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박정희 4
 닉네임 : 박정희  2022-03-16 15:31:19   조회: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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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 ]





<김前대통령서거> 되돌아본 전직 대통령 장례


노무현·최규하 국민장, 박정희 국장, 윤보선·이승만 가족장



연합 | 2009-08-18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國葬)이나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될 수 있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윤보선·이승만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5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7일만인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주요 인사, 권양숙 여사를 포함한 유족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특히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어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유족과 추도객들의 애도 속에 화장식이 치러진 뒤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로 안치됐고, 49재를 마친 뒤 봉화산 사자바위 아래에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전국 102곳의 정부 분향소에는 약 100만명이 조문하고, 서거 이후 안장식까지 봉하마을 분향소와 묘역에는 160만명 가량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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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국민장은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과 1983년 미얀마 랑군 국립묘지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순직한 당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장례식을 포함해 총 13회 엄수됐다.




반면 국장은 1979년 10월26일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가 유일하다.


박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9일간의 장의 기간을 거쳐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엄수됐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박 전 대통령의 장의기간 전국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중앙청 광장뿐 아니라 일선 읍ㆍ면ㆍ동사무소와 재외공관까지 분향소가 설치됐으며, 국장 당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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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도 1965년 7월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연합






* 2009 서울시 인구 1046만.








[ .... 노무현...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 김 前대통령...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 박정희 ...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 ]





故 노무현·김대중 前대통령 조문객수 큰 차이, 왜?



충격적인 자살과 고령에 병환··· 서거 원인 큰 영향

전두환· 노태우 前대통령, 국장 또는 국민장 힘들어





장기영 학생기자 | etwannabe@nate.com


2009.08.26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지난 29일 영면(永眠)한 김대중 前대통령이 서거 두 달여 전인 5월 29일 작성한 일기에는 노무현 前대통령을 떠나 보내는 슬픔과 함께 그 규모에 대한 감탄이 묻어난다.




노 前대통령 국민장(國民葬)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노 前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만 약 100여 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러나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18일 서거한 김 前대통령의 국장(國葬)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국민장 보다 한 단계 높은 국장의 신세가 초라하다. 지난 1979년 박정희 前대통령 국장 당시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조문객 동원 논란 등으로 부푼 거품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노·김 前대통령 추모객 7배 이상 차이···서거 원인 주 배경




이처럼 두 前대통령의 장례기간 조문객 수에 큰 차이가 나는 데에는 서거 원인, 서거 당시의 국내 정서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 前대통령의 경우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 충격을 안겼다. 또한 노 前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 관련 수사로 現정부의 정치보복, 검찰의 강압수사 등 크고 작은 논란을 증폭돼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서거해 파장이 컸다.



반면 김 前대통령은 서거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던 데다 폐렴 등 건강악화로 인한 입원소식이 수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돼 국민들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 속에 그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에 대한 논란도 거국적 추모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된다. 특히 당시 ‘국민의 정부’가 주도했던 대북화해정책은 찬반논란을 낳으며 여론분열 양상을 띠었다.


전북 C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Y씨는 “경직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햇볕정책’을 김 前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실제 김 前대통령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고,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불리는 햇볕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상당수 햇볕정책 비판론자들은 이른바 ‘퍼 주기’식 대북정책이 북한의 ‘간’을 키웠다는데 동의한다. 핵 문제를 배제한 채 진행된 각종 논의와 원조가 굶주린 북한의 배를 채웠고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등 대남, 대미 도발의 도화선이 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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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 박근혜가 가는 곳은 어디나 군중이 들끓었다. 아저씨고 아줌마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그를 보러 몰려 들었다. ....... ]



[ ...... TV찬조연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이틀 뒤 이례적으로 재방송 ......


..... 박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생각이 난다」 「주부들이 모여서 TV를 보다가 감격해 울었다」 ....... ]




[ ...... 주민들이 도시락과 음료수를 싸들고 지구당사를 찾아들었다. ......

..... 후보들은 『박근혜만 왔다 가면 이긴다』며 구원의 손길을 ....... ]




[박윤석 기자의 인물탐험]

한나라당 초선 박근혜의원

“아버지 같은분이 정치했으면 크게 달랐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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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 절기는 가을인데 실제 날씨는 가을이 아닌 이상 열기가 전국을 뒤덮은 날이었다. 점차 가을다운 기운이 더해진다는 백로(白露)의 이름을 무색케 한 이날 서울의 기온은 30도를 넘어섰다. 폭염과 습기는 계속돼 이틀 뒤 서울은 올해 최고기온이자 9월 기온으로는 건국 50년 사상 최고치에 이르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가을 없이 곧 겨울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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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의사당에서 잠시 빠져나온 박의원은 오늘따라 유독 답답해보이는 의원회관 5층 복도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격앙된 분위기의 한나라당 의원총회장에서 잠시 양해를 구하고 빠져나온 길이다. 비서실과 통하는 사잇문을 열어두고 그 자리에 선풍기를 하나 틀어 놓은 그의 방은 서쪽으로 기운 햇살에 후끈 달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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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원의 방은 여느 의원들의 방에 비해 유독 단출한 인상을 준다. 아무 장식물이 없다. 전임자가 쓰던 집기를 그대로 받아 쓰는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책꽂이는 텅 비어 있고 벽에는 그 흔한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다. 비서진은 입주하면서 출입문 위에 그의 초상화 하나를 붙인 적이 있으나 그의 지시에 따라 철거했다. 전북 익산에 사는 30대 화가가 그려준 유화였다. 4월 보궐선거 때 대구의 선거 캠프를 찾아와 자원봉사를 하는 바람에 알게 된 이 화가는 전북 번호가 선명한 자신의 승용차로 선거운동기간 내내 수송을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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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입 대상 1호」



12월10일 박근혜는 이회창(李會昌) 후보 지지를 공개선언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선대위 고문에 임명된 그는 바로 청주 유세에 나섰다. 세 후보가 경쟁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업적을 이어받겠다고 외치는 상황에 오랜 세월 줄곧 「박정희의 적자(嫡子)」로 자처해온 국민회의·자민련 연합의 대주주 김종필과 박태준(朴泰俊)은 『근혜가 대체 왜 저러나』 장탄식을 했다.


각 진영에서 「영입대상 1호」로 꼽힌 박근혜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14일 첫 방영된 그의 TV찬조연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이틀 뒤 이례적으로 재방송됐다. 「나라가 어려울 때 근혜씨를 보니 박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생각이 난다」 「주부들이 모여서 TV를 보다가 감격해 울었다」 「TV연설만 하지 말고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직접 우리 지역을 방문해 달라」는 전화를 전국에서 받은 한나라당은 횡재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15일 울산에서 열린 한나라당 정당연설회에서 그는 『아버지가 경제개발을 위해 나선 30년 전에도 지금처럼 외환고가 바닥난 파탄지경이었다』고 찬조연설을 했다. 청중들은 열광했고 여성들은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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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는 유세」



16대 국회 입성을 생각했던 그와 당의 예상보다 기회는 빨리 와 4월의 재보선이 다가왔다. 당초 문경·예천에 나서기로 했던 그는 당지도부의 권유로 2월 말 대구 달성에 공천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화려한 팡파르를 울린 직후였다. 3월12일 대구달성 지구당 개편대회장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대형 초상화가 내걸리고 「새마을노래」가 울려퍼졌다. 「박정희냐 김대중이냐」 라는 현수막도 걸렸다. 동면에 들어갔던 이회창 명예총재는 대구 달성을 비롯한 재보선 지역구의 선거운동 참여를 계기로 자연스레 정치 전면에 재등장했다.


조직과 자금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와 3.6% 차이의 접전을 예상한 여론조사를 무색하게 만들며 박근혜는 24.4% 차로 싱겁게 압승했다. 상대 후보 엄삼탁(嚴三鐸) 국민회의 부총재는 박근혜가 여고생이던 시절 청와대를 수호하는 30경비단의 중대장이었다. 피하고 피하다 엄후보 지원에 나선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5·16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비서실장이었다.



선거전은 초장에 결판났다. 엄후보의 오랜 지역 조직관리와 여권의 전략지구에 대한 자금지원을 고려하면 박근혜 아니고는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에서 지역구를 교체한 당지도부는 특별배려로 지원금을 내려보내긴 했으나 그 모양새는 상대진영과 비교해 「거지 선거」라는 것이 당내의 자평이었다. 신승(辛勝)이면 다행이라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시작된 선거캠페인은 막상 뚜껑을 열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로 끝났다.


굳이 연설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박근혜가 가는 곳은 어디나 군중이 들끓었다. 아저씨고 아줌마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그를 보러 몰려 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는 둘째 문제였다. 군중을 휘어잡는 연설 실력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는 그가 특유의 나직한 음성을 또박또박 들려줄 때마다 군중은 열광했다. 주민들이 도시락과 음료수를 싸들고 지구당사를 찾아들었다. 전국에서 지구당사 위치를 물어오는 전화가 쇄도했다. 초특급 결전장으로 특별 관리체제에 돌입했던 상대진영은 상상 외의 폭발력에 아연해하면서 초반부터 동요했다. 더 놀란 것은 한나라당 진영이었다. 말이 필요없는 유세. 홍보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찾아드는 청중. 한나라당이 탄생하고 처음 보는 광경이었음은 물론,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도 언제 이런 선거운동을 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그는 그렇게 국회의원이 됐다. 하루 평균 30회가 넘는 거리유세를 벌이는 강행군 끝에 당선이 확정됐을 때 지구당으로 그의 여동생이 찾아와 축하했다. 운동원들은 자매를 둘러싸고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 4월8일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그는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감회어린 표정으로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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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왔다 가면 이긴다』



이어진 6월의 지자체선거와 7월의 재보선에서, 이제 국회의원이 된 박근혜는 더욱 인기 있고 무게 있는 찬조 연사가 됐다. 대구 경북 외에 부산 경남, 충청 및 서울과 수도권 전역에서 후보들은 앞다퉈 그를 초빙했다. 모든 광역·기초장 후보들은 『박근혜만 왔다 가면 이긴다』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다. 실제로 그가 참석한 유세장에는 많게는 1만명에 육박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혼전 기류를 보이는 시장 선거를 지원하러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한나라당 구청장 후보들의 읍소에 못 이겨 시간을 지체하다 부산시장 정당연설회에 지각을 했다. 깜깜한 밤중에 역광장을 메우고 기다리는 시민들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울산에는 밤 10시가 넘어 도착했는데 수천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항에서는 박태준 총재가 자존심을 걸고 표밭을 누빈 선거가 비오는 날 열린 박근혜의 연설 한번에 날아갔다. 한 번만 더 지원해 달라는 경기지사 후보의 요청에는 시간부족으로 응하지 못했다.


원고를 줄줄 읽어나가는 단조로운 그의 연설이 끝나면 청중들이 우르르 단상으로 몰려들고 그의 모습만 보고도 눈물을 흘리는, 이 종교집회를 방불케 하는 신드롬의 정체는 단순히 박정희 향수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실감이 창궐하는 마당에 2, 3명만 보여도 달려가 두손을 꼭 잡는 그의 꾸밈없어 보이는 모습에서 사람들이 묘한 성실감을 보았는지도 모른다는 평가도 있었다. 국회 사무실을 채 정돈할 틈도 없이 어느새 한나라당을 대표하는 거리의 스타의원이 돼버린 그는 7월의 재보선 7개 지역 모두에서 찬조연설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선거직에 나선 사람으로서 돈으로 표를 사니 어쩌니 하는 것은 유권자에 대한 모독이지요. 거기서부터 정치가 흐려지는거구요. 제가 정치에 나온 건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자는 게 하니라 무언가 바른 정치가 되는 데 기여하자는 뜻이었기 때문이지 혼탁한 데 같이 어울리려 했다면 나올 이유가 없는 거지요. 어디까지나 깨끗하고 바른 선거를 하자, 그리고 유권자에게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자, 그래서 산골까지 안 간데 없이 열심히 뛰었죠. 자금도 조직도 거의 없었어요. 다 저쪽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시작하느라 여러 가지로 어려웠죠』



겨울부터 여름까지 증폭된 박근혜 열풍, 그리고 그 위에 드리우고 있는 박정희의 그늘은 여당과 야당, 그리고 여기에 유무형의 끈을 잇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 중 하나는 한나라당 대구시지부장 강재섭(姜在涉) 의원이었다.


당초 문경 예천 쪽으로 내정된 박근혜를 대구 달성으로 출마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그는 박근혜의 동의를 얻는 자리에서 선거대책본부장 자격으로 선거전략과 관련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자금은 얼마나 있습니까』

당에서 최소한의 지원은 하지만 후보 스스로가 동원하는 기본적인 자금력이 선거운동에 주요 기반이 되고 있는 현실 여건에서 당연한 물음이었다.

