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박정희 1
 닉네임 : 박정희  2022-03-16 15:18:23   조회: 287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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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의 셋째 형 상희(相熙)씨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셨다. 그 당시 이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형 하나뿐이었다.


내 나이 9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형은 벌써 졸업을 했다. 이때 우리 동리에서는 3명이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다른 두 아이는 나보다도 나이가 몇 살 위이고 입학 전에 교회에 다니면서 신학(新學)을 약간 공부한 실력이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3학년에 입학하고 나는 1학년에 입학을 했다.



상모동에서 구미면까지는 약 8km, 시골서는 20리 길이라고 불렀다.

1926년 4월 1일이라고 기억한다. 오전에 4시간 수업을 했으니까 학교수업 개시가 8시라고 기억한다.


20리 길을 새벽에 일어나서 8시까지 지각하지 않고 시간에 대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늦다고 생각되면 구보로 20리를 거의 뛰어야 했다. 동리에 시계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시간을 알 도리가 없고 다만 가다가 매일 도중에서 만나는 우편배달부를 오늘은 여기서 만났으니 늦다 빠르다 하고 짐작으로 시간을 판단한다. 또 하나는 경부선을 다니는 기차를 만나는 지점에 따라 시간이 빠르고 늦다는 것을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기차 시간이 변경되면 엉뚱한 착오를 낼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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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31

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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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먹는 데 그러하였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그의 친구인 한양대 교수 김병희씨가 박의장 방에 들렀다가 놀란 이야기를 쓴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병희씨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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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11579&C_CC=AZ

명동에서 철조망 치고 농사짓는 사나이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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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1960, 70년대 학교에서 매주 한번씩 실시했던 ‘분식의 날’을 언급하며 “보통 보리밥이나 콩밥을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박 전 대표는 메추리알 크기의 감자만 도시락에 가득 담아왔다. 몸소 실천하는 자세와 국민과 함께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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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1100

"박근혜는 학생때도 원칙주의자"
[중앙일보] 입력 200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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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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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하지요. 대표적으로 어떤 게 기억납니까.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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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40796

“5·16은 근대화 혁명이라고 국내학자들도 이젠 인정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200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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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짐 없었던 보리 잡곡밥



박 대통령은 물욕이 없었고 하물며 재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는 분으로, 이 사실은 서거 후 모든 국민이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그 많은 현장 확인과 현장 지도의 길에 항상 박 대통령을 자동타 또는 헬리콥터 편으로 수행하였다. 아마 나만큼 민간인으로서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헬리콥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을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 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 댐과 방조제, 그리고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과 공장들이 늘어나고 대통령 소유 농장의 구조물이 이것저것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박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다.



나는 박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박 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파리가 날아들어 오곤 했는데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

2층 서쪽 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 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 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을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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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454707&ctg=10

<김정렴정치회고록>16. 박정희 대통령의 근검절약

[중앙일보] 입력 1997.05.15








“대통령 아버지가 공무원 월급으로 유학 못 보낸다고 했다”

박근령 이사장 “청와대서 보리밥만 먹어 아직도 잡곡밥 먹어”



조선닷컴 internetnews@chosun.com

200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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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이사장은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으면서도 늘 검소함을 강조했던 일화도 밝혔다. 박 이사장은 “청와대에서 항상 보리밥을 먹어서 지금도 잡곡밥을 먹는다. 어릴 때 흰 쌀밥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고 했다고 기사는 전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나온 박 이사장은 대학 졸업 후 유학을 가고 싶었다고 했다. ‘왜 유학의 꿈을 접었냐’고 묻자, 박 이사장은 “아버지가 ‘공무원 월급으로는 유학을 못 보낸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표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것에 대해서는 “언니는 공부를 잘해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1등으로 졸업하고 장학금 받아 갔다”고 했다.


박 이사장은 “지방에 내려갈 때 추풍령이 가까워지면 아버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할 때 여기가 제일 난공사 지역이어서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그분들 생각하며 묵념이라도 하고 가자’고 하셨다”고 말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박 이사장은 또 “차를 타고 가면서 아버지는 다리 이름, 터널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셨고, 우리가 그걸 다 외웠다. 아버지는 ‘다리 하나, 공장 하나를 건설할 때마다 보람을 느끼셨다’고 했다”고 월간조선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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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1년 다수확 통일벼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영농기술이 향상되면서 1977년 쌀 자급 시대가 열렸다. 정부는 분식의 날도 없애고 쌀 막걸리 제조도 14년 만에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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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직원으로 청와대에 상주하면서 이발을 하기 시작한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권유 때문이었습니까


『1969년 청와대 內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도 마련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간이 이발관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15평 규모의 전용 이발관이 마련된 직후 하루는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시기 위해 저를 찾는다는 전갈이 부속실에서 왔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청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날 朴대통령께서는 이발을 하시기 위해 이발관으로 들어오셔서는 저를 보고 「朴군, 이제 이발 시설도 갖추고 했으니 왔다갔다 하지 말고 이곳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어떤가」고 물어 오셨습니다. 제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대통령께서 재차 「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싫은가」고 하시더군요. 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지시를 받들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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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씨는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운영하던 이발소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는 그날로 이발관 문을 닫아 버렸다고 한다. 朴씨는 이날부터 19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에 맞아 他界하는 날까지 항상 朴대통령 곁에서 생활했었다.



『朴대통령은 싸구려 스킨 로션을 좋아했다』



―朴대통령은 주로 언제 이발을 했습니까


『이발을 하시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이발은 주로 일주일에 한 번, 드라이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하셨는데, 아침 식사를 하시기 전에 하셨고 소요시간은 30분 정도였습니다. 물론 國事(국사)로 바쁘실 때에는 한 달 가까이 이발을 하지 않으신 적도 있습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히 머리 감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뜨거 운 물에 담가 그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른 다음 스킨을 머리에 바르는 것으로 이발을 끝냅니다. 대통령께서는 스킨 로션도 비싼 외제 같은 것은 싫어 하시고 그 당시 국산 중에서도 가장 값이 싼 특정회사의 제품을 좋아하셨습니다. 향기가 마음에 드신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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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이 이발을 할 때 陸英修 여사도 자주 이발관에 오시곤했다는 얘 기를 들었습니다만.


『그랬습니다. 陸여사께서 자주 이발관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朴대통령 머리 만져드릴 수건을 적당한 온도의 물에 적셔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여름에도 절전운동 때문에 이발관에 에어컨을 잘 가동하지 않았는데, 陸여사께서 선풍기를 들고 오셔서 朴대통령에게 틀어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朴대통령은 곱슬머리』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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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씨는 얘기를 하던 도중 한가지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소개해주었다. 신축한 비서실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1966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이때는 전용 이발 공간이 갖추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머리 감을 때 사용하는 샤워 시설이 돼 있지 않아 더운물은 다른 곳에서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이날도 陸여사가 더운물과 찬물을 양동이에 받아와 세면대에 담아 놓았는데 머리를 감던 중 朴대통령이 비눗물에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허리를 다쳐 몇 달을 고생한 적이 있다는 것.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 타일이 부착돼 있지 않은데다 세면대도 낮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는 것.


朴씨는 당시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이처럼 낡은 시설에서 이발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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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께서 이발관을 찾으실 때 정장 차림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얀 러닝 셔츠 차림에다 허리띠를 맨 바지의 윗부분을 한 번 아래로 접고 오십니다. 바지의 허리 부분이 헐렁할 때 허리띠를 맨 부분을 한 번 접으면 어느 정도 맞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의 러닝 셔츠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여러번 봤습니다. 대통령이 구멍 난 러닝 셔츠를 입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갑작스럽게 朴씨로부터 逆질문을 받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냥 계속하시죠」라고 넘겼다)


허리띠도 얼마나 오래 사용하셨던지 구멍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어르신, 이제 허리띠를 좀 바꾸시지 요」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이 사람아, 이것도 아주 편 해. 몇 년은 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朴正熙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상관이었습니까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속실로 하여금 이발하러 가겠다는 연락을 하도록 한 뒤 5분 정도만 늦어질 것 같아도 직접 이발관에 오셔서 「朴군, 지금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래이」 하시면서 양해를 구하십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은 뒤 40여 분 만에 이발을 했는데, 이때에도 朴대통령께서 중간에 이발관으로 오셔서 「미안해서 우짜노. 朴군, 일 마치고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하시더군요. 도리어 제가 미안해 「어르신 저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시지 말고 충분히 집무 보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래 고맙대이」라며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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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reporter/writerboardread.asp?idx=28&cPage=16&wid=soonj

청와대 이발사가 본 「인간 박정희」; 『어르신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송승호 200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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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잡으러 다니는 대통령




박대통령은 무거운 한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하고, 부채질을 했었다. 지독한 대통령이었다. '에어컨은 관광호텔에서 외국 관광객에게 외화를 벌어들일 때나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부속실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워서 에어컨 대신 환풍기를 개조해서 시원한 바람이 돌게 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을 에어컨 켠 것으로 잘못 안 박대통령은 저녁을 먹으면서 근혜씨에게 '오늘 낮에 에어컨을 켰던데 앞으론 절대 못하게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에어컨 대신에 집무실 창문이 열러 있는 때가 많았다. 덕분에 곧잘 파리가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는 대통령을 귀찮게 했다. 그럴 때면 대통령은 파리채를 들고 파리사냥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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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516.co.kr/parkchunghee/humanpark_view.php?seq=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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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전기 절약하세요' ...... 어두워서 한번은 이마를 받은 적 있어요. ......... ]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함께 지냈지만 '말벗' 못 돼…못 배운 나보다 더 불행한 朴 전 대통령"



최보식 선임기자

2017.05.08



[박근혜 前 대통령과 관저에서 지낸 유일한 인물… '청와대 요리연구가' 김막업씨 단독 인터뷰]


"朴, 넓은 관저의 복도에 '전기 절약' 위해 불 꺼

해외 순방 떠날 때도 '전깃불 꼭 끄세요' 당부"

"외부 일정이 없으면 올림머리나 화장 안 해, 머리를 뒤로 묶고 두건 써
세월호 아침 때 미용사 안 와"



"언론에서 '청와대 관저 안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지내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대통령의 '말벗'으로 모든 비밀을 다 알 거다'라며 보도됐어요. 이 때문에 많이 시달렸어요. 저는 배운 게 없어 언론에 나오면 다 믿었는데, 이번에 겪어보니 엉터리 뉴스가 너무 많았어요."


김막업(75)씨는 경기도 수원에 있는 아들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높은 인기를 끌었고 '최고의 요리비결' 등의 책을 펴낸 요리연구가였다. 그런 그가 소리 없이 청와대 관저에서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지내온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마음이 아파요. 함께 지낼 때 그분은 늘 '전기 절약하세요'라고 했어요. 넓은 관저의 복도에 전등을 끄는 통에 힘들었어요. 어두워서 한번은 이마를 받은 적 있어요. 해외 순방 떠날 때도 '이제 좀 쉬세요. 전깃불 끄는 거 잊지 마세요'라며 단 두 마디를 해요. '신경 쓸 일도 많을 텐데 이런 것까지' 하는 마음이 들지요. 그렇게 절약 정신이 있는 대통령이 뭐가 더 필요해 돈을 받으려고 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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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7/2017050701675.htm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함께 지냈지만 '말벗' 못 돼…못 배운 나보다 더 불행한 朴 전 대통령"

최보식 선임기자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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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물통에 벽돌 한 장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이 실천한 근검절약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여름에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당신은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와 부채로써 더위를 견디었다. 겨울에도 난방기 트는 데 인색하여 직원들은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한기와 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 화장실 변기속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게 했다. 그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0.26사건 뒤 청와대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박대통령의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도 벽돌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침실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리가 없는 곳이고 그런 절약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박대통령은 절약을 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서 책상 위 전등만 켜 놓고 일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누가 들어서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입던 양복과 신던 구두를 그리고 넥타이 따위를 측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박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양복을 약간 고쳐 입고 출근했더니 그렇게 흐뭇해할 수가 없었다. 육여사도 입던 한복을 줄여 근혜씨에게 넘겨주었다. 박대통령은 구두의 뒷창뿐만 아니라 앞창에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었다.



