고 말했다. 시사회가 끝난 뒤 대통령은 81mm 박격포쪽으로 가서 포신 윗부분을 몇번이나 쓰다듬었다. 吳수석이 보니 꼭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그는 더 이상의 치하는 필요없다고 느끼며 눈시울이 적셔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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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5월엔 전방기지에서 대공화기 벌컨포 시험사격이 있었다. 잘 나가던 포가 갑자기 멈췄다. 관계자가 약실(藥室) 뚜껑을 열자 벌겋게 달아오른 포탄 하나가 폭발했다. 떨어져 서있던 이석표 경제2 수석실 비서관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박 대통령이 서울대병원 의사들에게 “반드시 살려내라”고 했지만 그는 1주일 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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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22일 (목)



음력 11월 12일 동지(冬至), 백 억불 수출의 날. 백 억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인사 7천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천여만 불이었다. 그후 1964년 11월말에 1억불이 달성되었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백 억불 목표를 달성했다. 그 동안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백 억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10억불에서 백 억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모든 여건이 우리가 더 불리한 여건 속에 이룩한 성과라는 데서 우리는 크게 자부를 느낀다.



1981년에 가면 2백 억불을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6백 억불이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무서운 저력이 이제야 폭발적으로 발산될 때가 왔다.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분발해야 한다. 오늘 이 날은 우리 한국경제사상 길이 기록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수행에 있어서도 길이 부각될 이정표가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백 억불, 이것은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굳게 다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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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9.26.



유도탄 개발에의 꿈


유도탄을 자체개발 보유한 7번째 나라




1978년 9월 26일, 이 날은 오원철 수석비서관이 그의 저서 "한국형 경제건설"에 기술한 대로 바야흐로 우리 나라가 '미사일 시대'를 연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이 날, 안흥 종합시험기지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들과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존 배시 주한 유엔사령관 및 국내 보도진 등을 포함 1백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이 날 공개된 국산 유도병기는 모두 우리 과학기술진에 의해서 전 과정이 설계, 제조, 개발된 것으로서 한국형 지대지 장거리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장 로켓, 대전차 로켓 등등이었다.


이 날 시험발사는 대전차 로켓부터 시작했는데 계곡에서 발사된 로켓포는 발사 순간 맞은편 벼랑 및 목표물에 정확하게 꽂혔으며 그 때마다 지각을 찢는 폭음과 함께 바위에 큰 구멍이 뚫렸다. 다음은 왼쪽 언덕 위의 다연장 로켓이었다. 발사신호가 떨어지자 로켓은 연기를 뿜으며 단숨에 바다를 건너 약 5km 떨어진 무인도 앞바다로 날아가 목표물에 명중되어 불꽃이 피어올랐으며 잠시 후에 폭음이 산울림으로 되돌아왔다. 뒤이어 20__30방의 로켓이 비오듯 날아갔고 목포지점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바뀌었다.


다음 하이라이트인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의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화살 모양의 비행체가 불기둥을 뿜으며 수직으로 솟아오르고 1단계 로켓이 떨어져나간 다음 2단계 로켓이 점화되고 포물선으로 궤도를 잡아 순식간에 시계를 벗어났다. 몇 분 후에 군산 앞바다의 목표물에 명중했다는 신호가 전해졌으며 관람대와 통제소에선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이르는 유도탄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세계에서 7번째로 유도탄을 자체 개발 보유한 나라가 된 것이다. 또한 이 유도탄 시험발사 성공은 우리 나라가 독자적인 무기체제를 이룩하는 데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비로소 우리 방위산업이 고도 정밀과학 병기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입증해 주었다.