『없습니다』

강본부장은 적잖이 당황했다. 상대 후보는 안기부 재직 때부터 이 지역에 탄탄한 조직을 구축해둔 바 있고 새 정부하의 집권 여당으로부터 막강한 자금력과 인적자원을 공수받고 있는 처지.


『아니, 그래도 최소한의 비용은 있어야 운동원들 밥이라도 먹일 것 아닙니까』


대체 자비를 얼마나 염출할 수 있겠느냐는 재차 질문에 박근혜는 자신의 재산이래야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몇천만원 정도이고 현금을 동원하라면 법정 한도액 만큼은 모아보겠노라고 대답했다.


선거캠프는 출범 초기 또 한차례 박근혜 후보에게 놀란 적이 있다. 도무지 출마자 자신의 숙소와 연락처를 지구당에 알려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러느냐. 선거운동을 하느라면 부득이 심야에도 긴급히 연락해야 할 일이 생기는데, 선거를 어떻게 치르려고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느냐』고 설득해봤으나 별무소용. 지구당 사무국장에게조차 소재를 알려주지 않아 주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선거를 기획하고 움직이는 당의 요원들은 결국 그들이 봉사하는 후보의 집주소나 전화번호도 모르는 채 선거를 치를 판이었다.


초조해진 강재섭 본부장이 『이러는 게 아니다』며 간청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선거운동은 열심히 하겠다. 그러나 사생활은 침해받고 싶지 않다』였다. 쉽지 않을 대사를 앞두고 처음부터 이상한 암초에 부닥치고 있다고 생각한 강본부장은 거듭 애원하다시피 했다. 박근혜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지못한 듯 메모 한 장을 써주었다. 『그럼 본부장님만 알고 계세요』라는 다짐과 함께.


강본부장이 그 메모를 활용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이후 긴급히 전화연락하는 데 한번 이용했고 한번은 선거전략 숙의차 동료 한 사람을 대동하고 그의 숙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밤 늦은 시간이었다. 미리 전화를 하고 한 시간 뒤에 찾아간 숙소에 그는 혼자였다. 직접 차를 끓여 내온 그는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가다듬은 머리와 얼굴, 외출 때와 마찬가지로 갖춰입은 복장으로 그는 손님을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림자



『10대 소녀 때 목숨 걸고 혁명을 일으킨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가에서 성장했고 20대에는 비명에 간 슬픈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의 훈련을 받았으며 암살당한 아버지의 주검을 장사지내야 했던 그 비범한 경험의 수련은 그를 바늘 한뼘도 허락지 않는 단단함으로 탁마시켰을 것이다. 남동생처럼 마약의 힘까지 빌릴 만큼 방황하거나 여동생처럼 불행한 결혼의 늪에 빠져 헤매지 않으면서 견뎌오게 한 어떤 집념이 그에게서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돼버렸을지도 모른다』


9년 전 송정숙 서울신문 논설위원은 박근혜 내면세계의 한 실마리를 이렇게 해석하면서 「밀랍인형처럼 침착한 독신여성」으로 묘사한 바 있다.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부모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다』라고 말해 오며 「그 시대의 꿈」을 지키기 위해 전신을 곧추세우고 긴장을 풀지않는 생활을 그는 지금까지 20년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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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10/nd98100190.html







2002 조윤선



[ ...... 박 후보의 대중적 인기가 대선 후보(이회창)보다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애국심이 몸에 배었다는 걸 느꼈다. ....... ]



[ ...... 자신이 한 일을 과장하지 않고 인기에 영합하지도 않는다. ........ ]



[인터뷰] “순수 열정 ‘인간 박근혜’ 사람들은 너무 모른다”


2012.09.24.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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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46) 새누리당 대변인 얘기다. 그는 7월 박근혜 의원의 대통령선거(이하 대선) 경선캠프 공동대변인을 맡았다. 박 의원이 대선 후보로 선출된 후에는 당 대변인에 임명됐다. 요즘 그는 박 후보의 속마음을 아는 측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박 후보의 주요 동선엔 늘 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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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후보와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였던 조 대변인은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대변인을 맡았다. 두 달 뒤 한국미래연합 대표이던 박 후보가 한나라당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2월 탈당한 지 9개월 만이었다. 합당 형식으로 ‘친정’에 돌아온 박 후보는 전국으로 지원유세를 다녔다.


“한 달간 같이 돌아다녔는데, 박 후보의 대중적 인기가 대선 후보(이회창)보다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애국심이 몸에 배었다는 걸 느꼈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당 관계자가 한라봉을 하나씩 나눠줬다. 박 후보는 ‘누가 이렇게 귀한 걸 보내주셨느냐’며 고마워했다. 그 진심 어린 표정과 말투가 지금도 생생하다.”


조 대변인은 2009년 8월 호주를 한 달간 방문했다. 호주 정부의 스페셜 게스트 프로그램으로, 방문자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날 수 있게 주선하는 특별 초청이었다.


“박 후보도 몇 해 전 같은 프로그램으로 호주를 방문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당신은 우방을 방문하면 꼭 6·25 참전용사를 만나 함께 식사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도 호주에 가서 참전용사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하고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한 분이 차가 없어 집에까지 모셔다드렸는데, 생활이 곤궁한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한 달간 유세하며 진심 확인



조 대변인은 2010년 2월 터키 방문 때도 6·25 참전용사를 만났고, 이를 계기로 ‘해외 6·25 참전용사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초대 이사장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맡았다. 올해까지 모금한 장학금은 약 20억 원. 국내 대학들의 협조를 얻어 해외 참전자 자녀 100여 명에게 생활비와 대학등록금, 기숙사비를 대고 있다. 장학금을 기부한 기업은 그들에게 인턴십도 제공한다.


박 후보에 대한 주요 비판 가운데 하나는 소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 대변인은 “남성 중심의 소통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의 억지”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일하는 여자 후배들에게 ‘가장 먼저 그 조직의 소통방식을 파악하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런 걸 모른다. 왜 여자들이 ‘남자들이 모여서 담배 피우고 술 먹으며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싶다’고까지 말하는지. 남성 정치인이 박 후보의 소통을 문제 삼는 건 여성의 소통방식, 여성과의 소통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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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변인은 박 후보가 대통령이 돼야 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 성실함이다.


“정치권에 들어와 보니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언론을 이용해 자신을 선전하는 사람이 많더라. 일 생기면 특위 만들어 회의하고, 언론에 알리고, 그러고는 더 일 안 한다. 일하는 척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 후보는 달랐다. 100을 인정받으려고 100, 200을 위해 일한다. 자신이 한 일을 과장하지 않고 인기에 영합하지도 않는다. 충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좋은 평가도 받고 훌륭한 리더십도 갖춘다는 걸 잘 보여준다.”


둘째는 여성 문제.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당장 여성 정책이 바뀔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건 너무 힘들다. 다행히 나는 부모 도움으로 그럭저럭 해왔지만, 아이 키우는 문제로 일을 그만둬야 하는 능력 있는 여성이 무척 많다. 여성 대통령이 나오면 사회 곳곳에서 급격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여성이 일하는 환경과 남성과의 소통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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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변인은 박 후보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조 대변인이 박 후보에게 “20, 30대와 교감하려면 영화도 보고 콘서트도 가고 연극도 봐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박 후보는 “전국을 돌면서 어려운 사람들한테 ‘잘살게 해달라’는 읍소를 들었는데 그런 데를 어떻게 가겠느냐”고 머뭇거렸다. 말하자면 어려운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다는 얘기였다.


문화정책에 깊은 애정



그러나 “그런 걸 하는 사람들의 열정이야말로 바로 박 후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잠재력이자 폭발적 창의성의 원동력”이라는 조 대변인의 설득에 마지못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 대변인에 따르면, 박 후보는 문화적 소양도 깊고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도 크다고 한다.


“여고 다닐 때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어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피아노와 기타를 잘 친다. 지인의 결혼식에서 연주를 했을 정도다. 몇 년간 애써서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해 문화재보호기금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박 후보가 ‘권위적이고 차갑다’는 평에 대해선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남성 정치인을 보면 보좌진에게 함부로 반말하고 이것저것 시킨다. 하지만 박 후보는 그렇지 않다. 불교 행사에서 외투를 벗고 축사를 했는데 끝나고 나서도 외투를 보좌진에게 맡기지 않았다. 한 번은 시장 상인이 까만색 비닐봉지에 뭘 싸줬다. 내가 대신 들겠다고 하자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안 건네는 것이었다. ‘수행비서에게 들게 하겠다’고 하니 그제야 넘겼다. 한 번은 후보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는데 손수건이 없었다. 내 손수건을 건네자 극구 사양했다.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면을 사람들이 정말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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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2004.2.


[ ...... 이회창-노무현 후보가 참석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단연 박 의원에게 쏠렸다. ....... ]



[ ...... 시장에 가면 상인들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박 의원에게 건네 ....... ]



박근혜밖에 없다 ?


뉴스메이커 2004-03-05




[커버스토리] 차세대 리더로서의 경쟁력을 겸비한'구원투수'로...


소장파가 요구하는 요건을 충족시키는 '대안'으로...

그녀는 수렁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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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지지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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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혼란한 상황에서도 박근혜 의원은 가장 의욕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언론 접촉을 자제해왔던 그는 지난 2월 24일 기자들과 만나 '새출발론'을 폈다. 그는 이날 "한나라당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서 "국민에게 우리가 개혁 비전을 보여주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직 최종결심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당에 책임있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대표 출마도 시사했다.


국회 회기 중인 2월 27일에는 지역구에 내려갔다. 지구당 총선 자원봉사단 발대식에 참석, 검찰의 입당 대가 수수설에 대해 "입당 대가로 한 푼도 받지 않았다"면서 "나를 믿어달라"고 결백을 호소했다.


한나라당 내부에선 박 의원의 이런 결단에 탄성과 탄식이 이어졌다. 이병석 의원은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라면서 "경선과 총선을 통해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의원의 결단으로 그를 중심에 둔 한나라당 재편론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멸되고 다시 출현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강재섭-강창희-전용학 의원 등은 "전국적 지명도가 중요하다"며 그를 지지하고 있다.


〈한국일보〉가 지난 2월 24일 차기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 조사한 결과, 박근혜 의원이 21.6%, 이명박 서울시장이 10.6%, 오세훈 의원이 8%,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6%, 홍사덕 원내총무가 5.6%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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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대가 수수 의혹' 큰 문제 없는 것으로


2월 25일 검찰에서 박 의원의 '합당 대가 수수 의혹'이 제기돼 한때 당권가도에 적잖은 타격이 우려되기도 했지만 하루 만에 큰 문제가 없는 쪽으로 종결되면서 박 의원의 독주는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박근혜 흠집내기가 아니냐는 검찰의 '불순한 의도'에 대한 의혹이 커지면서 '박근혜 대세론'에 탄력이 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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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둔 2002년 봄 서울 조계사 법회에서는 당시 미래연합 대표였던 박 의원의 손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물결로 한바탕 야단법석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회창-노무현 후보가 참석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단연 박 의원에게 쏠렸다.


지역구인 대구 달성의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2000년 총선에서도 박 의원을 돕기 위한 자발적 지원자들이 줄을 이었다. 시장에 가면 상인들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박 의원에게 건네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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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가 외치노라 !!!





10월4일, 난 서울시청 광장에서 외칠것이다.


지금 정권의 대다수들이 과거에 고생? 할 때.

난 수출현장의 최일선인 전자회사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명 공돌이였다.


74년도에 부평공단에 위치한 D전자에 입사하여 하루일당 400원에 첫월급 12000원에 잔업수당,특근수당 플러스 알파를 받았다.
한달에 2번쉬는 일요일도 전날 토요일 저녁은 철야근무를 하였으니 제대로 쉬는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거의 매주 콘테이너로 전자제품을 수출하면서 뿌듯한 마음에 힘든것도 즐겁게 승화시키며 보람있었다.
다들 어려웠던 시기에 박봉 이나마 곗돈도 붓고 적금도 붓고 하면서 내 부모 형제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군생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전자회사 공돌이 신세가
결국엔 94년도에 해외공장 생산관리 과장을 끝으로 거의 20여년 만에 끝났다.



우리 선배들이 목숨바쳐 피로 지킨 나라를,
우리같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고 땀흘려서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이룩했는데.
지금 정권잡고 이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저 사람들 그때 당시 이나라가 어려울때 무엇하던 사람들인가.
맨날 반정부 데모하고,나라 어지럽히고,선동하던 사람들 아닌가.