박대통령은 사범학교 학생.교사.군인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정리정돈의 습관이 체질화돼 있었다. 허리띠의 바클은 늘 중심에 와 있었고 허리띠의 여분이 길게 나오지 않도록 했다. 회의 때 박대통령이 앉은 탁자 위에는 메모지, 재떨이, 필기도구가 놓인다. 박대통령은 그것들을 직선으로 다시 맞춘 다음에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곤 하였다. 이것이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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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516.co.kr/parkchunghee/humanpark_view.php?seq=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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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이병철의 대화


-월간조선 조갑제, 이동욱 기자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은 1961년6월27일 박정희 부의장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 그는 부정축재자 11명의 처벌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부정축재 제1호로 지목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 것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 앉았다.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전시 비상사태하의 세제 그대로입니다. 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박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이 지금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어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 수만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똑 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해왔습니다.


그들도 모두 11위 이내로 들려고 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기회가 없어서 11위 이내로 들지 못했을 뿐이고 결코 사양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선을 그어서 죄의 유무를 가려서는 안될 줄 압니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윤을 올려 기업을 확장해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하여 그것을 키워온 사람은 부정축재자로 처벌대상이 되고 원조금이나 은행 융자를 배정받아서 그것을 낭비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기업의 자유경쟁이라는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축재자 처벌에 어떠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박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운용, 국민교육, 도로 항만시설등 국가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위축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박 부의장은 한동안 내 말을 감동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의 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미소를 띤 박 부의장은 다시 한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 호텔에서 연금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찾아오더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정축재자 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에 그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거절했다 > ('호암자 부').




박정희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를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차렸을텐데 풀어주지"

"안됩니다. 아직 정신 못차렸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살려야 될 것 아닌가. 우리가 이북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래도 도라무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이석제는 박 부의장의 이 말에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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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8820&C_C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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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 1일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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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자신의 첫 저서를 펴냈다. 1962년 3월 1일에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나갈 길》. 277쪽에 이르는 이 책은 몇 사람의 학자들이 代筆(대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머리말은 박정희의 글이다. 이 글은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 전략과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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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更生(갱생)의 길이 없을까. 이지러진 민족성을 고치고 건전한 복지 민주국가를 세우는 길은 없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無事主義(무사주의), 安逸主意(안일주의)의 생활태도를 청산하여 근면한 생활인으로 ‘인간혁명’을 기하고 사회개혁 통해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길이 없을까 하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다. 설움과 슬픔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이 민족의 앞길에는 반드시 갱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혁명이라는 수술만으로 환자가 元氣(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며 病因(병인)을 도려내는 것만으로 건강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병이 다시 오지 않도록 恒久的(항구적)인 方略(방략)과 기초공사를 해놓아야 한다.



이 길이 어디 있을까. 꼭 있을 것이다. 이 민족의 걸어온 길과 걸어 나갈 길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에 내키는 대로 몇 줄씩 메모하여 정리한 것이 이 책으로 되어 나왔다. 敍述(서술)은 무디고 서투르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단편적이나마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지난날 우리 民族史上(민족사상)의 惡遺産(악유산)을 반성하고 李朝(이조) 당쟁사, 일제식민지 노예근성 등을 깨끗이 청산하여 건전한 國民道(국민도)를 확립하는 일이다. 인간이 혁명되지 않고는 社會再建(사회재건)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농민들의 기나긴 빈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덴마크와 같은 복지농촌 재건을 위해 있는 힘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이해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누적된 빈곤을 하나씩 추방하고 공업화된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자유사회의 존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생존권을 옹호할 수 있는 經濟自立(경제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바로 勝共(승공)의 길이다.



북한집단은 무리한 경제발전을 강요하여 ‘천리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살하는 악독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創發性(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中道而廢(중도이폐)하는 ‘토끼’보다 꾸준히 밀고 나가는 ‘거북이의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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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는 말한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달러로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기준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維新期(유신기)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고도성장과 균형발전을 겸했다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하위)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 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칠레를 빼고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19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19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국정)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下位 40%의 성장률이 전체 평균과 비슷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원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교했다. 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 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의 다른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NP 성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 소득 下位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게도 똑 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성이 강하여 南美式(남미식)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Liberal Authoritarian- 자유지향적 권위주의 지도자



富者(부자)나라가 아니면 民主(민주)국가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있다. 정치학자 아담 프저워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가 만든 통계이다. 1950~199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현재 가치 기준) 이하인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시험했을 경우 그 평균수명은 8년밖에 되지 않았다. 1500~3000달러 사이에선 평균수명이 1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 이상인 민주국가가 전복되어 독재로 돌아갈 가능성은 500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0달러 이상인 32개 민주국가는 단 한 나라도 체제가 붕괴된 적이 없다. 반면, 그 이하 69개 국가 중 39개가 민주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약 56%의 사망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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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現代史는 인류 최고의 업적
이 소책자를 학생들에게 선물 합시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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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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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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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률 40%에 육박. 1인당 국민총생산(GNP) 79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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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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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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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였다.

군사혁명정부는 1961년 8월15일까지 자동차를 만들어 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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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부속품을 조립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라는 이름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은 가구 하나 변변히 생산하지 못할 때였다. 艾씨는 『5·16 전에 우리나라가 가진 기술은 리어카 만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택시와 버스를 만드는 정도였다』고 했다. 새나라자동차에 들어간 국산품 가운데 품질기준을 통과한 것은 한국타이어가 유일했다고 한다.


급하게 만든 만큼 「새나라자동차」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국산 시트의 스프링이 전부 끊어져서, 손님들의 엉덩이를 찌른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산 자동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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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펜」身勢(신세)될 새 學士 二萬餘名 (학사 이만여명)


1960.11.16 경향신문 3면


.... 심각한 취직난에 봉착하고 있으나 문교부는 새학사들의 배출을 앞두고 이들의 취직에 아무런 대책도 마련치 못하고 있다. 다만 각학교에 대하여 직업보도에 대한 알선을 지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년과 같이 문교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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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는 서독 루르 탄광지대로 떠나는 광부 123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인구 2400만 명, 실업자 250만 명, 종업원 200명 이상 기업 54개, 1인당 국민총생산(GNP) 87달러.

가난이 이 땅을 휘감아 호구지책(糊口之策)마저 어려웠던 그 시절. 월급 162달러 50센트(650독일 마르크)는 대졸자까지도 이주 노동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경쟁에 나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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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931427

[그때 오늘] 경제성장의 숨은 주역, 독일로 간 광부들
[중앙일보] 입력 2009.12.20









1965.9. 중앙일보 --- 경제자립



[ ...... 한국경제의 좌표는 「도약단계」 .... 「W·W· 로스토」 교수 ........

...... 60년대 ... GNP대 투자율이 15%이상 .... 산업생산지수가 60∼64년에 걸쳐 64%나 뛰었다 ........ ]



[ ...... 20년, 아니 2백년이 걸린다 해도 이 「자립에의 길」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 .........


...... 「너」「나」가 없는, 단결과 전진을 위한 오늘의 진통을 참고 온 국민이 개발투쟁에 ... 정열을 함께 하는 길이 요청 ........ ]



「경제자립에의 도정」 어디까지 왔나



중앙일보
1965.09.22



아무리 가기 싫다해도 가야하는 길. 갈 수 없대서 중단하면 모든 것이 끝을 알리는 「경제 자립의 길」이다.

이 길을 닦지 않는 한 정치적 독립이 완전할 수 없고 이 길이 황폐해 있으면 사회의 안녕과 복지가 지속될 수 없다.

일제의 피치에서 독립의 제단에 뿌린 선열의 선혈이 그렇고, 해방 20년에 엎치락 뒤치락 뒤바뀐 정권의 교체가 이 길을 찾기 위함이라 했다.


독립을 찾은 지 20년. 위정자들이 다투어 이 길을 닦는다 했지만 경제자립의 터전은 아직도 「후진의 대열」에서 「의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있다.

점감되고 있는 원조액에 한국 경제는 해마다 자율·타율 양면에서 자립을 재촉 받고 있는 현실이며 자립의 이정표는 전에 없이 초조하기만 하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앞길이라 하여 자립의 좌표가 없을 리는 없다.
이 좌표는 모든 선진국이 진통을 겪었듯이 우리에게도 그 고통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자립의 「마일스톤」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방 20년동안 한결 같이 외쳐온 이 「자립경제」의 넋두리가 어디까지 흘러왔으며, 또 어떻게 전진하고 있으며, 어디까지 헤엄쳐 나가면 숨가쁜 현실을 벗어나서 자립의 환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가를 전망해 본다.



공백상태의 원조경제 발자취


1945년 8월15일. 해방된 기쁨의 소용돌이 속에는, 36년간에 걸친 일본의 식민정책이 우리 민족자본형성을 허용치 않아, 일본의 배급제에 목숨을 걸어 놓았던 우리의 생활은 종전과 더불어 거의 공백상태로 들어가야 했었다. 바로 이해에 미국은 패전국에 대한 구호정책을 한국에도 쏟았다.


CARIOA (점령지구행정구호원조)가 4백93만4천불을 증여, 긴급 구호의 약품과 양곡을 풀어 놓았던 일이 미국의 대한 원조의 출발이었다. 46년에는 CARIOA자금 4천9백50만불로 대한구호원조가 본격화 하여 47년에 1억7천5백만불, 48년에 1억8천만불 규모를 유지했다가 49년에는 경제원조의 성격을 띤 ECA(경제협조처)의 발촉으로 9천2백만불로 감소, 모두 5억2백만불에 달하는 전재복구 긴급구호를 받아야만 했었다.


이후 긴급구호에서부터 「달러」로 연명된 한국경제는, 그후 ECA자금 1억9백16만불(49∼53년), CRIK (전시민간구호원조) 로부터 4억5천40만불(50∼55년)을 받아들여 거의 숨쉴 단계에 들어갈 뻔 했었으나 6·25사변으로 다시 침몰 상태에 빠졌었다.


53년 휴전이후 MSA(상호안전보장법)에 따라 방위지원이 개시, UNKRA (유엔한국부흥단) FOA(대외협조처) 자금을 함께 받아 들이기 시작, 다시 ICA, AID등으로 미국의 대외원조기구 개칭과정을 거치면서 480호 잉여농산물 원조까지 합쳐 총액 38억4천8백77만9천불을 무상으로 받아 들였다.


이 미국의 외원추세를 요약하면 45∼50년까지의 구호원조, 51∼58년 사이의 방위지원 및 6·25동란 피해의 복구 및 구호가 병행되었으며 60년대에 들어가서 경제개발원조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 40억불의 원조액이 생산재생산에는 10%미만이 투입되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소비재 도입에 충당되었다. 이는 장기식민지 경제를 바탕한 한국경제풍토가 자본형성의 기간에 앞서 식생활의 위협을 받아야 했고 6·25의 과중한 피해가 소비재 수요를 강요했다는 현실적인 욕구에 기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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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수준면서 본 경제의 좌표 세워



「유엔」에 의한 64년도 세계 81개국의 1인당 국민 총 생산은 「쿠웨이트」가 1인당 3천2백57불14선으로 수위, 최하위는 「이디오피아」의 46불인데 한국은 77불41선 (한은 총계에는 1백7불임) 으로 최하위로부터 15위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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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54개국의 국민소득 분석을 6개 집단으로 구분 ▲ l인당 l천l「달러」 이상의 미국등 15개국이 제l집단 ▲ 제2집단은 1천「달러」∼7백51「달러」로 이태리와 「오스트리아」 2개국 ▲ 제3집단 7백50∼5백1「달러」는「핀란드」등 5개국 ▲ 제4집단 5백「달러」∼2백51「달러」는 일본등 10개국 ▲ 제5집단 2백50∼1백1「달러」는 자유중국등 14개국, 끝으로 ▲ 1인당 1백「달러」이하의 6집단 8개국 중에서는 한국(79「달러」신계열 통계로는 83·8「달러」)이 태국 다음으로 위치했다. 한국보다 뒤떨어진 나라는 「인도네시아」,「파키스탄」,인도, 월남, 「버마」의 순위로 6개국. 같은 피원조국으로 인도나 월남보다 한국이 약간 앞서 있다는데 자위()할 수 있겠지만, 또 64년도의 1인당 소득이 95불로 수정되었으나 어쨌든 1백불 이하의 제6집단을 벗어나지 못하며 2년전 태국의 1백불 수준에도 미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GDP (국내생산) 성장률은 53년∼63년까지 평균 성장률이 4·8인데 1인당 소득 성장률은 불과 2%로 연간 2·8%의 인구 성장률이 한스럽다.