특히 1.21청와대 습격, 푸에블로호 납치, 현충문 폭파 등과 같은 북쪽의 도발이 있을 때 즉각 보복응징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어 북쪽의 도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날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에 '유도무기 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돼 불과 4년 만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관계관들 참관하에 역사적인 시험 발사가 있었다. 1) 대전차 로켓, 2) 다연발 로켓, 3) 중거리 로켓, 4)장거리 유도탄, 네 종목 다 성공적이었다.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



오원철 수석비서관에게 친필로 지시했던 유도탄 개발


이 날의 시험 발사 성공이 있기까지는 1971년 12월 26일 박 대통령이 오원철 수석 비서관에게 친필로 '유도탄 개발 지시'를 내렸고, 오 수석 비서관은 국방부와 협의한 후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 책임하에 국내 관련 전문가들로서 연구계획단을 협의, 편성, 추진키로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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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78년 9월 26일 앞서 기술한 대로 박 대통령을 모시고 개발에 성공한 유도탄을 공개 실험 발사했다. 이 유도탄에 사용된 외국제 부품은 유압 장치 한 개 뿐이어서 완전 국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압 장치는 수량이 적어 국산화하는 것이 비경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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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9.26.



[ ...... 적중하는 광경을 컴퓨터 스크린으로 지켜본 젊은 연구진들이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

우리도 ... 감명과 실오라기만한 틈새도 없는 공감을 함께 .......

모두 우리 손으로 설계하고 제작했다.


우리의 국산 유도탄 시험발사 성공에 일본 언론계를 비롯한 외신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 ]



[ ...... 국가발전 추세에 대한 국민의 자신감이 획기적으로 고무되었다 ......... ]



1978.9.28. 조선일보 사설



사설


유도병기의 개발성공

- 평화의 이정을 앞당기는 감명의 개가




1


자주국방과 안보에 대한 국민적 자신감이 또 한단계 높아졌다. 현대 무기의 첨단으로 일컬어지는 고도 정밀 유도병기인 유도탄 순전히 우리의 손으로 개발되어 그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26일 박대통령 임석아래 실시된 국산유도탄 시험발사 성공광경을 보도하면서 보도진은 지각을 찢는 폭음과 함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유도탄은 수직으로 목표물에 명중했다고 전했다. 특히 장거리 유도탄이 1단계 로키트를 떼어내고 2단계 로키트를 점화, 눈 깜작할 사이에 시야를 벗어나 정확하게 궤도를 비행한 다음, 목표물에 적중하는 광경을 컴퓨터 스크린으로 지켜본 젊은 연구진들이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또한 전했다. 우리도 그 장소에 있어서 모든 광경을 지켜본 것이나 다름 없는 감명과 실오라기만한 틈새도 없는 공감을 함께 가지게 된다. 40세 안팎의 젊은 연구진이 어찌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는가. 그들 젊은 과학도들의 두뇌와 손과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정이 그것을 성공시키는 기술책임을 맡았었고, 그리고 마침내 개가를 올린 것이다.


이날 시험발사에는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을 필두로 중거리 유도탄, 쉴 새 없이 적진을 강타하는 다련장로키트, 대전차 로키트 등이 등장했다. 이들 고도 정밀유도병기들을 모두 우리 손으로 설계하고 제작했다.


우리의 국산 유도탄 시험발사 성공에 일본 언론계를 비롯한 외신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간추리면 한국의 미사일개발 성공이 동북아 정세에 큰 영향을 줄 것이며 군사능력면에서 북괴를 앞질렀으며 곧 양산체재를 갖춰 이를 일선에 배치할 것으로 본다는 등으로 요약된다.



2


한마디로 충격적인 반응을 외신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반응과 분석에 우리로서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가 거둔 우리의 의의를 먼저 음미하고 평가하는 순서가 앞서야 하겠다.


우리의 목하의 최대의 과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저지하는데 있다. 북괴로 하여금 무력에 의한 남침야망을 단념케 하는데 우리는 온갖 노력과 역량을 쏟아 왔다. 이 우리의 노력이 이번의 유도병기개발 성공으로 진일보의 성과를 거둘 것을 우리는 믿고 싶다. 국민이 감격과 함께 한가지로 공감하는 바가 바로 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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