나는 100번을 양보해도 저 사람들에게 이나라의 운명을 맡길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큰소리로 대한민국을 소리높여 외칠 것이다.



영광스런 대한민국, 자랑스런 대한민국,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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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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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당시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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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4&nNewsNumb=20161121989

[자료]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왜 지금 다시 박정희 인가?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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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립을 위해 사치를 배격해야 한다는 신생활 운동을 펼친 학생들은 "커피 한 잔에 피 한 잔", "오늘의 커피는 내일의 독배"라며 커피 과소비가 문제라는 주장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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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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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유지공업체를 인수해 삼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무렵 남대문 시장에서 ‘삼양라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시장 바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떠올린 전중윤은 ‘새로운 식품개발’이라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쿠데타정권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JP(김종필)를 통해 박정희에게 라면 샘플을 전달하고 라면 제조기 1대를 구입할 돈 5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외화는 총 16만 달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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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西獨(서독) 광부




[.... 대학 졸업자...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 90 대 1의 경쟁률을 ........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905100062



[그 시절 우리는] 지하 1000m 막장에서 희망을 캔 派獨 광부 이야기

석탄가루로 뒤범벅된 빵 씹으며 하루 종일 노동




⊙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

⊙ 새벽 4시 기상, 탄 가루 마시며 고된 노동

⊙ 코담배로 석탄가루 빼내기도

⊙ 1963년부터 1977년까지 派獨된 한국 광부는 총 7936명, 그 중 65명 사망



權彛種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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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은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1950년대 미국 원조가 끝난 데다 가뭄과 흉년이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초근목피를 끼니로 연명해야 했다.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줄줄이 西獨(서독) 광부와 간호사로 떠났다. 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처럼 어학연수나 유학이 아닌, 달러를 벌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북 장수의 두메산골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苦學(고학)으로 마친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派獨(파독) 광부의 길을 택한 것은, 첫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 온 교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 무렵 나는 군에서 제대해 서울의 여러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 일을 같이 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난데없이 이런 제안을 했다.

“권형, 나하고 독일 광부로 갈 생각 없소?”

“난 대학도 안 나오고 광부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소. 그리고 광산 근무 경력서가 있어야 한다던데….”



한국 정부는 1963년 12월부터 1진, 2진, 3진으로 나누어 派獨(파독) 광부를 모집했다. 자격 조건은 ‘35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병역을 필한 광부 경력자’였다. 나 같은 경우 광부 경력이 全無(전무)했지만 한양대생의 도움으로 서독 광부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당시 지원자들의 직업과 연령은 다양했다. 순수 광부 출신부터 주먹깨나 쓰던 건달, 대학 졸업자(나와 같은 진에도 서울대를 포함한 명문대 출신들이 많았다), 학교 교사,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 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지원자들의 경쟁률도 대학입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내가 지원한 2진의 경우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이 치열한 만큼 선발과정도 까다로웠다. 우선 신체검사와 더불어 달리기, 역도, 철봉 턱걸이, 모래주머니 나르기 등의 체력검사를 받았다. 지원자들 중에는 커트라인 체중인 60kg에 맞추기 위해 내의 속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는 일이 있었고, 자장면이나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일도 있었다. 체력 테스트 다음으로 적성검사, 상식시험, 간단한 영어 테스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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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탄광에 근무하는 한편 기술 훈련을 받는다. 월급은 162달러 50센트(650 마르크), 중학 졸업 이상의 학력소지자로서 20세 이상 30세 미만〉



지원자 수는 2800명이었는데 1600명이 신체 조건으로 실격했고 나머지 1200명 가운데 약 500명은 광산에 근무성적이 없으면서 허위 경력 증명서를 붙였다 들통이 났다. 대졸 및 고졸 학력자가 태반이었다. 1차 시험을 거쳐 11월 28일에 최종 합격자 367명의 이름이 발표됐다. 신문들은 사법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듯이 사회면에 합격자 이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기양 기자를 선발 두이스부르그에 특파하여 '한국 광부들을 기다리는 서독 광산촌'을 소개했다. 기사 제목들은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의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호텔 부럽지 않는 숙소/ 방마다 독서 장에 오락 시설까지 갖추어/ 돈과 맥주와 아가씨와/ 2주 휴가땐 파리에서 데이트도/ 지하 800m에서 콜라가 수도처럼/ 라인 강변 처녀, 동양 총각 좋아해 /민간 외교 역할, 코리아 자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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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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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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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년 방직공장 여공 평균월급 3천4백40원

1970 한달 급료 1만3백25원, 쌀 3백ℓ




[.... (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쌀 20ℓ 6백37원).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

.... 1970년이 되면서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 쌀 3백ℓ에 ....... ]




[ ....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 ]






수출 전략의 입안자가 쓴 20世紀 한국의 위대한 世代-女工 찬가

『女工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吳源哲




보릿고개


우리나라에는 古來(고래)로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말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릿고개」는 農土(농토)가 적어서 자기 가족이 먹을 양식도 생산하지 못하는 農家(농가)에서 일어난다. 따로 소득도 없다. 그러니 「보릿고개」의 절박함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가난한 農家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당장 저녁거리가 없다. 어린 자식들은 밥 달라고 보채고, 産母(산모)는 젖이 안 나와 젖먹이는 울부짖는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올 데도, 꾸어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서 가루로 만든 다음 草根木皮(초근목피)를 넣고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리추수 때라야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데, 그때까지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보리추수가 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된다. 「보릿고개」의 심각성은 가족 전체의 문제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과 영구히 해결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릿고개」를 당하는 농가는 食口(식구) 중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열 살도 못 된 어린 자식을 양자로 보낸다. 이들은 주로 딸들인데, 말이 양자이지 대개 식모살이를 했다.


「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이 「보릿고개」였다. 이런 「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農家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딸이었다. 그 당시 어느 농촌 소녀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소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家事(가사)를 돕다가 15세가 됐다. 동생들은 늘어나고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마침내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양식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또래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니 달리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바늘이 손가락에 박힌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당시는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요, 점심 저녁을 회사給食(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필자 注그 당시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 6백g이 1백29원, 연탄 10장 76원, 쌀 20ℓ 6백37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해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19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日給(일급) 4백13원이 됐다.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당시 쌀값이 20ℓ에 6백92원이었으니 쌀 3백ℓ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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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199912100033

199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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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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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25132&C_CC=BB


이런 교과서로 공부하면 조국을 미워하게 된다
고교 國史 교과서의「대한민국 때리고 金日成 父子 감싸기」

裵振榮(월간조선)
*月刊朝鮮 200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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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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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가면 돈도벌고 야간학교도 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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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 ....... ]




Home > 자료실 > 온라인기념관 : II . 한국의 좌표



33) 1960년대의 여인상(女人像)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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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공의 예를 들어, 1960년대의 여인상을 이야기 형태로 구성해 본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여아였다. 식구가 많으니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보릿고개」 때가 되면 나물을 캐다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이 아가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사를 돕다가 만 15세가 됐다. 동생들의 수가 늘고 성장해 감에 따라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장녀인 이 소녀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을 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식량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아가씨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공동으로 자취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뿐이니 기술이 있을 리 없었고, 더욱이 시골 농촌에서 자랐으니 모두가 낯설고 두려울 뿐이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상하로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잘못해서 바늘이 손가락에 박히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손재주도 좋았으며, 일도 열심히 했다. 당시는 토요일도 반나절만 일할 때가 아니다.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고, 점심시간 뿐 아니라 저녁식사까지도 회사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440원이다(註: 1964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600g) 129원, 연탄(10개) 76원, 비누(375g)가 38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 액수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을 했다가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모두가 긴요한 물건이었으나 특히「라디오」선물이 한때 대유행을 했다(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이 아가씨는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일급 413원이 됐다. 그래서 한 달에 받는 급료가 10,325원(413원×25일), 당시 쌀값은 20 리터에 692원이었으니, 한 달 급료는 쌀 300 리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만한 급료를 받는다는 것은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이제 소녀의 나이 21세,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도회지 생활을 하다 보니 옷맵시도 좋아졌고 머리 모양이나 화장도 세련되어,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그래서 막내 여동생도 중학교를 나오자마자 만 15세 때, 동네의 다른 소녀들과 함께 언니 따라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일자리는 곧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쯤에는 여성 근로자의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은 언니가 보태준 학비로 중학교까지 졸업했는데도 기술은 없었다. 그래서 급료는 최하급인 일급 245원을 받았다. 월급으로 쳐서 6,125원이었다. 언니의 월급은 10,325원이니 언니가 약 69% 더 많은 급료를 받는 셈이다(註: 70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쌀(20리터)이 692원, 밀가루(22kg 한 포대)가 773원, 쇠고기(600g) 500원, 무(한 관)가 160원, 배추(한 관)가 222원, 마늘(100개)이 720원, 세탁비누(450g)가 4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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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eoi.org/resource/online_view.php





* 여공이 부러움 찬양의 대상이었음은 당시 농촌에 산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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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에 공장이 꽉 들어차 있던 ‘구로공단’에 자주 강연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골서 올라온 여공들이 합숙을 하면서 한 달에 노임을 6만원을 받는데 자기의 숙식비 등을 지불하며 최저 생활을 하면서 매달 3만원을 시골집에 보내서 남동생이 학비로 쓰게 한다는 근로회관 관장의 말을 듣고 감동을 금치 못했던 옛일이 생각납니다.



그 누나들이, 매우 검소한 나날, 고된 하루를 살면서, 벌어서 보내준 학비로 시골서 동생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더러는 대학을 나오고 70년대의 ‘조국 근대화’, ‘한강변의 기적’을 일구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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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nas.net/article/article.asp?idx=48087

대한민국을 버티는 사람들
Written by. 김동길 입력 : 201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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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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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 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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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 가면 돈도 벌고 야간학교도 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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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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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5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

초등학교 5학년 때 탄광 지대로 전학을 갔는데 막장 광부들의 당시 월급이 10만 원이었다. 도시 화이트 칼라 월급의 두 배 정도 되는 거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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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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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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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



朴大統領(박대통령)의 経済学(경제학)


1967.06.28 경향신문 4면


..... 「테이크·오프」(跳躍(도약))의 달성은 61년부터 66년까지 1차 5개년 계획기간중의 GNP(국민총생산)의 年平均成長率(연평균성장률)이 8.5%였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유엔統計(통계)는 우리나라의 工業成長率 ......






1967


[ ......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참상은 이제 없어졌다 ....... ]


全國實態 (전국실태)


1967.03.09 동아일보 3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참상은 이제 없어졌다고 낙관하고 있다. 과거 日帝下(일제하)에서 우리農村(농촌)의 실정이 비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土地(토지)의 大地主集中化(대지주집중화)...






1967.4.6 경향신문 5면



슬픈 遺産 『보리고개』여 안녕

그 실정



보리고개 없는 마을


해마다 봄이 오면 밀어 닥쳤던 춘궁기 - .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져리게 고달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리고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아무리 높은 보리고개라 하더라도 눈한번 깜박하지 않는 마을들이 있다.


충남 대덕군 유성면 갑동리 2구와 전북 완주군 후동면 구만리 농민들은 보리고개의 괴로움을 모르며 4월의 땅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버림 받았던 자갈밭을 양계부락으로 이룩했고 영농의 근대화로 수익증대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 대덕 완주 = 방길영 이영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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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7040600329204001







1967.12. 엥겔계수 41.5 %


[ .....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 ]


前期比(전기비) 4.3% 增加(증가)

3/4分期家計動向(분기가계동향)



1967.12.14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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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支出内容(지출내용)을 보면 食料品(식료품)비에 지출하는 비율(엥겔係数(계수))이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반면 文化費目(문화비목)인 雜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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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1968.02.16 경향신문 3면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철도청의 일류기술자들을 상대로 각건설회사가 스카웃전을 벌이고 있다. 15일 철도청에 의하면 京釜(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은 각건설회사...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1968.01.24 경향신문 6면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工(공) 專女商(전여상) 등 거의 百(백)%나

業體(업체)수요 늘어 卒業前(졸업전) 스카웃戰(전)도



「낙타와 바늘구멍」으로 비유됐던 취직의 좁은문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공업입국정책에 따른 산업구조의 확대로 실업계고등학교 졸업자와 이공계 및 경상계의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이 작년에 이어 현저히 높아져 가고 있다.교문을 나서는 이들의 취업실태를 살펴본다.