한국의 인구증가율 2·8%는 최고 성장률을 가진 태국의 4·2%보다 1·4%가 낮은 수준이지만 세계에서 제8위에 이르고 있다. 동남아에서는 중국의 3·7%,「필리핀」의 3·l% 다음 제4위에 속하고 있다.



고려되어야 할 국제수지 균형



자립경제수준을 정의하는 뚜렷한 정설은 없다. 「굶주리지 않는 삶」을 자립으로 규정지을 수도 있고 1인당소득 2천「달러」를 넘는 선진국의 수준을 자립목표로 삼을 수도 있듯이 자립의 기준은 그 나라의 주관적 목표설정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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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득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외국의 차입자본이나 외원의존도가 높으면 질적인 면에서 자립의 기반이 튼튼하다고 볼 수 없다.


또 사업구조면에 있어서도 자연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일차산업비중이 너무 높고 공업부분이 빈약하거나 실업률이 높아서도 자립경제의 내용은 충실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소득의 증가와 국제수지의 균형 내지 흑자, 그리고 산업구조와 실업률 문제등이 아울러 고려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과 같은 선진 개발국에서는 완전 고용이란 명제를 경제과제의 지상으로 삼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후진국에서는 증산(소득향상)과 공업화를 개발투쟁의 목적으로 내걸고 있다.



우선 소득 수준면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나라는 l인당 95불, 세계각국의 소득 수준별 분류에 있어서 1백불미만의 최하위「그룹」인 제6집단에 속해 있다. 앞으로 5불 가량만 더 오르게 되면 겨우 최하위 집단을 벗어날 수는 있으나 소득 l백불이상 2백50불미만의 제5집단도 역시 후진국의 「카태고리」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국제경제권에서의 한국경제의 자립수준을 찾는다면 먼저 소득면에서도 중진국 대열인 2백50불이상의 제3, 4집단에 끼어야 한다는 목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초년도(62년)에 84불(신계열계수)이던 l인당 국민소득이 64년에는 95.6불에 이르렀음에 비추어 1차 5개년계획 마지막 고비인 65, 66년을 지나면 제6집단을 넘어설 것은 거의 확실하다.


1차 5개년계획이 집행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자립의욕을 내외에 과시하고 그 의욕을 구체적으로 설계, 실천했다는 점에서 한국경제사상 커다란 의의를 남기게 된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2차 5개년계획을 보다 현실적이고 유효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자신을 다짐하는데 값비싼 경험을 치른 셈이기도 하다.


그러면 2차 5개년계획이 끝나면 우리가 중간적 소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전기한 2백50불 이상의 중진국의 이정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실현키 힘들다고 단정하고 있는 2차 5개년계획중의 연간 경제 성장률 7%선을 비록 달성하게 된다는 확신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2차5개년계획의 마지막 해인 1971년도에 1인상 소득이 1백50불 내외가량이 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국제수지면에서도 64년도의 상품수출 1억2천, 수입 3억6천5백만불에서 입초 2억4천5백만불 이었음에 대비하여 1971년도의 상품수출 5억5천불, 수입 7억9만불, 입초 2억4천만불로 수출은 약 4배, 수입은 2배강으로 결국 상품 무역규모는 확대되는 것이지만 입초율이 상대적으로 줄었을 뿐 그 입초규모는 거의 동일한 수준을 유지한다. 이밖에 무역외수지, 원조, 자본수입등을 논외로 하더라도 2차 5개년계획중에 국제수지는 다소 개선되는 셈이지만 균형단계는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실업률에 있어서도 64년도의 13·8%(l백21만명) 에서 71년도에는 10·3% (1백6만명, 인구증가율 2·8%에서 2%로 점감계상)로 낮아지게 계획되고 있으나 역시 완전고용상태의 과정은 멀기만 하다.



아직 거리가 먼 자립에의 단계


「경제체제내에 지속적인 발전을 내포하고 완숙단계」에 돌입할 수 있는 태세를 자립경제로 정의하는 학자도 있다. 다시 말해서 전술한 「유엔」의 1인당 국민소득분류에 의한 제4집단, 즉 1인당 소득이 2백51불에서 5백불까지의 수준이 그러한「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했다.


한국의 경우 이 「자립에의 길」까지에는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큰 폭으로 상회해야 하고 ▲GNP(국민총생산)의 산업별 구성비율은 현재의 1차산업 37·2, 2차 16·2, 3차 46·6에서 최소한 1, 2차 산업의 구성비가 뒤바뀌어야 하며 ▲국제수지적자가 완전히 불식되어야 하고 ▲13·8%에 달하는 실업률(가용노동력에 대한)을 대폭 감축시켜야 한다는 대전제가 요구된다.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경제의 좌표는 「도약단계」에 이르렀다고 「W·W·로스토」교수 (미국 MIT대학) 가 말했다.


「로스토」교수의 도약단계설은 NNP (순 국민총생산) 에 대한 생산적·투자율의 5%이하에서 10%이상의 상승과 높은 성장률을 갖는 실질적인 제조업부문의 발달에 근거하고 있으며 60년대에 들어서 우리의 GNP대 투자율이 15%이상이라는 점과 산업생산지수가 60∼64년에 걸쳐 64%나 뛰었다는 점을 지적해서 평가한 것이다.


이 「도약」이 자립경제를 지향하고 있다면 「자립에의 길」은 이제 그 이정의 발판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중진국단계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



자립경제의 발판이기도 한 오늘의 도약단계를 벗어나서 중진국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과연 얼마나 걸릴까 이는 도약기간중에 깔려 있는 장해물 제거의 가능성 여부와 이에 소요되는 시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64년도의 1인당 국민소득 95불60선(신계열계수, 구계열은 87불60선)을 2백50불선으로 끌어 올리는데 제거해야 할 장해물과 그 제거기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도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우선 간단한 계산으로 따져 65년도의 1인당 국민소득을 1백불선으로 잡고 연간 l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10%로 설립했을 경우 75년에 가서 2백56불로 계산, 6집단에서 5집단을 거쳐 제4집단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사실상 불가능. 연간 인구성장률 2·8%를 감안하면 실질소득 성장률은 연간 12%선을 넘어서야 하며 이는 53∼62년의 기간중 GNP 평균 성장률 4·8%나 1인당 평균 소득성장률 2%와 비교하면 희망에 치우친 과대의욕이다.


61년도를 기준 연도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집행 중간평가가 GNP계획 성장률 6·5%에 비해 실적은 5·5%로 계획에 1%가 미달되는 부진한 실적을 비쳤고 연간 7%선을 목표한 2차 5개년계획이 계량모형측량에서 「실현성희박」이라는 딱지가 붙어 재조정 중에 있다.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연평균 5%로 간주하더라도 65년 소득액을 1백불로 기준, 70년에 1백27불60선, 75년에 1백63불30선, 80년에 들어 2백9불로 2백불선을 돌파, 다시 제4집단에 들어서려면 5년후인 85년에 가서 2백67불50선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인구 증가율을 연 2·8%에서 2%로 줄이고 GNP 성장률 연 7%선으로 책정,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연간 5%이상의 상승을 강행해야만 앞으로 20년후에 「자립경제의 대로」에 비로소 첫 발을 내 디딜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인구 성장률을 2%로 줄이기 위하여는 치밀하고도 과학적인 가족계획이 필요하다.


GNP를 연간 평균 7%선으로 올리기 위하여는 내자동원범위를 최대한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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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투쟁에 국민적 정열 한데 묶어야…


20년, 아니 2백년이 걸린다 해도 이 「자립에의 길」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 「W·W·로스토」교수의 이론에 의한 각국의 도약기간을 보면 영국 19년, 「프랑스」30년, 미국 17년, 독일 23년, 「스웨덴」22년, 일본 22년, 「러시아」24년, 「캐나다」18년이다.


이들 선진열강의 도약기간이 모두 15년이상 30년 미만이라는 사실은 도약단계의 한국경제를 고무적으로 자극하고 있지만….

눈앞에 가로 놓인 장해물은 하나 같이 전진을 방해하고 있는 현실적인 견지에서 실로 험한 길을 조심스럽고도 한결같은 발길을 옮기지 않으면 「자립에의 길」은 더욱 아득해질 것이다.


잠재「인플레」가 배출구를 찾고 있는 물가수준에서부터 적자에서 허덕이는 국제수지가 그렇고, 힘에 겨운 내자동원과 투기만을 찾고 있는 사금융, 13%에 달하는 1백20만 실업자, 사회 간접자본의 결핍, 낙후된 과학기술등…. 하나 같이 벽을 이루고 「자립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경제는 기적이 없는 것.


하루가 빠져 1년일 수 없고 1년이 쌓여 10년, 백년이 이루어 진다면 「자립에의 길」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기적을 바랄 수는 없다.

이 자립경제를 성취하는데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도약기간중의 장해물 제거에 「너」「나」가 없는, 단결과 전진을 위한 오늘의 진통을 참고 온 국민이 개발투쟁에 관능적 정열을 함께 하는 길이 요청될 뿐이다. 경제부


https://www.joongang.co.kr/article/1000074










朴大統領(박대통령)의 経済学(경제학)


1967.06.28 경향신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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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오프」(跳躍(도약))의 달성은 61년부터 66년까지 1차 5개년 계획기간중의 GNP(국민총생산)의 年平均成長率(연평균성장률)이 8.5%였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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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슬픈 遺産(유산) 『보리고개』 안녕 ]




韓國農村(한국농촌)을 울리는 季節病(계절병) 絶糧(절량)의 봄고개

1965.02.10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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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지고 있으며 보건사회부는 예산확보에 골몰하고 있다.

절량지대의 공통적인 현상은 ① 고리채의발호 ② 離農(이농)·도시집중 ③ 草根木皮(초근목피)의 몸부림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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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참상은 이제 없어졌다 ....... ]



全國實態 (전국실태)


1967.03.09 동아일보 3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참상은 이제 없어졌다고 낙관하고 있다. 과거 日帝下(일제하)에서 우리農村(농촌)의 실정이 비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土地(토지)의 大地主集中化(대지주집중화)...






1967.4.6 경향신문 5면


슬픈 遺産 『보리고개』여 안녕


그 실정



보리고개 없는 마을


해마다 봄이 오면 밀어 닥쳤던 춘궁기 - .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져리게 고달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리고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아무리 높은 보리고개라 하더라도 눈한번 깜박하지 않는 마을들이 있다.

충남 대덕군 유성면 갑동리 2구와 전북 완주군 후동면 구만리 농민들은 보리고개의 괴로움을 모르며 4월의 땅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버림 받았던 자갈밭을 양계부락으로 이룩했고 영농의 근대화로 수익증대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 대덕 완주 = 방길영 이영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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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7040600329204001








1967.12. 엥겔계수 41.5 %


[ .....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 ]


前期比(전기비) 4.3% 增加(증가)

3/4分期家計動向(분기가계동향)



1967.12.14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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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支出内容(지출내용)을 보면 食料品(식료품)비에 지출하는 비율(엥겔係数(계수))이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반면 文化費目(문화비목)인 雜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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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力開發(인력개발) (2) 人力形成(인역형성)


1967.11.13 매일경제 2면


失業者(실업자)가 득실거리는 한켠에서 技術者(기술자)「스카우트」가 성행하는 현상은 経濟計劃(경제계획) 혹은 企業活動(기업활동) 자체에도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가져을지 모른다. 實需要者(실수요자)부담의 ...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1968.02.16 경향신문 3면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철도청의 일류기술자들을 상대로 각건설회사가 스카웃전을 벌이고 있다. 15일 철도청에 의하면 京釜(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은 각건설회사...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1968.01.24 경향신문 6면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工(공) 專女商(전여상) 등 거의 百(백)%나

業體(업체)수요 늘어 卒業前(졸업전) 스카웃戰(전)도



「낙타와 바늘구멍」으로 비유됐던 취직의 좁은문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공업입국정책에 따른 산업구조의 확대로 실업계고등학교 졸업자와 이공계 및 경상계의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이 작년에 이어 현저히 높아져 가고 있다.교문을 나서는 이들의 취업실태를 살펴본다.


취직난 진학난은 졸업기마다 듣는 우울한 이야기. 그러나 취직걱정 따위는 안해도 좋은 우울하지 않은 곳이 있다. 실업고교졸업생들이 바로 그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부분의 실업고교 졸업예정자들은 취업률이 거의 백%에 육박 , 취직당사자들이 직장을 고르고 있는 형편이며 업체나 공장은 오히려 우수한 졸업생을 찾아 학교측에 겸손하게 손을 내밀고 있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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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업체들이 이들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그후 줄곧 의뢰에 응하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 실업고교장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사람이 없어서 못가는 취직난의 이방지대가 분명하다.


상업고교의 경우도 비슷하며 실업계 여자고교의 경우도 취직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무난하다. 서울여상은 진학자와 가정에 들어 가려는 학생을 학교측이 설득해 직장으로 권유할 정도로 사람이 모자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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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 6면


○┉실업고교졸업생에게는 이제 취직난이란 어휘가 실감이 나기 않게 됐다. 작년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취직의 문은 금년에도 계속 넓어져 졸업생의 수가 수요에 따르지 못할지경이라고 각고교의 취직담당 교사들...






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6면


한달 앞당겨마감된 취직戰線(전선)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여자實業校(실업교)등 스카웃손길 치열 되려 求人難(구인난)빚어내... 각업체의 스카웃전 때문에 11월까지는 4백23명의 취직희망자가 모두 직장을 ...







激動(격동)하는 韓國財閥(한국재벌) (1) 프롤로그


1968.07.03 경향신문 2면


一流大學(일류대학)에 대한 立稻先賣式 人材(입도선매식인재) 스카웃戰(전)은 이제 海外留學生(해외유학생)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







돈 (85)


1968.08.22 매일경제 2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째 판금공으로 일하는 李(이)씨(27세)는 T興業(흥업)에 「스카웃」당하여 월 2만3~4천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숙련공이 되면 대개 이정도의 수입은 올린다고 한다. ...








1968.7.10 경향신문



사설


공무원퇴직 격증 문제



공무원의 퇴직율이 작금년에 이르러 유난히 격증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직업공무원제도확립, 제반행정의 안정도문제, 나가서는 국가시책의 유감 없는 말단침투 문제라든지 국민의 일상생활에 까지도 적지 않은 주름살을 가져오게 할 염려를 예견케 하는 일로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9일 총무처 당국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60연도에 1.8%이던 퇴직율이 67년에는 6.5%로 3.7배나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68연도만도 5월말 현재까지 이미 1만2천3백여명의 공무원이 퇴직했다는 것이므로 이대로 가면 금년도의 퇴직율은 작년도의 퇴직율 6.5%선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육공무원을 주로 하는 문교부의 이직자 수가 수위이고 다음은 경찰관을 주로 하는 내무부가, 세째는 철도청과 체신부 등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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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8070900329201008







1969.11.29. 동아일보


공무원퇴직 8.4%

올들어 2만6천 해마다 늘어



박봉과 전직으로 해마다 공무원들의 이직율이 늘어 나고 있다. 29일 총무처 집계에 의하면 금년도 공무원 이직율은 11월 현재 8.4%에 2만6천명으로 작년도의 7.6% 67년도의 6.5%보다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공무원별 이직율은 지방공무원이 3천6백8십7명으로 으뜸이고 다음이 기능직 3천1백7십5명 중고교 교사 1천5백4십8명 국가공무원 7천3십7명의 순으로 돼있다.

이직요인은 가정사정이 3천5백24명으로 으뜸이고 다음이 전직 3천3백5십2명 생활고가 2천3백9십명이다.







1968 GNP 13.1% 성장



[ ..... 최고의 피크에 달한 투자율이 밑받침 ......

건설사업투자 ... 차관기업체의 가동 .... 차관에 의한 자본재수입이 크게 확대 ......



산업구조의 근대화가 촉진 ...... 비농림어업은 ... 68년 19.2%로 .......

제조업부문은 .... 66년 16.1%, 67년 23.9%, 68년은 28.5%로 ... 생산증가율이 박차를 ......



대량소비시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음을 입증 .....


1.21 무장공비의 남침, 푸에블로호 납치 ... 미곡생산의 흉작 등 ....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 ]



1968.12.28. 경향신문



이젠 대량소비시대에

68년 경제성장 13.1%가 뜻하는 것



투자율 24%나 늘어

건설사업 활발 차관업체 생산개시
공비침입 한해 흉작에도 불구


산업구조 많이 변화



지난 한햇동안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증가율은 13.1%에 달함으로써 전환기적인 진통과 경제외적인 도전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유지했다.



27일 한은이 잠정추계하여 발표한 68년도 GNP(국민총생산)는 경상시장가격으로 1조5천7백억원, 65년불변시장가격으로는 1조1천2백54억원으로 당초목표 12.0% 보다 1.1포인트가 높은 13.1%의 성장율을 마크했다.


이와 같은 고도성장은 지난 66년 13.4%의 증가율을 보인 이후 67년에 들어서 8.9%로 떨어져 GNP성장율 증가가 한계에 도달되었다는 평가를 뒤엎은 하나의 반전추세로 풀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도성장의 유지가 가능하게 된 것은 지난 54년 이래 최고의 피크에 달한 투자율이 밑받침된 것인데 지난 한햇동안 투자총액은 경상가격으로 3천8백40억원, 24.5%에 달했다.


투자가 왕성했던 요인으로는 경부 경인고속도로 건설등 건설사업투자가 이 해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차관기업체의 가동으로 생산이 본격화되었으며 외환 사이드에 위기의식을 불어넣긴 했으나 차관에 의한 자본재수입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번 GNP잠정추계에 나타난 산업구조상의 특징은 전년에 이어 농림어업이 점진적으로 후퇴되고 상대적으로 비농업부문이 급속히 증대되는 산업구조의 근대화가 촉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농림어업부문은 쌀생산이 흉작, 산업별 국민총생산증가율 랭킹중 가장 밑자리로 처졌으며 그 증가율은 0.3%. 이와 같은 농림어업의 성장율둔화는 지난 66년의 11.0%를 피크로 하여 지난해에는 6.0%의 부의 성장마저 가져왔고 올해 역시 이 추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농공병진정책이 다급한 과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전체 산업별구조로 보아도 농림어업의 구성비는 전년의 32.0%보다 4포인트가 떨어진 28.0%. 한편 비농림어업은 지난 66년 14.9%, 67년 18.9%, 68년 19.2%로 지속적인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이중 특히 성장의 주축을 이룬 제조업부문은 성장커브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66년 16.1%, 67년 23.9%, 68년은 28.5%로 연간 약5포인트씩 생산증가율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제조업의 성장은 왕성한 소비수준에 따른 수요사이드의 요인과 점진적으로 대량생산단계에 접어든 공급사이드의 요인이 복합됨으로써 적어도 대량소비시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제조업과 함께 지속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 지난 3년동안 연평균 15.5%의 성장을 보여 산업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년의 48.0%에서 50.6%로 늘어났다.


특히 건설업은 지난해의 10.4%에서 올해에는 33.9%로 3배 이상 성장율이 증가하여 주목을 끌고 있는데 고속도로건설 등 대규모 국토개발사업이 추진되는한 이와 같은 성장추세는 그대로 지속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으며 성장템포유지에 주도적인 역할을 당분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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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초 이래 1.21 무장공비의 남침, 푸에블로호 납치 등 경제외적인 불안정요인에 미곡생산의 흉작 등 경제적요인 등이 가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이룩했다는 점은 경제의 성숙과 안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 것은 경제성장의 의지에 대한 어떤 도전에도 면역성의 체질이 배양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새로운 각도로 경제체질이 변모되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969


[ ..... 울산은 ... '기적의 한국부흥' ..... 자립한국이 공업입국의 꿈을 이룩하는 위대한 심벌 ........

..... 한국비료는 .... 연산 33만톤이라는 세계 최대의 규모. ........ ]



1969.6.5. 매일경제


" 기적의 부흥 ...

넘치는 활기 ... "




'기적의 부흥' 속에 아침해가 뜨고 넘치는 활기 속에 하루가 지나가는 건설보 - 그것은 '오늘의 한국'을 구경한 사람들의 거개가 느끼는 감회일른지도 모른다. 지난 4월 16일부터 3일간 워커힐에서 열린 제4회 한일신문편집간부 '세미나르'에 일본측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일본공업신문 편집국장 朝倉金三 씨도 이러한 인상을 가슴에 품고 돌아간 방문객 중의 한사람이었다. 눈부신 발전과 스케일의 방대한 설계, 그리고 한일경제협력에 대한 당당한 우리측의 논진에 압도된 듯한 그 놀라움 - 그의 소견에 의하면 박대통령 영도하의 한국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양언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건설상을 훑어보는 것은 우리의 내일을 위한 자신을 더 한층 북돋워 주리라 믿고 아래에 그 일부를 소개하여 우리의 전진에 더 한층의 활력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펀집자 주]




정부수뇌들도 불철주야로 진력

울산공단지엔 경탄뿐


일본과 어깨 겨루는 고도성장 ... 13.1%




가깝고도 먼 나라 ... 한국의 인상



가깝고도 먼나라, 그리고 활력에 넘치는 불가사의한 나라, 이것이 나의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붉은 흙으로 덮힌 서울교외의 김포공항에 이르기까지 제트기로 불과 2시간의 거리. 일본으로 말하자면 한국이란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외국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일본문자는커녕 한문도 거의 쫒겨나다시피 찾아볼 수 없고 한글 일색 (간혹 영어가 섞일뿐)으로 뒤덮힌 국내 상황. 인텔리 층의 격렬한 대일불신 등이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나서 나는 저윽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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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대의 요소비공장


극단에 가까우리만큼 심한 무역의 입초. 총예산의 25%를 차지하는 국방비, 무역수지의 만성적자, 농림의 부진, 대도시에의 인구집중, 실업자 등 어두운 일면이 있는가 하면 세계 최대인 연산 33만톤의 요소비료공장(한국비료 울산공장), 동양 최대의 연산 1백90만톤의 쌍룡시멘트 동해공장, 도요다(豊田) 미 포드 이 파이아트 등 3개의 합작자동차회사와 항공기의 발착륙이 가능한 서울을 기점으로 전국에 걸친 고속도로망, 서울 시내에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20여층의 고층빌딩, 이밖에도 세계최고의 고도성장을 자랑하는 일본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13.1%의 경제성장률은 모두 밝은 내일을 빛내주는 소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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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상징 울산공단지


한국의 산업시찰에서 역시 주목을 끌게 한 것은 울산중화학공업지대의 놀라운 발전상이라 할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에 박대통령이 공업입지에의 첫삽을 넣기까지는 울산은 인구 3만에 불과한 한적한 어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13만을 옹립하는 도시로 부풀어올라 국제적인 기술수준과 스케일이 큰 근대공장들이 들어서 '기적의 한국부흥'을 이루고 있어 이곳은 자립한국이 공업입국의 꿈을 이룩하는 위대한 심벌이 되고 있다.