취직난 진학난은 졸업기마다 듣는 우울한 이야기. 그러나 취직걱정 따위는 안해도 좋은 우울하지 않은 곳이 있다. 실업고교졸업생들이 바로 그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부분의 실업고교 졸업예정자들은 취업률이 거의 백%에 육박 , 취직당사자들이 직장을 고르고 있는 형편이며 업체나 공장은 오히려 우수한 졸업생을 찾아 학교측에 겸손하게 손을 내밀고 있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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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업체들이 이들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그후 줄곧 의뢰에 응하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 실업고교장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사람이 없어서 못가는 취직난의 이방지대가 분명하다.


상업고교의 경우도 비슷하며 실업계 여자고교의 경우도 취직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무난하다. 서울여상은 진학자와 가정에 들어 가려는 학생을 학교측이 설득해 직장으로 권유할 정도로 사람이 모자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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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 6면


○┉실업고교졸업생에게는 이제 취직난이란 어휘가 실감이 나기 않게 됐다. 작년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취직의 문은 금년에도 계속 넓어져 졸업생의 수가 수요에 따르지 못할지경이라고 각고교의 취직담당 교사들...






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6면


한달 앞당겨마감된 취직戰線(전선)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여자實業校(실업교)등 스카웃손길 치열 되려 求人難(구인난) 빚어내... 각업체의 스카웃전 때문에 11월까지는 4백23명의 취직희망자가 모두 직장을 갖...






激動(격동)하는 韓國財閥(한국재벌) (1) 프롤로그

1968.07.03 경향신문 2면


一流大學(일류대학)에 대한 立稻先賣式 人材(입도선매식인재) 스카웃戰(전)은 이제 海外留學生(해외유학생)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부분의 企業主(기업주)들은 새로운 經營(경영)모토와 상징을 내...





돈 (85)

1968.08.22 매일경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째 판금공으로 일하는 李(이)씨(27세)는 T興業(흥업)에 「스카웃」당하여 월 2만3~4천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숙련공이 되면 대개 이정도의 수입은 올린다고 한다. 최고로 많이 받는 사람은...





公務員退職(공무원퇴직) 激增(격증)문제

1968.07.10 경향신문 2면


.... 그중에서도 教育公務員(교육공무원)을 主(주)로하는 文教部(문교부)의 離職者數(이직자수)가 首位(수위)이고 다음은 警察官(경찰관)을 主... 그들의離職(이직)을 막을 道理(도리)가 없겠다는 것을 새삼 느끼 .....






[ ..... 우리도 하면된다. .... 그런 자신감을 얻은 해가, 기점이 68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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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60년대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후진국이 1차 5개년 계획을 실천에 옮겨서 뭔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처음으로 봤던 시기가 아녜요?

또,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60년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사람이 자신감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해요? 흔히 요즘 경제는 발전 시켰는데 정신은 발전이 안됐다, 정신의 개혁과 발전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전? 저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68년도라는 해는 아버지로선 잊을 수 없는 해라고 그러셨어요.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아버지를 비롯해서 처음으로 우리도 하면된다. 우리도 이 가난을 몰아내고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얻은 해가, 기점이 68년도라고 보신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자신을 얻은걸 바탕으로 해서 70년도에 조국근대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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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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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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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못 배운 것이 한이었던 여공들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당시나 지금이나 학력은 신분을 표시한다. 그런데 당시 여공들의 대부분은 가정 형편상 중학진학을 못했다. 그러니 동창들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들 중 한 여공(女工)의 이야기.


朴 대통령은 자주 공장시찰을 했다. 하루는 한 섬유공장을 들렀다. 수천명의 여공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다. 시골에서 온 앳된 소녀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키도 작았다. 먹을 게 귀했던 당시, 시골에서 영양분 섭취를 제대로 했겠는가. 朴 대통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났을 것이다. 여공들이 기특해 보이면서도 애처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영어 글씨를 모르니, 감독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수출을 할 때라, 영어 글씨가 여기저기 있을 때이다. 대통령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대통령의 눈시울도 젖었다. 주위 수행자들도 순간적으로 숙연해졌다.



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朴 대통령의 의중을 눈치 챈 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朴 대통령 "돈이 없어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시설을 충실히 해주시오. 자부심을 느끼게." 이렇게 해서 여공들의 야간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든 여공까지 모두가 참여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나 새로 마련된 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교사 문제도 걱정이 없었다. 많은 사원들이 자진 봉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교복도 무료로 지급하는 등 소요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이들 여공들은 휴가로 고향에 갈 때에는 꼭 교복을 입고 갔다.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한 맺힌 교복. 그래서 고향 땅에서 교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공장으로 돌아올 때 이들은 자기 고장의 잔디를 한 장씩 떠 가지고 왔다. 그것을 학교 마당에 깔았고, 이를 '팔도(註: 팔도강산, 전국을 뜻함) 잔디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줄 수 있지만, 졸업장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과과정(커리큘럼)이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듣고 朴 대통령은 즉시 문교부 장관을 불렀다. "장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어린 소녀가 낮에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래, 그 한도 못 풀어주오. 그런 규정은 당장 뜯어고치시오" 하는 호통이었다.



졸업식 때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 엉엉 소리를 냈다. 재학생도 따라 울었고, 교사도 울었다. 사장도 울었고, 참석한 귀빈도 울었다.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어 행사가 잠시 중단될 때도 있었다. 못 배운 한을 푸는 날. 얼마나 감격적인 광경인가.



여공들은 중학과정을 끝내고 고등학교 과정으로 진급했고,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생겼다. 이들 대학생에게는 회사에서 장학금을 주었다.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는 정부나 기업이 여공들에게 베푼「정」이었다. 이「정」이 순수했기 때문에 여공들은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고마워했다. 서로가 학우로서 친하게 되니, 협동심도 생기고 단결심도 생겼다. 일의 능률도 올랐다. 이직률도 줄었다. 당시 각 공장에는 월 별로 품목마다 수출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여공들은 이 목표량을 생산하는데 스스로가 노력했다. 목표량이 달성될 때마다 기쁨의 환성을 올렸고 기업주는 이에 보답했다. 모두가 우리나라 경제건설에 앞장서는 개척자였으며, 그들의 목적의식은 뚜렷했다. 그래서 신명나게 일했다.


이런 일을 정치적이나 노동착취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한다면, 이는 당시의 실정을 왜곡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을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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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6-12>를 보면 1966년에서 70년까지 4년간 환율이 14.5% 인상되었는데도 제조업 근로자의 노임은 달러로 따져 평균 222.5%로 인상됐다.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상률은 업종별로 큰 차이가 났다. 인건비가 더 많이 오른 쪽이 근로자를 구하기가 더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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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우리나라의 업종별 임금 비교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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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새로 생긴 공장은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 ]



[ .... 70년대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어떤 경쟁국보다 노임이 높은 나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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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당시의 여성 근로자의 노임 수준을 알아보기로 한다.


1970년 한국정밀기기 센터(註: 전자공업 진흥센터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는 전자공장 유치용 홍보책자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각국의 임금 실태를 조사했다(1970년 8월). 그 결과가 <도표 6-11>이다.



1970년 당시 신규로 채용한 우리나라 여공들의 하루 임금은 245원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대만의 경우는 343원으로 우리나라보다 40%가 비싸고, 싱가포르는 27%가 높다. 우리나라가 경쟁국보다 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참 여공들의 경우는 양상이 달라진다. 한국은 413원인데, 대만은 418원으로 101%, 싱가포르도 101%이다. 즉, 고참 여공의 경우 우리나라는 대만, 싱가포르와 거의 같은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평균으로 계산하면 대만이나 싱가포르의 노임 수준은 우리나라에 비해 11~16% 정도 높았다. 즉,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임금은 1970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도표 6-11>에서 우리나라 여자 조립공의 노임(日給)은 최하가 245원이고 최고가 413원이다. 그 비율은 100 : 169이다. 이에 비해 대만은 100 : 122, 싱가포르는 100 : 133으로 우리나라보다 노임 격차가 적다. 격차가 크다는 뜻은 경험이 많은 고참 여공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수출이 늘자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이에 따라 신참 노동자는 구할 수가 있어도 고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새로 생긴 공장은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70년대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어떤 경쟁국보다 노임이 높은 나라로 변해 버렸다. 그 후부터 「값이 싼 한국 노동자」라는 말은 다시 나오지 않게 되었다. 환언하면 「값싼 인력 시대」는 여성 근로자에 관한 한 1964년 중반부터 70년까지 약 7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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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여성근로자의 노임 한계점에 도달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1970.2.21. 매일경제



기업자본축적에 압박

생산성보다 임금상승율 높아



훈련된 노동력부족

능률급제 강화 등 조정책 시급


한국경제연구소서 방안제시



우리나라의 임금상승율이 65년을 기점으로 그해부터 물가상승율을 앞질러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크게 증대되고 있으나 노동력의 '풍요속의 빈곤' 현상에 주도되어 계속 생산성상승률을 상회, 기업의 지불능력을 위협하고 자본축적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생산성임금제(용어교실참조)의 실현 등 임금수준의 적절한 조정대책이 촉구되고 있다.



21일 한국경제연구소가 내놓은 '임금수준의 비교분석과 조정방안'에 의하면 우리나라 임금상승률은 64년까지 생산성상승률을 하회하다가 65년부터 이를 능가, 68년말에는 생산성지수가 144.1(65년 기준)인데 반해 임금지수는 광업이 169.5, 제조업이 198.9의 높은 수준을 보였고 물가상승지수 138.0(소비자물가)에 비해서도 크게 신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분석자료에선 임금의 계속적인 상승으로 인해 근로자의 가계수지는 지속적 흑자를 보이고 지출 패턴은 고도화 되고 있지만 기업의 지불능력을 압박하여 자기자본축적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 임금상승요인을 제거하여 생산성과 임금수준의 합리적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자료는 특히 임금 상승요인으로 절대적인 노동력과 유휴노동력은 풍부하나 훈련된 노동력이 부족, 필요한 노동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노동의 풍요속의 빈곤을 가장 큰 이유로 들었으며 이로 인해 산업간의 노동이동이 부진하고 업체간의 무리한 '스카우트'전이 벌어져 임금상승을 더욱 자극하는 요인이 됨을 지적하하고 이의 해소를 위해 1. 과학적인 인력수급계획에 의한 노동력의 질적 향상 2. 생산성임금제와 능률급제의 강화 3. 기업내의 기능공훈련강화 4. 공업의 지방분산 5. 부가급제의 실시와 상여금의 주식대체지급을 강력히 추진하여 노동생산성제고와 인건비절약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 ..... 1970년대에 평화시장 ....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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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 물론 1970년대에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은 무척 나빴다. 그런데 막상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최악의 노동 조건에 대한 별 감각이 없었다. 대부분이 그 전에 너무 어렵게 살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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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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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간첩 박원식을 추적하던 경찰이 추풍령 산마루 경북 금릉군 봉산면 광천동 일대의 주민동향을 조사했을 때 속칭 돈목 마을 (27 가구) 은 11명의 처녀가 돈벌이를 하러 도시행, 17세가 넘는 처녀는 단 2명 뿐이었다. 속칭 곤천마을(30가구)은 처녀 13명이 모두 외지로 나가 '처녀 없는 마을'이 돼 버렸고 주민들도 "도시에서의 식모살이가 답답한 산골생활보다야 낮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부러워 하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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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2.03.27.






* 1971


[ ...... "촌에서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것 보다는 지금 생활이 훨씬 낫다" ....... ]


1971.1.11. 경향신문


71년의 현장 지도에서만 수도


71년의 현장
지도에서만 수도

터져나온 만원 서울 .... 봉천동
빈부격차 두드러지고 도시속성 그대로

도시화과정의 단면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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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착민이건 원주민이건 이곳이 농촌이었던 옛날에 비해 현재의 주민들이 결코 못사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예찬론을 펴는 것을 보면 도시에로의 인구집중이 빚어지는 까닭을 알 것 같다.


날품팔이로 하루 5백원꼴을 번다는 박원규 씨(57 봉천동 101)가 "촌에서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것 보다는 지금 생활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게 이를 뒷받침 한다.


충남 예산군 삽교면 두리4구에서 10마지기 밖에 안되는 논과 밭을 경작하면서 머슴을 살았으나 7남매의 끼니 대기조차 힘들었다는 박씨가 무작정 상경한 것은 지난 69년 4월.


20년전에 앓다 죽은 본처의 약값을 대노라 진 1만원의 빚이 3만원으로 불어나자 농토를 처분, 빚을 갚고 나머지 2만원을 갖고 서울에 와 여의도에 움막을 짓고 지게 벌이를 하다 여의도가 개발되며 이 곳으로 옮겨저 8평의 땅을 받고 정착했다는 것.