그런만큼 경계도 엄중하여 공업지대에 이르는 메인 웨이의 요충은 빼지 않고 헌병들에 의해서 물샐틈 없이 방비되고 있을 뿐 아니라 통행하는 차량마다 멈추어 서서 검사를 받아야 하고 모든 공장의 문어귀마다 가드맨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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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이 울산공업지대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대한석유공사 (미 걸프석유가 95% 출자)가 지닌 석유정제설비는 오늘날 일산원유처리능력 11만5천 배럴이라는 바 실제로는 13만6천 배럴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규모로 미루어보더라도 일본의 중견 클라스엔 뺨을 치면서 끼일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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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몇년 뒤 떨어져 완성된 한국비료는 삼정물산 등 삼정 그룹의 원조에 의해서 동양고압(현재의 삼정동압화학)의 요소기술을 중심으로 연산 33만톤이라는 세계 최대의 규모.
거기에 9만톤의 저장능력을 가진 동양 제1의 창고를 끼고 있다는 장점, 실로 한국비료공업은 세계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느낌이 짙었다.


宇部흥산 회사로부터 카프로락담을 수입해서 나일론사를 만들고 있는 동양 나일론의 플랜트 역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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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9060500099206001








1969.7.1. 동아일보



박대통령 재임 두돌



집념과 의욕의 치적

경제 국방에 전력
확인행정 ... 하루 여행 42km 꼴

개헌 등 결단의 고비




박대통령은 1일로써 취임 두돌을 맞았다.

군정과 5대대통령 재임기간을 합한 전후 6년에 이어 중임임기 전반인 지난 2년은 그의 정치역량을 발휘하고 일을 하는 데에 있어 가장 알차고 중요한 기간이었다. 조국근대화라는 국정지표 아래 그는 '일면국방, 일면건설'의 구호를 내걸고 자주국방과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행정수반으로서의 이런 시정과는 별도로 집권당의 총재라는 입장과 대국회관계 등 정치면에 있어서는 어려운 국면이 적지 않았고, 또 앞으로 어려운 고비도 적지 않을 듯하다. 작게는 '행정부와 국회관계' 같은 문제에서 크게는 지금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개헌문제 등 큰 정치 이슈가 그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박경석 기자 >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으로 경제건설과 더불어 국방력강화를 서두르게 된 그는 그 첫 작업으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야당 등 일부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예비군훈련과 무장은 추진돼 여러번의 공비소탕전에 성과를 거두었으며 대미교섭의 강화로 1억달라의 추가군원 획득과 M16소총공장건설을 보게 됐다.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고도성장과 수출제일주의를 내걸고 공업단지조성 중소기업육성 전력등 기간산업육성 수송망확대와 농어민소득증대사업 농업용수개발 등에 주력했다.


67년과 68년에는 국민총생산이 각각 8.9%와 13.1%의 성장률을 보였고 69년에는 11.7%의 성장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수출은 연평균 신장률이 40%로 67년에는 3억5천8백만 달라, 68년에는 5억 달라를 달성했으며 69년엔 7억 달라를 목표로 잡고 있다.


그가 신념을 가지고 착수한 경부고속도로는 70년엔 완공을 보며 '가뭄을 이 땅에서 영원히 없애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농업용수개발사업 또한 70년엔 매듭짓게 된다. 6월말 현재 162만9천KW로 올해 연말목표를 이미 달성한 전력개발과 농어민소득증대사업의 대규모추진은 높이 평가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밝은 면 이외에 차관정책에 있어서는 원리금상환시기의 대거 도래와 더불어 불안한 요인이 없지 않으며 부실기업의 속출 등 부작용이 뒤따라 정비작업을 단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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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6 15: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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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2022-03-16 15:21:42


1969.10.17. 개헌국민투표



[ ...... 10.17개헌국민투표는 공화당이 총투표자의 67.5% 찬성을 획득, 더블 스코어의 승리 ........

...... 그 찬성률은 우리의 헌정사상 초유의 기록으로 경이적인 것 ....... ]



1967.10.20. 동아일보



무더기 '찬성' ... 뒤엎은 정치'색도'


'촌고도저'는 여전
두드러진 동남고


10.17국민투표의 표분석



10.17개헌국민투표는 공화당이 총투표자의 67.5% 찬성을 획득, 더블 스코어의 승리로 기록됐다.


78.6%의 찬성률을 보였던 62년의 개헌국민투표보다는 11.1%가 떨어지는 찬성률이지만 그때의 개헌은 민정이양을 위한 것이었고 찬반세력이 양립하지 않은 상황 아래서 치루어졌던만큼 예외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인물의 대결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찬반세력이 뚜렷이 양립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번 국민투표를 선거의 범주속에 포함시키면 그 찬성률은 우리의 헌정사상 초유의 기록으로 경이적인 것임에 틀림 없다. 뿐만 아니라 국민투표란 의례히 집권자가 이기기 마련이고 야당은 부정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뭏든 이번 투표결과는 종래의 정치색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총괄적으로 보면 서울을 제외한 10개 시도에서 공화당이 이겨 찬성권화한 것이 우선 특기할 사실이라 하겠다.

< 이강식 도종문 이문조 기자 >



찬성표의 동남고


10.17국민투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울 이외의 모든 시도에서 찬성표가 반대표를 압도한 사실과 더불어 찬성률이 '동남고현상'으로 나타난 점이다. 개표구별로 세분해볼 땐 전남광주갑구가 반대표를 많이 냈지만 전체적인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고 동남부 끝에 위치한 부산이 56.7%로 겨우 과반수선을 넘었으나 이 또한 대도시란 점으로 봐 다른 각도에서 평가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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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표와 농촌표


이번 국민투표는 이미 67년 선거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여촌야도'라는 전통적인 득표성향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도시는 야당'이라는 종래의 관념을 깨뜨리고 대도시는 서울과 광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당 성향을 보였으며 소도시들은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도시의 찬성율은 농촌에 비해 67년선거 때와 비교해 월등히 낮고 대다수소도시는 주변 농촌보다는 찬성율이 낮아 '여촌야도'의 바탕은 찬성율의 측면에서 보아 '촌고도저'의 현상으로 유지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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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소도시에서는 67년 선거때보다 더 많은 여당성향을 보였으나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는 여야간 표차를 줄여 평준화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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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민의 조선일보



[ ..... 서울에서 거의 백중이었다는 것이 의외 ......

..... 지방도 광주, 그것도 광주 전체가 아닌 갑구에서만 야당이 조금 리드한 것을 빼면 완전히 참패 ....... ]




[ ..... 이번에 매스미디어는 개헌 지지세력이었다고 봐야 ......

...... 포천에서 야당의 부총재인 유진산 의원이 유세를 하는데 불과 11명 밖에 안모였어. .......

..... 서울에 근대화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따라서 현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 수가 늘었다 ...... ]




1969.10.19. 10.17 민의 조선일보



10.17 민의

그 심판을 지켜보고

본사기자 방담



유세 득표에 영향 못줘
서울 백중은 연구과제

도시의 기권표 분석해볼 필요있어




개헌안은 압도적 찬성표를 얻어 확정되었다. 지방에서의 다수표는 그렇다 하더라도 서울에서 백중세를 보인 것은 공화당도 신민당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


엄청난 표차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의 7.25 담화 이후 양성화 되어 9.14 국회통과를 거친 개헌국민투표운동과정이 어떠했길래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득표결과는 어떻게 풀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이 앞으로의 정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개헌확정후 여야당의 몸짓은 어떻게 달라질까? 개표상황판 앞에서 본사기자들은 그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나는 것을 털어놔 보았다.



예상 모두 엎은 찬표


A= 개헌찬성이 압도적이야, 그런데 결과는 좀 의외야. 공화당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B= 특히 서울에서 거의 백중이었다는 것이 의외였어.

H= 일반적인 전망은 서울은 반대가 더블 스코어로 예상했고 부산 대구 전주 등 대도시에서도 반대가 다만 얼마가 많아도 많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처럼 통했는데 이것이 뒤엎어졌단말야. 지방도 광주, 그것도 광주 전체가 아닌 갑구에서만 야당이 조금 리드한 것을 빼면 완전히 참패했으니 ....

C= 애당초 공화당에서는 득표율하한을 54% 정도로 잡고 60% 정도만 되면 만족이라고 생각했었지.

D= 청와대에서는 63% 내지 64%를 최고로 보았어.

C= 서울 표수를 올리겠다는 생각이 개헌추진세력한테 있었지만 4대6만 되면 성공으로 생각했던 것
아냐?

E= 서울의 경우 기권자의 성분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권을 반대라고 보면 찬성이 서울 전체 유권자의 25% 정도야.

G= 기권을 찬성으로 보느냐 반대로 보느냐 하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 아니겠어?


매스미디어는 지지?


A= 그건 그렇고 이번에 유세가 주효하지 못했다고들 얘기 하는데 그건 뭐야.

D= 아마 유세가 득표에 미친 영향이 1할도 못되는 것 같아. 공화당이 과거 어떤 선거때보다 조직력을 동원, 이잡듯이 작전을 전개했으니까.

B= 양편이 각각 5백회 정도 유세를했는데 유세에서 접촉할 수 있는 사람수란 실제로 얼마 안되거든.

C= 그렇게 되면 조직과 자금을 가진 쪽이 우세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지.

G= 이번엔 매스 미디어가 방관만 했어도 사정은 퍽 달라졌을걸?

H= 이번에 매스미디어는 개헌 지지세력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A= 신문의 전면 PR은 종전에 없던 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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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혀든 전력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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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개헌에 관한 명분론으로 봐도 영구집권이다 4.19가 어떻다 하는 것이 잘 전달이 안돼요. 유세에서 상대하는 사람수가 원체 적거든, 포천에서 야당의 부총재인 유진산 의원이 유세를 하는데 불과 11명 밖에 안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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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서울의 백중은 거의 처음 있는 얘기야. 앞으로 두고두고 연구과제가 될거야. 그리고 서울에 근대화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따라서 현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 수가 늘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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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찬성 반대 무효 찬성률

전라북도 77.4 568,007 288,816 44,850 63.0
전라남도 82.7 1,100,640 399,220 57,680 73.4
경상남도 83.1 954,032 295,498 39,127 73.9
경상북도 84.8 1,387,750 386,514 59,189 75.7
서울특별시 60.7 756,776 814,521 42,283 46.9








1970.1.5. 경향신문 사설


사설


눈부신 경제성장의 고령에 서서

- 남북통일의 물적기반을 정비하자




60년대의 결산


대망의 70년대의 입문을 세차게 두들기는 손과 손 마음과 마음.

2,3차 5개년계획을 매듭짓고 5백달러의 국민소득과 30억 달러의 수출목표를 달성하고 계속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보장하면서 균형된 사회개발 속에서 풍요한 국민생활과 이를 통한 남북통일에의 조건완숙과 세계로 뻗어가는 민족중흥의 내실을 약속하고 서로 맹세한 70년대가 어김 없이 4천만 동포의 안전에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60년대에 쌓아 올린 건설의 피땀을 결정하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김일성 집단의 온갖 음모와 도전에 대하여 국토통일로 응수하고 사상 박정희 시대의 신화를 구상화 하는 새 시대의 새 시련을 맞이한 것이다.