그 뒤 그 자신은 날품팔이를 하고 큰 딸과 둘째 딸은 공장여공으로 취직하여 세 사람의 총 수입이 월 2만4천은 되므로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며 그 나름대로의 도시생활에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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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


......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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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여공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중학교 졸업 직후인 1974년.


“그때는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다들 서울로, 도시로 떠났어요. 시골에서는 먹고 살 길도 없고 형제들이 많으니 철이 들 무렵부터 여자애들은 대부분 공장에 취직했지요. 도시로 떠난 언니들이 휴가 받아 오면 다들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그라고 왜 여고생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담임도 야간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단 걸 잘 알았죠. 그래도 어린 마음에 막상 진학을 못한다는 절망감에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대신 언니가 있는 부산으로 가 합판공장에 취직했어요.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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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6 15: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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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2022-03-16 15:33:06


1974



[ .....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


......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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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여공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중학교 졸업 직후인 1974년.


“그때는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다들 서울로, 도시로 떠났어요. 시골에서는 먹고 살 길도 없고 형제들이 많으니 철이 들 무렵부터 여자애들은 대부분 공장에 취직했지요. 도시로 떠난 언니들이 휴가 받아 오면 다들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그라고 왜 여고생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담임도 야간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단 걸 잘 알았죠. 그래도 어린 마음에 막상 진학을 못한다는 절망감에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대신 언니가 있는 부산으로 가 합판공장에 취직했어요.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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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촌 출신 ... 여성들이 ....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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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테마는 여공의 공장에 대한 동경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수 민주노조 여공들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하층사회 소녀들이 여공이 되는 것은 농촌탈출이란 소녀들의 적극적 선택과 가족적 요구간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그간 대부분 노동사 서술은 여공의 취직 동기는 가난,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슬픈 ‘哀史’가 담겨 있다는 천편일률적인 담론을 재생산해냈다.

이런 담론들은 농촌 출신 혹은 도시 하층사회 출신 여성들이 자신의 자립과 독자적인 욕망을 이루어 내기 위해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에 대한 익명적 지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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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김지은양은 ' 보릿고개 '란 개념에 대해 아시나요 ? 30대 초반인 저도 보릿고개를 체험해보지는 않은 세대인데. 김지은양 정도 연배면 더 생소한 개념이겠죠. 쉽게 말해 가을에 추수한 쌀은 다 떨어져가고.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먼 때. 그래서 먹을게 다 떨어진 때가 보릿고개입니다. 보리가 날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버텨서 살아나야 하는 거죠. 못 버티면 굶어죽는거고요.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들. 정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신 분들인겁니다.


김일성이 말한 ' 이밥에 고깃국 '에서 고깃국 개념도 제 짐작엔 아마. 우리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먹는 그런 갈비탕같은 의미의 고깃국은 아닐거란 생각이 드네요. 아마 쇠뼈라도 한조각 집어놓고 몇시간동안 우려낸 그런 국물이라도 먹게 하겠다. 그게 김일성의 공약(公約) 아니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 절망과 기아선상의 나라를 구하겠다 '는 공약을 어느정도는 지킨 셈이지만.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은커녕 옥수수국물도 제대로 못먹는 나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 차라리 일제시대때가 더 낳았다 '고 하겠습니까 ?

드라마 ' 야인시대 '를 지켜본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감옥에 갇힌 김두한이 애인인 나미꼬나 박인애등과 면회하는 모습을 보며. ' 일제시대 감옥이 북한보다 더 났다 ! '고 입을 모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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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황장엽씨 같은 분들의 아들,딸이 평양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만.


' 해방후 식민통치로 낙후한 조선땅에서의 과제 '가 '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과 '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수립 '이었다고 말씀하셨죠 ? 이 두가지가 과연 그럼 남한과 북한중 어느 사회에서 이루어졌느냐고 한번 다시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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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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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활은 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배우러 가는거야. 안 가면 네 인생을 망칠 거야.” 그 선배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촌놈’인 나도 농활을 갔다.


노동경험이 적던 우리는 힘겨운 노동으로 고단한 밤에 엄격한 평가회를 했다. 소외된 농촌,가난한 농촌, 더 힘든 어머니들 등에 다들 쉽게 동의했지만, 촌놈인 나는 우리 농촌도 많이 발전했다는 내 경험적 확신을 주장했다. 실제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거의 몇일을 날밤을 새다시피 논쟁했다. 그 논쟁은 (내가 부촌의,부잣집 아들의,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주장한다)로,내 동의없이,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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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은 박 대통령이 수출 드라이브를 걸 때였죠. 남대문에 코트라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다보면 수출목표액과 달성액이 전광판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수출 많이 하면 애국자 대접을 받았습니다. 밤새서 일하는 데 보람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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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1972년에 한세실업의 전신인 한세통상을 세웠다. 당시 나이 28세였다.


"아침에 눈 비비면 나왔습니다.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잠들었고요, 휴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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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9년 ....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 ..... 한국은 13%로 최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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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 데 반해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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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6822&C_CC=BB

維新시절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자료
趙甲濟






* 1983.6.21.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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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의 한 농촌지방에 들른 신대위는 "한국의 농촌이 이렇게 잘 살고 있는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면서 농민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때는 "이런 음식은 북한에서는 당간부들의 연회장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또 남이섬에 들른 신대위는 이곳에 가족끼리 나들이 나온 주민들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휴일을 즐기면서도 어떻게 잘살아 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신대위는 서울교대부속국민학교를 둘러보고는 "북한에서는 어릴때부터 모든 교육이 전쟁과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로 일관돼있다"고 비난하고 "청소년국방체육을 강화하고 키크기운동까지 시키고 있으며 야구경기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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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 우린 언제 잘 살아봅니까 ?


--- 홍사덕 국회의원




내가 밤새도록 통곡하듯 울었던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여동생을 여의었을 때를 빼고도 세 번이다. 그 세 번 가운데 두 번은 해외여행도 중 우리나라의 가여운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였고, 장소는 이집트의 카이로 미국의 그랜드정시였다. 그러나 나의 최초의 밤샘 통곡은 아직 대학에 다니던 64년 12월에 있었다. 신문기사 한 줄을 읽고서였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의 수출입국의 깃발을 걸고 어떻게서든지 농업국가인 이 나라를 공업국가로 만들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장을 지으려 해도 기계 사올 돈이 문제였다. 당시 국내에 있던 최대의 공장은 요즈음 없어진 충주비료공장과 고 이병철 회장이 세운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외국에 내다 팔 만한 물건을 만드는 공장을 짓자면 다른 건 몰라도 기계는 돈주고 사와야 하는데 달러가 문제였다. 빌려줄 나라나 은행이라곤 없었고 모두가 그저 속만 끓이는 판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정부가 "같은 분단국인 서독에 가서 사정을 하면 돈을 좀 빌릴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대통령의 서독방문을 결정했다. 64년 12월 7일서부터 12월 15일까지 박정희대통령은 독일 방문길에 나섰다.




나는 대통령의 등정 행색부터가 마음에 걸리고 가슴아팠다. 당시에는 대통령 전용기는 고사하고 kal의 전신이었던 kna의 보유 항공기 가운데서도 그렇게 먼길을 갈 수 있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그래서 서독의 민간항공회사인 루프트한자로부터 비행기 한대를 빌려서 태극기를 달고 대통령 일행이 타고 갔다. 그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와 있던 나는 한 줄의 신문기사를 읽고 그 자리에서 얼굴을 파묻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통령 일행을 맞아 서독의 교민들이 환영회를 열어줬다. 10여명의 유학생과 수백명의 간호원 광부들이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교민 대표로 뽑힌 간호사가 환영사를 읽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환영사의 첫줄을 읽자마자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했고 대통령과 수행원들도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의 환영사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 봅니까?"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하나의 연상을 했었다. 당시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는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처에 나가 있는 친척들을 통해 딸아이는 식모살이 그리고 아들같으면 점방의 고용원으로 내보내곤 했다. 월급을 받기 위해 그렇게 내보내는게 아니라 집에 그냥 있을 때보다 양식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생활급을 주는 직장은 삼성물산 한군데뿐이었고 식모나 가게 점원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집안에 무슨 급한 환자가 생기거나 우환이 있게되면 딸자식을 식모살이 보낸 부모가 그 주인집을 찾아가곤 했다. "가을걷이를 하면 갚을 테니까 얼마간만 융통해 달라"는 통사정을 하기 위해서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면 얼마간의 돈을 빌려주기도 했으나 대개는 거절당하는 게 일쑤였다. 그런 때에 식모살이를 하던 딸자식이 모처럼 찾아온 아버지나 어머니를 제방으로 모시고 가서 정성들여 차린 밥상을 올리면서 부녀간에 나눈 얘기는 늘 하나였다.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봅니까?"


사실 나의 이와 같은 연상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날 대통령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교민 가운데 십수명의 유학생을 뺀 나머지 수백명은 보도된 대로 간호사와 광부였다. 지금의 20대들은 먼 외국땅에 나가 광부 노릇하고 간호사 노릇한 사람들이니까 대략 그런 수준이겠지라고 생각하기 십상이겠지만 그때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정규 4년제 대학을 나온 젊은 청년들이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하기 위해 몇 달씩 삽질과 곡괭이 질을 한 끝에 합격하곤 했다. 간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문여대를 나온 여성들이 새삼스레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치열한 경쟁을 거쳐 독일까지 간 것이다. 국내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직장보다 간호사나 광부로 일할 때 받는 월급이 서너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아들,딸들은 독일 사람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기 싫어하는 일거리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나라에 돈을 빌리러 간 대통령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봅니까?"라고 환영사의 첫마디를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처지가 식모살이 하는 딸집에 돈빌러 간 시골의 어느 아버지와 어디가 다르단 말인가.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늘 후하게 하는 편이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줄곧 야당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한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점 하나만 빼고는 늘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그였다 하더라도 64년 12월 그날, 딸같은 아이로부터 "각하,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 봅니까"라는 말을 들었다면 독하디 독한 공업화의 집념을 평생 떨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준공 이후 한참동안 자동차라곤 그저 10분에 한대 다닐까말까 했던 경부고속도로를 기어 이 건설한 집념, 누구도 상대하지 않던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 열의, 그리고 공업화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전쟁터건 사막이건 가리지 않고 뛰어들던 욕심등은 그날의 충격과 집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 1962년 서독 차관 비화



“후손은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게…반드시…“

朴대통령 말에 모두 눈물


[플래시백-되돌아본한국경제] ①1962년 서독 차관 비화

서독 차관 얻으려 광부·간호사 파견



1964년 12월 10일 오전 10시55분, 독일(당시 서독) 루르 지방 함보른 탄광의 한 공회당.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묻은 500여명의 한국인 광부, 한복차림의 한국인 간호사, 독일인들 앞에 당시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나타났다. 실내에 애국가가 울려퍼졌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야 박 대통령과 광부, 간호사들의 목멘 소리가 간신히 들렸을 뿐이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 바다’로 변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고문 자격으로 박 대통령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白永勳·74·전 중앙대 교수) 박사는 “탄광을 떠나는 승용차 안에서 박 대통령은 ‘내가 죄인이다’라며 눈물을 흘렸고, 옆에 있던 뤼브케 대통령이 ‘울지 마십시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부흥을 이룹시다’라고 위로하는 말을 통역하면서 나 역시 울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조국에서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와 간호사 1진 600여명이 서독에 처음 도착한 때는 1963년 11월이었다. 이날은 타국생활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머나먼 조국에서 온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였던 것이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조국근대화’ 기치를 내걸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지만 극심한 외자(外資)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박 대통령이 달려간 곳이 독일이었다. 독일은 당시 우리처럼 분단상황이었고,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린 눈부신 경제발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경제사절단을 독일에 파견해 차관 제공을 간곡히 요청했고, 독일측은 아시아 수출시장을 넓히려는 의도하에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 제공을 결정했다. 그러나 남은 문제는 과연 지급보증을 누가 서느냐였다.

“당시 우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지급보증을 받아올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방안이 서독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는 것이었죠.”(백영훈 박사)


결국 이 지급보증 문제는 독일에서 일하는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의 3년간 급여를 독일은행인 ‘코메르츠 방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방식으로 해결됐다. 박 대통령이 “타국에 팔려나왔다”고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을 눈물로 위로한 것도, 차관도입을 둘러싼 바로 그 사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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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없어 환자 못받아"…병동 폐쇄까지


2013-07-06


MBC Home > 다시보기 > 뉴스데스크

◀ANC▶

치료 시설은 훌륭한데도 환자를 받을 수 없는 병원이 있습니다. 간호사가 없어서라고 합니다.

지방 병원일수록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죠.

곽승규 기자가 현장 취재했습니다.

◀VCR▶

질좋고 값싼 의료 서비스로 인기 높은 전남 강진의료원.

입원환자만 200명 넘게 몰려 주사실까지 대기 환자들이 누워 있습니다.


◀SYN▶ 김혜정 간호사
"저희 병원이 병실이 부족해서 입원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8층에 새로 병동을 마련했지만, 병상만 휑하니 놓여 있을 뿐, 환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간호사가 20명이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INT▶ 함주호 의사
"너무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긴한데 저희 인력이 없다보니까..."



충남의 또다른 병원.

간호사들이 과로로 쓰러지고 일을 그만두면서 닷새 전 입원병동을 폐쇄했습니다.

울산의 한 민간병원은 중환자실 운영을 중단했고, 충남의 한 의료원은 산후조리원을 잠정폐쇄했습니다.


◀SYN▶ 병원관계자
"그렇게 채용공고를 해도 (간호사가) 오질않네요. 그래서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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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육아 부담에다 일까지 힘드니 아예 간호사 일을 그만두거나 근무 환경이 조금 더 나은 서울의 병원으로 떠나면서 지방 병원들은 간호사 부족의 악순환에 시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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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간호사 면허 취득자는 29만여명, 하지만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는 12만 여명으로 채 절반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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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분향 늘어


[중앙일보] 입력 1979.11.02




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내무부집계)에 이른다.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8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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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786







* 1980 南韓人口(남한인구) 37,448,83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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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귤이 아니라 사과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데




간부들이라고 해서 일반 주민에 비해 낫다는 것이지 그들도 굳이 남한과 비교하자면 대망님의 말이 맞습니다.

귤을 사계절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김정일과 김용순정도 일것입니다. 아마 김용순도 자기가 먹고싶을때 귤을 먹을 수 있을런지는 잘모르지만...

남한에 와서 사계절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적이 있었어요..

여기서 노가다 하는게 북한에서 장관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아무리 서민이라도 외국에도 마음대로 나가고 하루벌지라도 돈만 좀 있으면 얼마든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수 있으니까...아마 김용순이도 외국가자면 김정일의 승인이 없으면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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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 연변



[ ...... 즐겨 듣는 방송은 KBS의 「자유의 메아리」 방송과 「미국의 소리」(VOA) .......

......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 .......

...... 요즘은 북한과의 서신왕래조차 끊긴 상태라고 ....... ]



(2) 재미교포 한태경씨 | 「연변조선자치주」를 가다 본지독점연재


[중앙일보] 197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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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을 그린다 | 신문·방송통해 고국소식 알아 | 만난 사람마다 미국생활 질문 | 북괴와 서신왕래두절…대부분이 한국동경 | 북송교포 "연변에 도망치다 잡힌 사람 많아"


이 밖의 「뉴스」 매체로는 한글로 된 연변일보, 중국어판 길림일보 등 신문과 장춘에서 1주일에 2회, 약 2시간 정도 연변지역에 중계방영하는 흑백 TV, 연길의 한국어 방송, 길림의 중국어 방송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즐겨 듣는 방송은 KBS의 「자유의 메아리」 방송과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다.


<한국발전상 잘 알아>


이들은 특히 한국의 발전상을 자세히 알고있는 듯 했고 미국과의 수교가 임박해서는 미국생활에 상당한 관심을 표시했다.


내가 집을 나와 산보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질문공세를 폈다. 미국이 잘 살고, 과학이 발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밥도 기계가 짓고 빨래도 기계가 한다는데 사실이냐』


다행히 내가 갖고 갔던 「폴러로이드」 사진기가 모든 대답을 해줬다. 이때까지 「컬러」 사진을 구경 못한 이들에게 천연색사진이 촬영하자마자 만들어져 나오는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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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동포들은 또 북한의 실정을 잘 아는지라 일부 거류민단간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있었고 남북한 국민전체의 자유선거를 통한 남북통일을 원하고 있는 듯 했다.


한때 이른바 김일성 혁명사상을 「테스트」 한다는 「고험」(시험)을 거쳐 북한으로 이왕한 동포들도 있었으나 요즘은 북한과의 서신왕래조차 끊긴 상태라고 했다.


오히려 일본에서 북송된 많은 북송교포들이 「연변자치주」로 탈출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갖고 온 자동차·TV 등을 모두 북한당국에 뺏기고 빈털터리가 돼 다시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항의 「데모」를 하기도 했으나 모두 집단농장으로 보내졌고 연변으로 도망쳐 나오다 붙잡힌 사람만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이곳 동포들이 알려줬다.


미·중공수교를 전후해서는 영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 국민학교에서조차 지금까지의 소련어 대신 영어를 외국어 교육과목으로 채택,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른바 중점학교(일류학교)에서는 영어교육에 중점을 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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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기간 중 몇몇 동포들은 자신의 가족·친척들을 고발해 숙청의 제물이 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뜻있는 노인들이 매우 통탄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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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503345





1978



[ ...... 한국은 1천3백10달러로 39위 .......

...... 중공 (230) ....... ]



1981.4.11. 동아일보



한국 세계 39번째 부국

78년 1인소득 천3백10달러



[워싱턴 AP연합] 78년 집계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5천9백70달러의 쿠웨이트이며 미국은 9천7백70달러로 9위, 한국은 1천3백10달러로 39위를 차지했다고 10일 세계은행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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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민소득이 3백달러 이하인 국가는 우간다(280 달러. 이하 달러) 기니(260) 마다가스카르(250) 아이티(240)

중공(230) 스리랑카(200) 인도(180) 아프가니스탄(160) 방글라데시(90)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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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 ...... 앉아 있던 중국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라고 권했다 ........ ]



동아일보 1979.10.10.


중공 30년




[홍콩=박흥원 특파원] 현중공정권이 대외정책에서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로부터 평화공존과 데탕트추구로 급선회함에 따라 지난 30년동안 굳게 닫혔던 죽의 장막이 걷히고 중공사회는 그문을 활짝 열었다.


이에 따라 외국관광객들이 중공에 몰려 들고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가고 있다.그뿐만이 아니다.9억 인구의 방대한 시장을 노린 외국상인들이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중공땅을 밟고 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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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엔 무조건 특별대우



최근 중공을 다녀온 한 미국기자의 중공인상을 들어보자.


"만원버스를 탔다. 앉아 있던 중국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라고 권했다. 버스를 타려고 줄지어 있는 뒷줄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와서 팔을 잡아끌기에 어리둥절해 있으려니까 앞줄로 가라는 것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봤다. 내국인식당인데도 외국인을 위한 전용특실이 마련돼 있어 그곳으로 안내 받았다. 공항대합실에도 기차역에도 외국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전용특실이 있다."


중공은 외국관광객들도 자기 나라를 찾아준 외국손님이라며 대접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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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중공서 「홍콩」으로 헤엄쳐 탈출 10월 들어서만 1만1천3백명


[중앙일보] 1979.11.02



■…바다를 헤엄쳐 중공으로부터 「홍콩」으로 탈출해오는 「자유의수영객」들이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다.


10월 들어 이같이 헤엄을 쳐서 「홍콩」으로 탈출했다가 「홍콩」경찰에 불법입국자로 체포된 사람수는 1만1천3백명을 상회하고 있으며 이같은 중공으로부터 불법이민자수의 증가는 62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던 금년봄의 수준에 육박하는 것.


중공으로부터 온 불법이민체포자수는 금년 5월에 1만4천4백명이있고 6월에는 1만2천1백명이었다.「홍콩」정청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8개월동안 중공으로부터「홍콩」에 온 불법 및 합법적 입국자수는 총25만명 이상이다.









1981.7. 중공



[ ....... 마르크스주의가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선언 ........


...... 서기 2천년에 중공1인당 국민소득의 목표를 ... 8백달러선으로 수정 ......... ]




중공의 새물결 (중)

등소평 체제의 새과제들



[중앙일보] 1981.07.03



호요방이 중공당주석에 취임하고 첫 공개연설에서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선언한 배경은 무엇보다 심각한 경제난국에 있다.


현재의 중공사회 경제체제는 정통적인 공산주의의 경제정책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다는 중공지도부의 현실인식이 언뜻 보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게 한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75년에 시작한 「현대화계획」, 화가 목표 늘려잡아 물가 치솟고 재정파탄 위기직면
불만 쌓이자 어쩔수 없이 자본주의식 치유책 도입



70년대 중반 주은내(전수상)로부터 현재의 등소평(당부주석)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국민들에게 서기 2천년의 화려한 중공미래상을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그날의 과실을 위해 좀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당지도부의 노선에 충실하고 헌신하라고 호소해왔다.


주은내는 75년 『중공이 서기 2천년에 공업수준이나 개인소득 등의 모든 면에서 구미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는 초현대적 사회주의 대국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야심적인 계획을 내놓았다. 4개현대화(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계획이 그것이다.



76년 주와 모택동이 사망한 후 대권을 장악한 화국봉은 지지기반이 엷고 권위가 허약한 것을 확대하고 벌충하기 위한 조급한 생각에서 4개현대화 계획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늘려 잡았다. 중공의 연간석유 생산량의 반을 생산하는 대경유전과 같은 규모의 유전을 10개씩이나 건설한다는등 1백20개의 대형건설사업을 추진했다. 그것도 10년 동안 해내겠다는 것이었다. 투자소요 추정액만도 당시 6천3백억달러규모(부주석 이선념)였다.


서방세계가 맹목적으로 중공특수의 환상에 들뜬 것도 그래서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을 도외시한 이 계획은 2년도 못가 부작용을 낳았고 마침내는 이선념의 고백처럼 중공재정의 파탄일보 직전까지 몰아갔다. 화의 실세에 일조만 한 것이었다.



뒤이어 등소평과 진운(당부주식)은 그 계획을 백지화하는 3년간의 경제 조정기를 갖고 보다 현실에 근거한 새로운 8개년 계획을 제시했다. 등은 또 서기 2천년에 중공1인당 국민소득의 목표를 1천달러선으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등은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 목표를 8백달러선으로 수정해야 할만큼 중공경제실정은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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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중공이 제시한 미래의 달콤한 꿈만 쫓아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기에는 너무 지쳐있었을뿐 아니라 속임을 당하고있다고 자각했다.


상해같은 대도시는 물론 신강성같은 변방에서조차 정부시책에 합의하는 대규모시위 또는 폴란드식의 자유노조결성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마르크스주의는 청·장년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청년들은 더이상 어떤 주의나 정치를 신봉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아주 정상적이다』(「탐소」5호·여림)는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실용주의 지도부는 이처럼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그로 말미암아 정부가 국민의 신임을 못얻게 하는 장애가 다름 아닌 교조적 공산주의이념의 집착이라고 본셈이다.

따라서 호의 연설로 가장 영향을 받는 분야는 경제정책이다.



실제로 이미 진행되고있는 경제정책은 공산주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본주의적 냄새가 짙은 것들이 많다. 예컨대 상여금제도의 실시, 개인기업의 부활과 장려, 기업상호간의 경제체제를 통한 시장경제원리의 도입, 1백% 외국투자의 허용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등-호 체제는 말하자면 그와 같은 「이단정책」을 더 확대하고 합리화하기 의한 방편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맹신에 경종을 울리는 「이단」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중공은 앞으로 뒤떨어진 경제건설과 불만에 찬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공산주의 이념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입장에서 경제정책을 시행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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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72895








1981



[ ...... 한국 ... 1인당gnp 1천6백7달러 ....

북한 ... 1인당gnp 7백50달러 ........



.... 수출 ...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 .........

..... 한국 ... 93%가 공산품 ....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 ......... ]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경향신문 1983.6.22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gnp 4.6(남) 대 1(북)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단연 앞서 ... 발전도 2배격차
중공업분야도 반전 ... 거의 3배차

북한군사비 gnp 24% ... 야욕 못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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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적경쟁을 벌였으나 70년대 중반기부터 남북한간에는 경제적격차가 현저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민총생산 규모(81년말 현재)는 한국이 gnp 6백22억달러 ,1인당 gnp 1천6백 7달러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gnp 1백36억달러, 1인당 gnp 7백50달러로 추계됨으로써 북한은 한국에 비해 gnp규모면에서 22%, 1인당gnp면에서 4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같은 경제총량규모의 현저한 격차는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지속했고 특히 73-74년, 78-79년의 세계적불황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해온 반면 북한은 최근 투자율이 30% 이상의 고율인데도 불구하고 자본의 낭비와 비효율적인 투자계획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의 국면에 빠져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gnp에 대한 군사비부담률은 81년에 한국이 6.3%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23.8%로 군사력증강에 혈안이 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수출면에서는 81년 한해 동안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나 되고 있다. 수출주종품목도 한국이 수출품목의 93%가 공산품인데 반해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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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중공



[ .... 1백명당 자전차 보유대수는 ... 13.1대 .... TV는 ... 2.7대 ......