회고컨대 1,2차 경제계획으로 시종한 지난 10년 동안 방대한 생산시설과 조직, 사회간접시설의 확충, 유통시설과 체계의 개선, 과학기술의 고도화, 기업의 경영관리조직의 훈련강화 등에 의하여 기적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경제성장의 추이를 보건대 1951년 - 61년은 4.8%이던 것이 62년 - 66년은 8.5%, 67 - 69년은 12.5%로 점승하고 있다. 사실상 작년도로써 중요사업은 거의 끝났고 여유 있는 조정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늘 우리들이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주요경제지표를 보면, 일인당 1백95달러의 GNP, 7억 달러의 수출, 5억2천만 달러의 외환보유, 95%의 재정자립달성을 비롯하여 연간 10%를 약간 상회하는 소비자물가추세, 5%의 실업율, 3백50만톤의 시멘트, 163만kw의 발전시설용량, 1백9억톤의 총화물 수송량과 2백67억인의 총여객수송량,11만대의 자동차 보유, 43만2백명의 전화가입자, 5백62만명의 취학아동, 천명당 80명의 신문 구독자 등으로 국력의 성장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이제 전래의 실의 좌절감 퇴영은 서서히 물러가고 근대화에의 전진속에서 민족의 위신과 존엄을 되찾아 경제주권을 공고히 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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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0010500329202001







1970.1. 조선일보 사설



[ ...... 중진국 중에서도 가장 상위권에 올라선, 완전한 자립경제 .......

..... 찬란한 민족의 중흥을 위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전폭적으로 호응할 것을 .......

..... 더 이상 우리가 이 찌든 가난과 오욕의 역사를 되씹고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 ]



1970.1.6. 조선일보



사설


70년대 경제의 과제


- 60년대의 후유증부터 씻고 넘어가자




민족중흥을 다짐해온 대망의 70년대의 새 아침이 밝았다. 이 한 십년이 저물 무렵에 이룩될 것이라는 찬란한 조국의 미래상에 가슴 벅차 오름을 느낀다. 중진국 중에서도 가장 상위권에 올라선, 완전한 자립경제가 달성될 것이라는 한십년의 여명에 서서, 우리도 위정자가 호소했듯이 온 국민에게 그와 같이 찬란한 민족의 중흥을 위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전폭적으로 호응할 것을 소리높혀 외치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우리가 이 찌든 가난과 오욕의 역사를 되씹고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 ... 정체와 퇴영을 강요해 온 구래의 멍에를 또 다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 씌워줄 수는 없는 것이라면, ... 비록 또 한십년의 고된 가시밭길을 헤쳐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발전의 길을 택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영과 영광은 결코 저절로 굴러 오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것은 피와 땀으로 스스로 쟁취할 수 밖에 없다. 민족의 중흥은 민족 모두의 피와 땀의 총화로써만이 달해질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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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19. 김신조 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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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을 집어먹은 禹 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 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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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88673

경찰이 맨몸으로 무장한 공비에 수갑을 채우다!
46년 전 오늘, 무장공비는 청와대로!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 | 최종편집 2014.01.20







1968


[ ...... 서울은 판잣집일뿐더러 농촌농가의 항아리는 거미줄이 쳐져 기아에 .........


...... 농가에 내려가서 밥을 훔쳐 먹을때 따뜻한 이밥이 언제나 있었고 항아리에는 곡식이 가득 ........

...... 화전민이라는 농민들이 북한에서는 신사같은 옷을 ........... ]




김일성의 기만알았다 자수공비 조응택 회견


[중앙일보] 입력 1968.12.14




무장공비잔당 가운데 지난7일 아군작전부대에 자수해온 북괴군124군소속 중위 조응택(24)은 14일상오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이 동족을 학살하라고 살인마 되기를 강요, 민족의 분노를 느껴 자유대한으로의 자수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조는 북괴124군3기지 1중대1소대3분대소속 소환으로 지난11월초 울진지역에 침투한 60명조와 함께 상륙했다가 지난달 1월11일과 15일·27일 3차례에 걸쳐 아군합동작전부대와 교전, 15명조중 9명이 죽고 단독분리되어 헤매오다 아군작전부대에 자수해온 최초의 공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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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수동기는


답=김일성선전으로는 남한의 생활상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서울은 판잣집일뿐더러 농촌농가의 항아리는 거미줄이 쳐져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들었다.

그나마 침투된후 배가고파 농가에 내려가서 밥을 훔쳐 먹을때 따뜻한 이밥이 언제나 있었고 항아리에는 곡식이 가득했다. 또 화전민이라는 농민들이 북한에서는 신사같은 옷을 입고 있어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김신조가 직접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을 듣고 자수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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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비들의 양민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나

답=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라는것이 지령이었다. 동족을 무차별 살상하니 민족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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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유대한의 느낌은

답=자동차가 너무 많아 전차까지 철수될 정도니 듣던 것과는 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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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18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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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신혼생활을 하던 나는 안해(아내)가 밤일을 하면 아침밥을 내가 하였는데 정량대로 밥을 한 다음 안해의 두끼 분 밥을 푸고 나의 점심밥 변또(도시락)를 싸고 나면 나의 아침 밥이 반 그릇도 못되었다.


그것을 다 먹고 난 다음 냠냠해서 변또밥까지 다 먹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는 빈 변또를 들고 출근할 수도 없고 또 집에 가자니 안해가 알 것 같아서 그 빈 변또 보자기를 집밖에 감춰놓고 출근하였다. 그런 날은 물론 점심을 굶었다.



700이라는 배급 기준량을 타먹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그 절반의 기준량을 받는 노인들이나 가정부인들의 고통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러한 적은 모자라는 배급량도 70년대에 와서는 절약한다고 보름에 2일분을 잘랐고, 80년대에는 다시 기준량을 더 줄여 700이 600도 못되게 만들었다. 90년대에는 배급날짜가 되어도 배급을 안 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식 사회주의는 배고픈 사회주의로부터 아사식 사회주의로 구걸식 사회주의로 전변되었다. 이것도 성과라면 당연히 김일성의 주체농법의 성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배급제도하에서 자기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선택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북한인들은 게걸증이 들어 항상 먹었으면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모든 북한인민들은 항상 식전이다. 마치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의 골목들을 누비고 있는 갈비뼈가 앙상한 북한의 개들과 같이 식욕의 포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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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부는 1968년으로 보았다.




1969년 정보부는 북한의 경제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을 처음으로 벌였다. 그때 북한국장이던 강인덕(康仁德)씨(현 극동문제연구소 소장)가 지휘자가 되고 경제과장이던 정(鄭)모씨가 실무책임자가 되어 특별반을 편성, 심도 있게 북한의 국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공개된 자료와 정보부에 축적된 자료분만 아니라 외국에서 북한제 트랙터·기계류·공구류 등 현물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 기계·공구류는 공법연구소 등에 맡겨 전문적 평가를 하도록 했다. 외부의 평가팀을 과학기술자7 : 경제학자3인의 비율로 조직하여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깊은 연구가 되도록 하였다.



1970년 말에 끝난 이 북한경제력평가에 약2년간 동원된 인원은 안기부, 국방부, 정부연구소, 민간연구소 등 1천명쯤 되었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작업을 통해서 북한경제의 문제점뿐 아니라 북한체제를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인 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74년 신직수(申稙秀)정보부장은 이 종합평가를 「남북한경제력비교」란 아홉 권(약7천 페이지)의 책으로 발간하여 관련 부서에 나눠주었다. 아직 학계나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비교는 북한의 시설이 1백%의 가동률을 보인다는 가정하에서 이뤄졌다. 실제가동률은 그보다 훨씬 밑돌고 있으며 최근에는 생산성의 격차가 더욱 커져 철강생산성의 경우 북한은 남한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9∼1970년의 「정보부-북한경제력평가」는 그때 경제관료들이 알고 있던 북한경제력이 상당히 과장돼 있음을 밝혀냈다고 한다.



정보부의 평가는 1970년의 남한국민총생산은 75억5천만 달러, 북한은 29억2천만 달러, 1인당국민소득은 남한이 2백23달러, 북한은 2백9달러로서 남한이 벌써 압도적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기획원과 통일원은 1인당국민소득이 북한을 앞지르게 된 연도를 1974년으로 보고 있는데 정보부는 1968년으로 보았다. [주: 그러나 국제적으로 알려진 잠정통계수치는 169(남) : 266(북) 달러로 알려져 있다. 실제와 수치간에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는 것이다.]



정보부의 평가서는 또 북한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중화학공업 우선 투자정책」이라는 견해를 냈다. 군사목적의 중화학공업육성책을 추진하면서 1940년대 식의 낡은 설비와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경공업을 무시한 채 막대한 고정투자를 했으므로 생산성이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경공업을 먼저 일으킨 바탕에서 외국의 최신 중화학공업기술을 도입하는 전략을 채택하여 1970년대부터 압도적 생산성으로써 크게 격차를 벌여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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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경제개발의 신화를 가꾸었던 김정렴 (金正濂.74.전대통령비서실장) 씨는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에 대한 집념은 단순히 경제차원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통일, 정치적 민주주의와 인권까지 모두 경제에서 나온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기에 사실 그의 통치철학 전부나 마찬가지" 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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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가 되어야 한다 ........ ]


[.....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 ]


[..... 우린 그때 다들 미쳤었어요. 밤낮으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 ]





국운을 좌우한 위대한 선택


이근미 (자유기고가)



GNP 82달러의 세계최빈국



수입대체냐 수출주도냐, 60년대 초 우리나라는 두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은 두 정책, 그러나 이중 하나에는 한 국가의 명암을 가르는 중요한 열쇠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열쇠를 쥐어야 문이 열릴 것인가 그 선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출주도 정책은 한 마디로 위대한 선택이었으며 결코 놓쳐서는 안될 귀중한 카드였다. 우리나라는 귀중한 카드를 쥐기 위한 위대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지금 선진국문턱까지 왔다.



61년, 5.16 주체세력들이 빈곤타파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을 때만해도 그것은 아득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당시 상황은 1인당 GNP 82달러, 수출 4천1백만 달러로 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외국 자본들이 점점 철수를 하고 5.16 세력에 불만이 많던 미국마저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선언, AID(미국 국제개발국)가 지원하는 각종 미국측 원조자금이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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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공팀과 최고회의가 예산문제 외에 또 하나 중요한 마찰을 빚었는데 바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문제였다. 최고회의뿐만 아니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의 입장도 수입대체 쪽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석유 비료 철강 등 원자재는 물론 쌀 보리 등 생필품의 상당부분까지도 수입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당장 수입대체가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국무역협회에서 발간한 「무역의 날 30년사」에는 50년대 상황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농산물 위주로 이루어짐에 따라 정부는 이를 활용하여 밀가루 섬유 설탕 등 소위 삼백산업을 중심으로 수입 대체적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구호물자를 원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이들 산업이 노동집약적이고 저수준의 기술이 요구되며 국민경제적 필요성이 크다는 점에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입대체적 정책으로 인하여 50년대 전체의 수출액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아 2천만 달러 내외에 그친 반면 수입대체를 위한 기계류 및 원자재수입과 농산물 수입등으로 수입은 3~4억 달러에 달하여 무역수지 적자폭은 연간 3억 달러를 상회하였고 이는 미국의 원조자금에 의하여 대부분 충당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유원식씨(최고회의 재정위원장)등 최고회의 핵심 주체세력들은 수입대체산업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 속에 종합제철 공장 건설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공업을 먼저 건설하여 수입대체를 해야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연 우세했다.



이에 대한 상공부의 의견은 우선 비교우위가 있는 경공업을 육성하여 수출산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수입대체와 수출 중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상공부는 이 결정을 앞두고 일본 시찰을 다녀오는 등 여러가지 검토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철강수요는 약 10만t이었고 공장을 세운다면 30만t의 규모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갔으나 막상 일본에 가보니 상황은 예상과 딴판이었다. 최소한 1백만t 규모가 아니고서는 종합제철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30만t은 뒷골목 대장간 수준에 불과한 지경이었다.



상공농사(商工農士)만이 살길



박충훈 상공차관을 비롯한 상무팀이 박정희 의장 앞에서 브리핑을 한 끝에 수입대체보다는 수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공부에서 수출을 강조하면서 박의장을 설득한 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철강공업을 예로 들자면 막대한 투자로 건설한 공장이 수출산업으로서 국가 경쟁력이 없으면 지탱해 나가기 힘들다. 그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수출하지 못할 경우 국내에서 국제시세보다 훨씬 비싼 물건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야 한다. 수출을 안하면 외화를 벌 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필요한 물자를 사올 수 없다. 그렇게되면 어쩔 수 없이 저개발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수출 지향적 경제는 전향적이고 적극적인데 비해 수입 대체형은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수출제일주의는 자유기업, 시장경제 원칙과 자유민주주의 창달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박의장은 자신의 통솔 목표와 일치한다며 상공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릿고개를 타개하고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하려면 원자재를 들여와서 가공수출을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상공부의 의견에 전적인 찬성을 표했다.


『박대통령을 따라 기차편으로 지방 순시를 간 적이 있어요. 기차 안에서 박대통령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나라에는 사농공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공이 상을 앞서 공상농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박대통령이 그 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무엇하느냐, 팔아야 되지 않느냐, 그러니 역시 공보다 상이 앞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박충훈씨는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고가 수입대체가 아닌 수출제일주의를 채택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그가 수출전략의 최선봉에 서서 지휘를 하였을 것이라고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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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유고 점점 줄어


당시 세계적인 추세는 수입대체 전략 수립이었다. 2차대전 이후 인도가 수입대체를 당면목표로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철공장을 짓는 등 경제부흥의 기치를 내걸어 경제개발의 시범케이스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수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일로 비쳐졌다. 사실상 상공부도 수출이 안될 때를 대비한 방안이 전혀 없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공무역을 한다지만 수출이 안되면 원자재 값은 어떡할 것인가, 한 치 앞을 기약할 수 없을 때였다.



수출주도로 정책이 결정이 되었으나 결정을 하였다 하여 산적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수출할 물건을 만들 자금이 문제였다.
당시 우리나라 외화획득의 주 수입원이라고 해봐야 천연자원 수출과 미8군과 관계되는 사업이 전부였다.


『미8군내에 건설, 물품, 용역 등 세분야의 군납을 따내 외화를 벌어 들였는데 현대의 정주영씨가 건설공사를 따내서 4,5천만 달러, 한진의 조중훈씨가 용역을 따내 3,4천만달러를 벌어들였죠, 미8군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의 수입이 중요한 외화 벌이가 됐을 정도니 외화벌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상상이 갈 겁니다』


당시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선씨(현 문기상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의 회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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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만이 살길입니다』



박충훈 당시 상공장관은 재임용되어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에게 상공정책에 관하여 설명을 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수출 제일주의를 국가의 최중요 정책으로 삼고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각하께서 총사령관으로 진두 지휘해 주셔야 합니다. 격려도 해주시고 애로도 타결해 주셔야 합니다』

갖가지 난관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서 최고지도자가 강력한 힘으로 뒷받침해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박장관이 건의를 올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쾌히 응낙을 했다.

박대통령은 그날의 약속을 성실히 지켜 상공부에서 수출지원책을 내놓으면 웬만한 것은 대통령 이름으로 받아들여져 일사천리로 시행되곤 했다. 정부조직법상 윗자리에 있는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에서 상공부가 내놓은 시책의 뒤치다꺼리나 하느냐는 불평이 있을 정도였다.



상공부 장관 시절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회고하는 박충훈씨는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을 의식한 탓인지 자신은 수출 엔진에 시동을 건 사람 정도로만 비쳐달라고 주문한다.

『박대통령이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참모자에 불과했습니다』


오원철씨는 당시 분위기를 딱 한마디로 표현했다.

『국시는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공업입국이었죠』

외환보유고 겨우 9천3백만 달러로 빈털터리가 되기 직전, 수출하지 않으면 외화를 벌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뛰었다고 덧붙인다.



박장관은 대통령에게 수출 목표를 1억 달러로 약속하고는 상공부 취임식에서는 1억2천만 달러로 늘려 발표했다. 그만큼 분발하자는 의도였다. 상공부의 수출진흥책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무역업무에 대한 애로 타개와 장려책이고 둘째는 수출품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책이었다.

우선 잠시 중단되었던 수출입 링크제와 소요량 증명에 의한 기술소득제도를 부활시켰다. 수출입 링크제는 공산품 수출을 촉진시켜 우리나라 공업화의 기폭제 구실을 하게 한 제도이다. 당시 이 제도를 발판 삼아 현재의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도 있다.



내가 책임지겠다



당시는 항상 달러가 모자라 수입이 이권화 되다시피 했다. 환율이 1백30대 1이었을 때 1달러분의 물건을 수입하면 1천원이 되는 품목도 있었다. 수입허가만 받으면 당장5~6배의 장사가 되던 때였다. 당시는 수입을 하려면 반드시 상공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수입달러를 배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출입 링크제란 바로 수출한 사람에게 수출액의 1백%에 해당하는 수입권을 주는 제도였다. 다만 어떤 물건이건 다 수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무역계획에 책정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다.


당시 가장 수출을 많이 한 합판을 예로 들자면 90%가 원자재이고 가득액은 10%밖에 안되는데 1백%의 수입권을 주는 것은 부당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많았으나 상공부는 그대로 강행했다.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수출품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고용을 늘려, 그로 인해 초기단계에서 국제시장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산품을 수출하면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얼마 되지 않은 국내자본이나마 공업분야로 몰릴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약간의 적자 때문에 수출을 못하던 품목도 제도 때문에 수출을 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수출기반이 약한 공산품의 수출에 도움이 되었다.



소요량 증명이란 기술소득제도로서 원료를 들여다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때 거기에 드는 원자재 수입을 인정하고 관세를 면제해주는 제도였다. 예컨대 원자재 열 개를 들여와 제품을 만들었을 때 알뜰하게 하여 두 개가 남았을 경우 그 두 개에 대해서 기술소득이라 하여 면세를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재료가 덜 들도록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엄밀히 따져 위법이었다. 박대통령이 『내가 책임질 테니 그대로 시행하라』는 말에 힘입어 시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수출한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더욱 수출을 늘리게 하는 한 방편이었다.

박충훈씨는 이 제도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어느 특정인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시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상공부는 64년부터 매년 수출진흥 종합시책을 마련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당시 시책을 살펴보면 외화획득 기업의 수출소득과 수출활동에 대한 사업소득세 및 법인세 및 법인세50% 감면, 수출용 원자재에 대한 수입관세 면제, 수출금융의 특별 저리지원, 해외시장 정보의 수집 및 시장개척을 위한 무역진흥공사(KOTRA)와 중소기업을 위한 무역협회 산하 소액수출 전담회사인 고려무역 설치, 수출품 생산업체의 육성, 수출유공업자(생산업체의 기능공 기술자 세일즈맨 포함)에 대한 국가 상훈법에 의한 훈장포상 수여 등이 있었다. 수출진흥 종합시책 16개목표 중 제3항의 목표는 이런 것도 있었다.



무엇이든 내다 팔아라


「수출하여야만 이익이 된다는 상식을 무역상사 및 기업가가 갖도록 무역행정을 집행한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들에게 수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출에 대한 인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수출이야말로 돈 버는 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수출에 매달렸죠. 그저 국내시장만 생각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수출 장려제도를 보고 너도나도 무엇이든 팔려고 애썼어요. 가장 큰 소득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수출 장려제도가 전 국민에 널리 퍼진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다고 박충훈씨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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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때 모두 미쳤었다』



마침내 1964년 12월31일 10시경 1억2천만 달러의 수출목표가 달성되었다. 수출대금이 1억2천90만 달러가 입금된 것이다. 5개년 계획이 끝나는 마지막 해인 1966년에 1억1천7백50만 달러를 수출할 계획이었는데 목표가 2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바로 7개월 전 경제개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 시름에 잠겨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저녁 늦게까지 수출통계 숫자를 집계하여 수출목표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리던 박대통령에게 목표 돌파를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전 직원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사무실에서 만세를 불렀다. 통행금지가 거의 다 되었을 때야 비로소 퇴근을 서두른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우린 그때 다들 미쳤었어요. 밤낮으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위에서부터 이래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었죠. 최고지도자께서 적극 지원하니까 모두들 신이 나서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신바람이 나야 성과가 큽니다. 정말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박충훈씨는 그 신바람의 근원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지원과 신뢰였다고 말한다.



『당시 상공부는 환상의 팀웍을 이루었어요. 복지부동이라는 말은 상상도 못했죠. 며칠씩 밤을 새는 건 보통이었어요. 퇴근시계가 땡 하면 퇴근하는 공무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우르르 달려나가 막걸리를 마시며 사기를 북돋웠죠. 선후배 관계가 아주 돈독했죠. 소신껏 일하라고 격려해 주었을 뿐 위로부터의 압력이란 없었어요.


그리고 인사가 아주 공정했어요. 낙하산 인사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 결원이 생기면 평소 일 잘하는 직원을 눈여겨보았다가 서로 데려 가려고 했죠. 여름에는 아예 퇴근도 안하고 책상에서 잠깐 눈붙이고 나서 다시 일어나 일했습니다. 그때는 뭐랄까 어떻게 보면 너무 설치는 분위기 였어요. 모두들 열에 들떠서 신들린 듯이 일했습니다』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상씨의 회고이다. 당시 최상의 콤비플레이를 벌였던 사람들은 상역 사이드에는 차관보, 김우근 국장, 심의환 상공과장, 문기상 진흥과장 등이었으며 기술계통으로는 오원철 공업1국장, 엄익호 공업2국장, 안영철 섬유과장, 이상섭 중화학과장, 류각종 경공업과장 등이었다. 문기상씨는 똑똑한 계장들이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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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상씨와 박충훈씨의 회고에는 공통적으로 신바람이라는 얘기가 들어 있다.


『우리는 그저 정책을 세워 주관해 나갔을 뿐이고 국민들이 국가의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열심히 따라준 덕분이지요. 그리고 첫째 국가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확고했고 우리나라가 융성기에 접어들어 운이 크게 따랐던 것도 사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충훈씨는 그 당시의 감격이 아직도 새롭다고 전한다.



박대통령 야전사령관 자처



1964년 수출진흥 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전담하는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를 설립한 데 이어 1965년부터 수출진흥회가 개최되었다. 애초에 이 회의는 국무총리가 주재했었다. 제1회 회의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주재하에 중앙청에서 열렸으나 제2회부터 청와대 응접실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하에 회의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수출진흥 확대회의로 개칭됐다.


김정렴씨는 제1차 경제개발 계획추진에 있어 국가원수가 계획사업 하나하나를 항상 챙기고 정부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애로를 타개하도록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점이 성공의 지름길이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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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연평균 26.3% 증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 된 66년 말 수출은 2억5천만 달러를 달성하고 연말 외환보유액도 2억4천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1차 연도 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2차 5개년 계획에 석유화학공업과 종합제철이 핵심적 사업으로 결정되었으며 1973년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수출은 64년부터 92년까지 연평균 26.3%가 증가, 같은 기간 중 대만의 20.9%보다 높은 증가세를 유지해 왔다. 64년에 1억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이 71년에 10억달러, 77년에 1백억 달러, 81년에 2백억달러, 85년에 3백억 달러, 88년에 6백억 달러를 돌파하는 수직상승세를 이루어 드디어 지난해 1천억 달러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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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무원들의 충성, 투철한 열의에 놀랐다. 대통령의 지시가 장관에 떨어지면 ...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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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국의 고속 경제성장의 비결을 발견한 듯했다. 공무원들의 충성, 투철한 열의에 놀랐다. 대통령의 지시가 장관에 떨어지면 장관은 바로 해당 간부회의를 열고 담당 차관보, 국장, 과장, 사무관들은 그때부터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지식이나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헌신적 노력, 열의라는 것을 인식하게 했다.”


구본호 전 울산대 총장은 1970년대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 시절 옆에서 지켜본 공무원을 이렇게 회상하며 우리가 고속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 ‘공무원의 열의와 충성’을 꼽았다. 한국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압축 성장을 하면서 빠르게 근대화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밤낮없이 조국에 헌신했던 공무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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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2.1.