..... 중공의 1인당 GDP는 3백10달러 .... 중공의 엥겔계수 ... 60% 정도 ......

..... 82년 대만의 GDP가 2천3백42달러 ....... ]



1984.12.7. 매일경제


"서구를 따라잡자" 열기충만

대변신 ... 중공경제 <상>


미나미 료오신



중공이 개방정책으로 선회한 이후 서방국들은 대중공잔출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컴퓨터부문에서 미국과 선두다툼을 벌이면서까지 대중공 시장확대에 급피치를 올리고 있다. 이같은 추세속에 최근 중공의 대변화현장을 둘러 보고 온 일본의 미나미 료오신 일교대교수는 본사의 독자들을 위해 직접 쓴 견문록을 본사 이정근 동경특파원을 통해 보내왔다. 생동감이 넘치는 르포 형식의 이글을 3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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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물자는 대부분 배급제로 국가에서 할당되는 쿠폰으로 물건을 배급받던 것은 이제 옛날 얘기라고 한다. 상품생산이 급증하면서 배급품목은 대폭 줄고 있으며 현재는 쌀등 주식과 식용유 정도가 남아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활용품 자유매매


자전차 시계 TV 등도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문혁이 끝난 직후인 78년부터 82년 사이의 변화상을 보면 1백명당 자전차 보유대수는 7.7대에서 13.1대로 늘어났고 시계는 8,5개에서 18.8개 TV는 0.3대에서 2.7대로 늘어났다.또한 과거 인민복일색이던 복장도 변해 신사복을 입은 남자도 가끔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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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의 추계에 따르면 82년 중공의 1인당 GDP는 3백10달러로서 조사대상 1백4개국중 밑에서 18위에 속하는 낮은 수준이다. 인도 파키스탄 케냐와 비슷한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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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계수 60% 수준


중공의 엥겔계수(82년)는 대체로 60%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도시가 58.7%, 농민은 60.5%) 이것은 표의 제1계층의 평균치와 비슷한 것으로 인도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같이 1인당 GDP 및 엥겔계수만을 통해 볼 때 중공은 인도와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생활이 뒤진 국가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2년 대만의 GDP가 2천3백42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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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0. 중공


[ ..... 가격구조 및 임금체계를 자유시장기능에 맡기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혁명적인 경제개혁조치를 ....... ]



1984.10.22. 경향신문


북경의 자본주의 혁명


등체재의 확률 높은 도박
자유시장원리확대
좌파반발무마등 숙제로

중공당전체회의의 '경제개혁' 선언의 의미



중공당제 12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 (12전3중전회)는 20일 건국 이래 추구해온 소련식 중앙통제경제 정책을 철회하고 가격구조 및 임금체계를 자유시장기능에 맡기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혁명적인 경제개혁조치를 내년 1월 1일부터 실시키로 결정함으로써 과감한 자본주의식 경제제도의 도입을 공식화 했다.


'경제혁명'이라고 불리는 이번 개혁조치는 전경제의 약75%를 자유화시키는 것으로서 그동안 중공이 추구해온 4개현대화계획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는데 큰 뜻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회주의에 자본주의 방식을 가미한 이번 개혁의 주요골자는 첫째 일부 전략품목을 제외한 공산품과 농산물의 국가쿼터제를 폐지, 중앙통제경제구조를 지방분권화하며, 둘째 모택동 시대의 가격 및 임금 구조가 수요공급의 원리와 생산성에 따른 적절한 보수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 적용한다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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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6.


[ .....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 ]


1988.7.30. 경향신문



미일중소 4강 한반도인식급변

알게 모르게 교차교류 활발


한국발전모델에 매력
미소 데탕트가 촉진제

남북한의 대화진전 따라 역학구조 큰 변화예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소 4개강국의 상호접촉이 최근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아직은 공식화하지 않고 내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으나 지금까지 거의 관계가 두절되어 왔던 양대진영의 교차교류가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회에 회담을 제의하고 일본이 북한과의 직접접촉을 꾀하는가 하면 중국과 한국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또 지난달 열린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나오는등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눈에 띤다.

이같은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나 양대진영의 전반적인 데탕트 분위기가 큰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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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동구


‘우리는 서울을 보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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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의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Hand in Hand’를 불렀다. 서울올림픽의 주제가는 그들의 혁명가였다.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삽시간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꺼번에 몰려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바츨라브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서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민주화된 뒤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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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0904&num=335

2009년 겨울호

[특집]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 무엇이 문제인가?
[김주성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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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6. 천안문 시위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28

중국 천안문사태 5백여명 사망

입력 1989.06.04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40

천안문사태 외신 종합보도

입력 1989.06.05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39

중국 천안문광장 시위진압 사망자 수천명

입력 1989.06.05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63

천안문사태 북경 현지상황 영상

입력 1989.06.06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48

폴란드 총선, 야당 자유노조 우세

입력 1989.06.05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7074

폴란드 공산당, 자유노조 압승 시인
입력 1989.06.06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9242

헝가리 동독 난민, 서독 집단이주 시작
입력 1989.09.11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9806

헝가리 공산당 붕괴, 유럽 재편의 출발점

입력 1989.10.09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89978

동독 사상 최대시위
입력 1989.10.17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0138

동독 30만명 자유화요구 시위
입력 1989.10.24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0392

동독 크렌츠 서기장 퇴진요구 시위
입력 1989.11.05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0502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입력 1989.11.10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0530

베를린 장벽 붕괴, 축제 분위기 계속
입력 1989.11.12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1122

불가리아 10만명, 공산당 사퇴 시위
입력 1989.12.11 (21:00)





https://imnews.imbc.com/replay/1989/nwdesk/article/1829534_30389.html

루마니아독재자 차우세스쿠 대통령, 국외 도피[박광온]
입력 1989-12-22



https://imnews.imbc.com/replay/1989/nwdesk/article/1829639_30389.html

루마니아 TV, 처형된 차우셰스쿠 부부 사진 공개[백지연]
입력 1989-12-26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2297

동독 3월 자유 총선거 실시
입력 1990.01.29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3802

동독 총선거에서 보수연합 압승
입력 1990.03.19 (21:00) 뉴스 9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5921

독일 7월 1일 사실상 통일
입력 1990.06.30 (21:00) 뉴스 9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7375

독일 통일조약 조인
입력 1990.08.31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7767

통일 독일 협정 조인
입력 1990.09.13 (21:00) 뉴스 9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8313

독일 통일
입력 1990.10.03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8314

독일 통일 경축열기의 현장
입력 1990.10.03 (21:00)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07435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

입력 1991.08.26 (21:00) 뉴스 9








공산국가 공직자들, 한국경제성장 연수


1991.07.04 뉴스 9



이규원 앵커 :

소련과 폴란드 등 공산권국가의 공직자들이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배우기 위해서 2주간의 일정으로 국내에서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수교육현장을 추은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추은호 기자 :

한국이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소련, 폴란드, 몽고, 베트남 등 최근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있는 공산권국가들의 국장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이 2주일 동안의 연수과정에 참여해 고도성장을 이룬 한국의 정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공산권 국가들이 한국을 배우기 위해 이 연수에 참여하는 등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한국의 행정지도와 행정관리능력 기법을 연구해 같은 숙제를 안고 있는 자신의 국가에서 활용하자는 뜻에서입니다.



야나키에프 (불가리아 특명대사) :

여기서 공부하면서 아마 우리 사업권 큰 이익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르몰로프 (소련외무성 참사관) :

한국 역사, 경제, 한문, 수학 다음에 행정능력 개발에서의 한국 경험을 많이 알아보았습니다.



추은호 기자 :

이처럼 한국을 배우려는 공산권국가의 높은 관심으로 지금까지는 동남아국가 공무원이 이 연수과정에 주요 단골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공산권국가 공무원이 대상이 됐습니다.

이 연수과정이 좋은 반응을 얻고 참여회의를 늘려달라는 요청이 많자 내년부터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만을 대상으로 한 연수과정이 신설될 예정입니다.









[ ...... 공상속에서도 그리지 못하였던 수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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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年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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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뛰고 있을 때 나라를 운영한 세 군인 출신 대통령에게 특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 오늘 만난 한 60대 인사는 “나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굶어죽는 이를 본 적이 있다. 지금의 이렇게 풍요한 생활은 내가 어릴 때 공상속에서도 그리지 못하였던 수준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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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 " 해방운동의 정통성은 NK(북한)에 있다.

NK가 밀고 내려 오면 우리는 게릴라로 나서야 한다 " ....... ]



1986.10.29. 경향신문



좌경을 직시하자


어설픈 관용이 '급진' 양산시킨다

다수는 왜 침묵하는가


" 북이 밀고 오면 게릴라로 맞이하자 "
'오염확산' 차단 자위 서둘러야 할 때




" 눈 앞에 다가 온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체재전반을 뿌리부터 무너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개량의 환상'이야말로 그 어떠한 총칼보다도 무서운 적들의 반혁명 무기이자 마지막 보루이다. "


서울대 지하간행물인 민족민주선언 10월 20일자에 실린 노골적인 '붉은 선언'의 한 대목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고유한 가치관인 점진적인 역사발전을 '개량의 환상'으로 몰아 붙이고 일체의 기존체재를 전면부정하는 극렬한 좌경논리가 최소한의 여과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마구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대학, 사상계, 그리고 생산 현장에 휘몰아치던 좌익 열풍이 40년이 지난 오늘 난데 없이 되살아 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 지난 60년대 안보투쟁으로 불 붙기 시작, 동경대 1년 휴교사태까지 몰고 왔던 일본의 학원소요 혼돈은 70년대의 눈부신 경제성장 및 사회안정과 함께 사그러 들고 말았지요. 다수의 외면을 받고 근거를 잃은 운동권이 마침내 적군파 등 극소수 테러분자의 마지막 불씨를 끝으로 종언을 보았던 일본의 경험이 그대로 이 땅에 적용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분단상황과 정치적 불안이란 특수조건 아래 자생적인 좌경의 뿌리가 날로 뻗어가고 있다는데 지난 날의 일본이나 구미의 일과성 스튜던트 파워와는 다른 심각성이 있읍니다. "


서울대 ㅅ교수의 분석이다. 확실히 80년대 들어 대학, 노동현장, 재야 등 이른바 운동권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좌경 암세포'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 해방운동의 정통성은 NK(북한)에 있다. NK가 밀고 내려 오면 우리는 게릴라로 나서야 한다 "는 등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위 선동문귀가 최근 서울대 등 소위 '메이저 대학'(시위 명문대학)의 교정에 버젓이 나붙는 것이 일상화 되다시피 했다.


관계 당국의 분석대로 이것이 외부 불순세력의 소행이 아닌 자생적인 학내 지하단체의 투쟁헐동이라면 대학내 도처에 자리잡은 '좌경의 수렁'은 이제 다수 학생의 통행이 위험할 정도의 넓고 깊은 늪으로 확대 됐음에 틀림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급진논리는 있겠지만 사회유기체에는 이를 걸러내고 순화시키는 자체치유능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대학은 소수과격으로부터 명백하게 학문연구 및 건전한 과와활동 등 기본적인 대학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 그럼에도 다수는 이를 제어하는 내적기능을 상실한 채 침묵만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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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 송갑석은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말을 반복 .......

..... 북한은 ...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이며 북한에 의한 통일만이 진정한 조국통일이다 ........ ]



“전대협 의장들 모두 주사파조직원”

92년 안기부 수사 발표..386의원들은 否認 일관


Written by. 김성욱 입력 : 2004-12-08



송갑석 “北에 의한 통일만이 진정한 조국통일” 등 수사과정서도 주사파 발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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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반미청년회 등 주사파 지하조직이 장악


우선 대법원은 92도1244, 92도1211, 93도1730 등의 판례를 통해 전대협의 노선을 결정하는 ‘정책위원회’는 ‘북한이 주장해온 민족해방인민민주의혁명(NLPDR)에 따라 우리 사회를 미제국주의식민지로, 우리 정권을 친미예속파쇼정권으로 규정하는 전제 하에, 반전과 반핵, 미대사관폐지, 미군철수, 팀스피리트 훈련의 영구폐기, 국가보안법철폐, 현정권타도, 평화협정체결, 고려연방제에 의한 통일 등을 주장하는 이적단체(利敵團體)’로 판시한 바 있다.


당시 안기부수사발표에서도, 전대협의 각 조직들은 지난 87년부터 88년까지는 ‘반미청년회’, 89년 이후는‘자주민주통일(자민통)’ ‘관악자주파’ ‘조통그룹’ ‘반제청년동맹’ 등 주사파(主思派)지하조직에 의해 장악, 조종돼 온 것으로 밝혀졌다.



주사파조직원 임종석 등 전대협의장으로


안기부가 91년 발간한 ‘전대협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 등 공안문건들은 ‘87년 전대협 제1기 결성 이후 91년 6월 현재 전대협 제5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전대협 의장은 모두 주사파 지하조직에서 파견한 핵심조직원’이었다며 이들 조직의 전대협 장악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전대협 제1기 의장 이인영의 경우, 86년 고려대 주체사상 신봉자들이 결성한 ‘전국사상 투쟁위원회(전사투위)’가 ‘전대협’의장 감으로 사전물색,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시킨 후 87년 8월 출범한 전대협 제1기 의장에 당선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안기부는 또 수사를 통해 전대협 제2기 의장 오영식은 88년 1월20일 고려대 출신 조혁, 김태원 등이 전국대학생 72명을 규합, 결성한 주사파 지하조직 ‘반미청년회’ 출신임을 밝혀냈다.


전대협 제3기, 4기, 5기 의장 임종석, 송갑섭, 김종식 역시 주사파 지하조직 ‘자민통’이 전국 학생운동을 장악하기 위해 전대협에 침투시킨 지하조직원들이었다.

예컨대 제4기 전대협 의장선거의 경우, ‘자민통’은 조직원 송갑석과 윤진호를 후보에 출마케 하고 윤진호가 중도에서 자진사퇴하는 방법으로 송갑석을 당선시켰다.

또 다른 예로 제5기 정책위원회의 경우, 위원장 송규봉, 위원 정영훈, 최정봉, 이명곤, 김기태 등 전원이 주사파지하조직인 ‘자민통’ ‘관악자주’ ‘조통그룹’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김일성수령님 만세, 김정일지도자동지 만세” 충성결의와 맹세



전대협을 장악한 주사파지하조직들의 이념성향은 강령과 결의문, 맹세문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주사파지하조직 ‘자민통’ 기관지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향도이념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오늘 한민전의 지위와 역할을 비상히 높아지고...’라는 식으로 시작된다.

90년 8월 이뤄졌던 ‘자민통’의 가입결성식에서는 ‘한민전’의 강령을 받아들이는 선서와 “김일성 수령님 만세! 김정일 지도자 동지 만세! 한국민족민주전선 만세!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만세!”등을 부른 후 아래와 같은 결의문와 맹세문을 선언했다.



‘위대한 수령님 김일성 동지와 우리의 지도자 김정일 비서의 만수무강과 한민전의 영도아래 이 한 목숨 끊어질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결단으로 나아가자’

‘주체의 깃발 따라 계속 혁신, 계속 전진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님을 따라 숨통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죽음으로 혁명을 사수하며 조국과 민족이 완전해방되는 그날까지 열사 헌신 하겠습니다’



주사파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의 강령은 아래와 같다.


‘반제청년동맹은 김일성장군님과 한민전의 향도에 따라 나아가는 김일성주의 청년혁명조직이다. 동맹은 미(美)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를 몰아내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한다’



전대협 의장 송갑석 “나는 김일성을 존경한다” 반복



91년 전대협에 대한 수사 당시 전대협 간부들은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강한 충성을 수사과정에서도 나타냈다. 당시 수사 결과에 따르면 제4기 전대협의장 송갑석은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말을 반복했고 “김일성이 TV화면에 비칠 때면 건강하고 정정한 모습에 흐믓함을 느낀다. 북한은 정의와 자주권이 보장되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이며 북한에 의한 통일만이 진정한 조국통일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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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출신 제1기, 제2기, 제3기 의장들은 이번 17대 국회에 모두 당선됐다. 4기 이하 기수 의장출신들은 현재 열린우리당과 연계돼 정치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회 들어간 전대협 150여 명” 데일리안 보도


지난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전대협 간부출신들은 12명에 달한다. 1기 출신이 김태년*우상호*이인영*이철우, 2기 출신이 백원우*오영식*정청래*최재성, 3기 출신이 임종석*복기왕*이기우*한병도씨 등이다.


그러나 전대협 출신은 국회의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터넷매체 ‘데일리안’은 최근 ‘한국최대 기득권집단 전대협동우회’라는 기사를 통해 국회의원 이외에도 보좌관, 사무처직원 등으로 국회에 들어가 있는 전대협 출신들이 150여 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 측근 김만수 청와대 부대변인 등 350여 명에 달하는 청와대 직원 중 80여 명 가까이가 전대협 출신이라고 이 매체는 덧 붙였다.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5476&project=8









[ ..... NL진영은 ... 핵심적인 진영은 - 자신의 전위조직을 '한국민족민주전선'(KNDF)으로 상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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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변혁운동진영이 크게 NL진영과 반(!)NL진영으로 양분화되어 있는바, NL진영은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나 핵심적인 진영은- 자신의 전위조직을 '한국민족민주전선'(KNDF)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합법 전위조직을 별도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반면에 반NL진영 혹은 비(`)NL진영은 한국사회의 독자적인 정치적 지도조직 혹은 전위조직을 건설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위조직 건설 -그것을 구체적으로 시도하건 아니면 전망으로서 제시하건 간에- 문제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체적인 시도가 몇몇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제헌의회 그룹으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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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맹, 비합법 전위조직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

저작자 조희연
출처정보 <역사비평>, 1992. 가을, 역사비평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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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시대] 45.<끝> 시리즈를 마치며


[중앙일보] 1997.12.29




지난 7월10일부터 6개월 동안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속에 연재돼온 '실록 박정희시대' 가 29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미처 못다한 얘기들을 취재기자 방담으로 엮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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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주인공들중 일부는 이미 타계했고 생존자도 거의 70대 이상의 고령이었습니다.

증언을 채취하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 철저한 검증을 통해 박정희시대를 오늘의 시점에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 기획의도였죠. 취재과정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중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박정희만큼 논의가치를 지닌 인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역대 대통령중 '공과 (功過) 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박정희'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 그의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 치밀한 사후관리, 국가발전에 대한 비전과 추진력,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끝없는 학습태도 등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한 전직 장관은 "박정희를 좋아하는 기자.국민 수가 또 늘어나게 됐다" 고 하더군요. 박정희를 연구하다 보면 모두 그의 매력에 빠진다는 거예요. 하기야 박정희대통령이 기용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박정희를 못잊어 하더군요.


- 인간적 향기 때문이겠지요. 인터뷰 도중 눈물을 쏟는 증언자들이 숱했고 김두영 (金斗永) 전청와대비서관은 "朴대통령을 모신 것은 가문의 영광" 이라고까지 말하더군요.


- 육사11기 선두주자였던 손영길 (孫永吉) 씨를 보세요. 육참총장감으로 촉망받다 '윤필용사건' 때 버림받아 강제예편은 물론 옥고까지 치렀는데도 “그전까지 각하께서 잘 보살펴주신 것만 고맙게 간직하고 있다” 는 거예요.


-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은 정작 한국에서 박정희를 소홀히 다루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연구가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깊이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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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리즈에 대해 시비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진보를 내세우는 학계나 언론에서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말라" 고 윽박지를 때는 어이없더군요. 사실 취재진은 거의다 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반독재투쟁에 가담하는 등 굳이 따지자면 반 (反) 박정희 정서를 갖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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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연재기간중 '박정희 신드롬' 은 정말 대단했지요.

- 역사속으로 사라진 박정희가 현실무대로 뚜벅뚜벅 걸어나온 셈입니다.

책이 언제 나오느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습니다.
박정희기념관을 세우자는 단체만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경찰이 일부 단체에 대해서는 내사를 벌이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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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후보들 역시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말투.제스처에다 헤어스타일까지 흉내낸 후보도 있었고 아예 "역사는 다시 박정희의 공화당을 부릅니다" 라는 타이틀로 광고를 낸 후보까지 있었습니다.


- 그뿐입니까. 박정희시대 수난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金大中) 후보가 선거운동기간중 박정희 생가를 방문해 고개를 숙일 땐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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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통일문화연구소 김두우 차장, 이동현·정운현·오병상·오영환·정태수·정창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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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문재인 후보가 이승만·박정희 묘역을 참배할 날


2012.09.18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17일 국립 서울현충원을 방문해 김대중 전(前) 대통령 묘역과 일반 사병 묘역을 참배했다. 문 후보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은 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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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2&M=09&D=18&ID=2012091800072








2016.12. 이재명



[ ...... 박정희로 대표되는 친일매국 쿠데타 세력으로 이는 보수의 영역이 아니고 쓰레기 영역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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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시장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은 박정희로 대표되는 친일매국 쿠데타 세력으로 이는 보수의 영역이 아니고 쓰레기 영역이다”라고 질타한 뒤 “이런 보수의 탈을 쓴 부패한 세력을 도려내고 이재명 같은 사람이 보수의 영역을 차지해야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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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0805§ion=§ion2=

이재명 성남시장의 ‘혁명론’ 직접 들어보니
"공정 질서 구축하고 집단지성의 유기적 인격체 믿어야”

송영한 기자
2016/12/20







2017.7.


[ .....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 ]


2017.7.31.


‘대중독재’의 그림자


오승훈 경제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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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7년 7월, 대통령 탄핵과 재판 국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만에 우정사업본부는 ‘우상화 반대’를 외치는 진보 시민단체들의 압박에 지난해 결정했던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기념사업들도 취소되고 있다.


반면 노무현재단은 2020년까지 서울 창덕궁 인근에 노무현센터를 건립하기로 했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기념관도 조만간 착공에 들어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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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73101033011000001








2020.11.



"이승만·박정희 미래 안목 있었다" 박용진 평가에… "미x새x" 욕 퍼부은 친문들


"교육은 의무 명시한 이승만" "10~20년 뒤를 준비한 박정희" 바른말 하자… 친문들 집단공격



신교근 기자

2020-11-1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는 취지로 재평가하자, 친문(친문재인) 진영에서 온갖 욕설이 섞인 비난이 쇄도했다.


박 의원은 지난 12일 연세대 리더십 관련 강연에서 미래지향적 정치인의 사례로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을 꼽아 두 전직 대통령을 '친일' '독재'의 상징으로 꼽는 민주당에서는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X새X, 뚫린 입이라고 막말" "국민의힘으로 꺼져라"


박 의원은 이날 이 전 대통령을 향해 "초가집으로 학교 지을 돈도 없던 나라에서 교육이 국민의 의무 등이라는 걸 교육법에 명시했다"며 "이는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고,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산업입국의 길을 닦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깔았다"며 "10~20년 뒤를 준비한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에 친문 진영에서는 박 의원의 탈당을 촉구하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13일 친문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클리앙에 따르면, "미X새X가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막말하고 있네" "국짐당에 입당해라. 미친 쁘락치 XX야" "조응천·김해영과 묶어서 탈당당하길" 등의 비난글이 쏟아졌다.


정의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 출신인 박 의원을 향해 "민주당도 이제 정의당 출신은 받지 말아야 한다"며 "정의당 쓰레기들 흑화되는 거 장난 아니다. 정의당이면 일단 믿고 버려야 한다"는 친문 네티즌도 있었다.


민주당 권리당원 게시판에도 "박용진 어느 당 사람이냐" "사퇴해라" "국짐당으로 꺼져라" 등 박 의원의 탈당을 촉구하는 글이 빗발쳤다.



친문 인사들 "이승만·박정희 대단한 듯 말하지 말라" 분노


당 밖에 있는 친문 성향 인사들도 박 의원을 향한 비난에 가세했다.

최민희 민주당 전 의원은 전날 페이스북을 통해 "예끼 이 사람아, 이승만이 미래를 봤다구? 민노당에서 김종인 비서실장까지, 단기간에 이념횡단하더니 이제 박정희·이승만 찬양이냐"며 "변화 속도가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태극기까지 (전향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보다 빠르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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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파 박용진, 백선엽 장군 '애도' 秋 아들 의혹에 '사과'도


박 의원은 최근 민주당을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 김해영 전 의원과 함께 당내 소신파로 꼽혔다. 박 의원은 지난 7월 고 백선엽 장군 타계에 애도의 뜻을, 지난 9월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의 군 복무 시절 휴가 미복귀 의혹과 관련해서는 사과의 뜻을 밝혔다가 친문 지지자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은 바 있다.


이와 관련, 박 의원은 연세대 강연에서 "외롭고 힘들고 욕을 먹더라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또박또박 잘하는 정치인이 되겠다"며 "정치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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