수출 1억 달러 돌파 감격의 눈물 흘린 박정희

“ 봐라, 되지않나 … 이제 시작” …


“라면 만들 돈 좀 구해달라” JP 설득한 전중윤의 배짱, 서민 굶주림 해결에 큰 공헌



[중앙일보] 입력 2015.07.3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4> 박정희와 수출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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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한국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깃발을 내걸었다. 62년 1월, 목표연도(66년)까지 수출을 1억1750만 달러로 늘린다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61년도 수출액이 겨우 4200만 달러였으니 1억 달러 수출은 꿈 같은 일이었다.


64년 12월 1일 박충훈 상공부 장관(훗날 국무총리 서리, 대통령권한 대행)이 박 대통령에게 “어제 날짜로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 소식에 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봐라, 하면 되지 않느냐. 이제 시작이다”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장래를 내다보는 리더가 앞장서서 이끌어나간 결과였다. 수출 1억 달러를 기록한 11월 30일은 ‘무역의 날’로 제정됐다.



그때부터는 부가가치 높은 제품을 수출해 돈을 벌자는 의욕이 한층 높아졌다. 65년부터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매달 열렸다. 이 회의엔 정부와 여당을 비롯해 경제단체와 금융기관·종합상사·연구기관까지 100명이 넘게 참석했다. 수출 전망과 증대 방안을 보고받고 수출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방안을 도출하는 자리였다.


회의가 끝나면 대통령은 회의장 주변에 진열된 수출상품을 일일이 살펴보며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이어서 오찬을 함께하며 기업인들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기업인을 중히 여겼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전통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기업인들을 가장 선두에 세워 우대했다. 명분을 앞세우는 사(士) 위주였던 한국 사회에서 실용의 기업가 정신을 앞장 세운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낡은 의식구조를 뒤집자는 것이 바로 5·16 혁명의 정신이었다. 요즘엔 그 기업가 정신이 다소 쇠퇴하는 듯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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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2.5. 제1회 수출의 날



[ ..... 박정희 대통령의 목소리는 감격에 떨렸다. ......

행사장은 환호와 기쁨의 열기로 가득했다.


‘수출실적 1억불 돌파’ ‘오늘의 수출 내일의 번영’ ‘수출늘려 자립하자’ ......... ]


[ ..... 나라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 ]


[..... 업체와 근로자들도 ‘수출해야 먹고산다’는 신념과 자부심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일했다 ........ ]




1억 달러 수출탑의 감격 - 1억 달러 기적에 온 국민 목 메었다



▣ 출처 문화일보 ▣ 글=백상진기자



“오늘 우리는 평소의 숙원이던 억대수출을 달성했습니다. 최근 수년간 수출증진이라는 국가지상의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정부와 경제계, 그리고 일반 국민이 비상한 각오로 수출증진에 온갖 정력을 경주한 결과입니다.”


1964년 12월 5일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수출의 날 행사. 사상 최초의 수출 1억달러 달성과 ‘수출의 날’제정을 치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목소리는 감격에 떨렸다.


수출유공자와 정부, 무역협회 관계자들로 가득 메운 행사장은 환호와 기쁨의 열기로 가득했다. ‘수출실적 1억불 돌파’ ‘오늘의 수출 내일의 번영’ ‘수출늘려 자립하자’ 등의 구호가 기념식장에 내걸리고, “지혜와 땀방울을 함께 쏟아서 모두가 뛰어난 우리 제품을 만들자, 내보내자, 벌어들이자. 번영에의 외길은 수출뿐이다”라는 ‘수출의 날’노래가 울려퍼졌다.


수출 1억달러 달성의 의미는 컸다. 6·25전쟁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온 우리나라가 수출주도형 공업화 발전전략을 굳혀 수출입국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이웃나라 일본이 수출 54억달러였고, 필리핀·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가가 5억~6억달러, 심지어 북한이 2억달러가 넘었다.



수출을 총괄했던 박충훈(2001년 사망) 전 상공부 장관은 회고사에서 “자나 깨나 수출에만 골몰했고 직원들도 미친듯 신나서 일했다”며 “새로 수출할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저 물건을 어떻게 하면 수출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큰 노심초사였다”고 회고했다.


그해 12월 31일 오후 10시쯤 우리나라는 목표액 1억2000만달러(입금베이스·결제기준 1억1900만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은 ▲원료별 제품, 즉 의류와 직물 등 공산품 4200만달러 ▲잡화류 900만달러 ▲기계류 200만달러 ▲화학제품 100달러 ▲식료품 2500만달러 ▲비식용 원재료 3200만달러 ▲광물성 연료 2500만달러로 1차상품과 경공업 제품이 주류를 이뤘다. 수출시장도 일본 등 동남아지역 중심에서 미국, 유럽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상공부에서 경공업 수출을 진두지휘했던 오원철(77) 전 공업1국장은 “장관으로부터 공업제품의 수출을 총책임지라는 특명을 받고 조직을 수출체제로 전환해 죽어라고 뛰었고, 생각도 뛰면서 했다”며 “얼마나 힘들었던지 밤에 술마실 때 ‘사랑의 노래’를 ‘수출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부를 거예요’라고 개사해 불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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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수출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고, 열어주고, 독려했다면 상품을 팔아 달러를 벌어온 것은 역시 수출업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출의 날 포장과 표창을 받은 20개 업체가 단연 빛나는 주역이었다.



당시 수출실적 1위였던 삼호무역을 비롯해 천우사·영풍상사·동명목재상사·성창기업·판본무역·삼성물산(이상 대통령식산포장), 한국합판협회·대한방직협회·한국해태수출조합·한국생사수출조합(〃 대통령단체표창), 삼도물산·대성산업·천양산업·금성산업·대평산업·금해산업·이천물산·대흥광업·극동철강공업(〃 국무총리표창)이 수출 유공자로 선정됐다.


이들 업체는 상훈법에 따라 67년부터 전년도 수출실적이 전전년도 수출실적을 하회하지 않는 경우 ‘청색무역업자’로 분류돼 관세의 담보를 전액 면제받고 세무사찰을 전면 완화하는 특혜까지 받았다.



60년대 중반부터 섬유·직물류를 수출했던 ‘동국무역’ 백영기(72) 전 회장은 “대통령이 수출업체에 대한 지원과 독려를 아끼지 않았고 업체와 근로자들도 ‘수출해야 먹고산다’는 신념과 자부심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일했다”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수출을 급신장하도록 이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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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억달러 달성에 ‘여전사’들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1963년) 제조업 종사자 40만명중 섬유공업이 11만명이었는데, 거의가 여공들이었다. 오 전 국장은 “너무나 가난해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뿐이었던 시절 여자들이 길쌈하고 삯바느질해 만든 제품을 부자나라에 팔았다”며 “수출 1억달러 달성은 젊은 처녀들의 가냘픈 손끝으로 이뤄낸 기적”이라고 말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상공부에서 수출진흥 업무를 주로 담당했던 신국환(무소속·전 산업자원부 장관)의원은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7년)을 추진하기에 앞서 수입대체형이냐, 수출주도형이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며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의장께서 ‘수출로 가자’고 마지막에 결론을 내려 개발파·수출파가 승리하고 수출1억달러를 달성하자 나라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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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紙의 가슴을 적시는 박정희 관련 기사 한 토막


[[From February 1965 until his assassination in 1979, President Park Chung-hee attended nearly every monthly meeting of the country’s export-promotion committee, sampling products and rallying businessmen over lunch. He cried when South Korea’s exports exceeded $100m in 1964, declaring a national holiday known as “export day” (later renamed “trade day”).〱Welcome to the Jungle, The Economist Dec 5th 2019〉


1965년 2월에서 1979년 弑害(시해)당할 때 까지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 수출 진흥위원회 월간회의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여 생산품들을 살펴보고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기업인들을 격려하였다. 대통령은 1964년에 한국 수출액이 1억 달러를 초과하였을 때 울었다. 그리고 “수출의 날”로 알려진 이 날을 국경일로 선포하였다.(後에 “무역의 날”로 재 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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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1.30. 동아일보 사설



[ ...... 무역전쟁의 시대 ........


무역전쟁에서 이기자고 한 것은 우리의 국가목적과 국민의 진로를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서 높은 평가를 .......



수출이냐? 죽음이냐? 양자를 택일하여야 .......

남북대결에 있어서도 무역전쟁에서 모든 승부를 결정 ........



기업인이 모리배라고 멸시당하고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무역전사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아야 ........

국민들의 성원이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 ]




무역전쟁에서 이기자



대통령은 지난 28일 부산에서 열린 생산기업인대회에서 '이 시점은 바야흐로 무역전쟁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동시에 기업인들의 수출의욕과 생산품의 질적향상을 촉구한 것은 기업인들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다같이 되새겨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국가간의 번영경쟁이 제2차대전을 계기로 하여 무력전적 양상으로부터 경제전쟁의 면모로 바뀌어지고 있는 것은 뚜럿이 눈에 띄어지고 있으며 경제전쟁은 무역전쟁에 의하여 싸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그러기에 무역전쟁에서 이기자고 한 것은 우리의 국가목적과 국민의 진로를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서 높은 평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국민생활 수준을 남들보다 낫게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남들과 같은 수준에까지 올리지 못하는한 정부나 국가의 존재의의까지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을만큼 경제번영과 국민생활수준향상에의 요청이 다급해진 이때인만큼 대통령의 그 연설은 '언즉시야'라고 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자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도 지금 무역경쟁을 사투하고 있거든 하물며 자연자원이 빈곤하기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한국에서 수출이냐? 죽음이냐? 양자를 택일하여야 한다고 한 대통령의 주장은 털끝만큼도 과장이 없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도 물론이다.


특히 휴전 이래 우리의 대공투쟁은 경제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 누가 경제를 더 잘 번영시키고 누가 더 잘 사느냐 하는 경쟁에서의 승부가 모든 분야에 걸친 판가름을 낼 것도 환한 사리에 속한다. 물론 남북대결에 있어서도 무역전쟁에서 모든 승부를 결정한다는 것도 소연한 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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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업제품에 있어서 북괴 상품이 남한 것과 비교조차 안된다고 함에 다툴 여지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거니와 북괴의 시멘트가 국제시장(향항)에서 5불 내지 8불(톤당)밖에 못받는데 남한 것이 11불50선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북괴제 선반(견본)이 아무리 싸다 하더라도 자유국가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등을 헤아려서 북괴의 중공업제품(기계) 역시 문제시 할 것이 못된다는 견해는 씹어 볼만한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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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도 북한도 자연자원에 있어서 빈곤하다는 점에 있어서 피장파장한 것이 실정이니 북괴경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외국의 자연자원에 의존 않을 수가 없을 것이며 수출진흥 이외에 원료와 산업시설(자본)을 장만할 수 있는 방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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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진흥은 외국상사들과 불을 뿜는 경쟁에 이기지 않고서는 안될 노릇인데 사유재산제와 이윤을 부정당하고서 수출시장을 개척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극난한 작업이란 것에 다툴 여지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의 수출경쟁의 라이발들은 자유국가군이 안될 수 없으므로 우리 기업인들은 자유국가의 수출상들과 겨루는 전사로서 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정부가 수출진흥에 특별한 시책을 안할 수 없는 것도 그런데 까닭을 두고 있는 것이고 기업인이 모리배라고 멸시당하고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무역전사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아야 할 이유도 그러한데 있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은 그 책임의 일반은 기업인들 스스로가 져야 하겠으나 정부와 국민 일반의 인식 부족에도 일반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찰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무역전쟁에서 이기자고 한 것은 단순한 구호로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수출에서 이길 수 있는 정부의 시책과 기업인의 노력과 국민들의 성원이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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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략은 1964년 11월 30일 1억달러 수출을 이룩하면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64년 말엔 1억2000만달러를 수출해 43.2%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해마다 40∼50%의 수출 성장세를 이어간 우리 경제는 1968년엔 3억5859만달러를 수출, 1960년(3283만달러)의 10배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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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돈 꿔달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 ]



“박 대통령, 경제 살려 차관 갚겠다며 눈물로 지원 호소”




1964년 12월 8일 서독의 수도 본에 있는 에르하르트 총리 공관. 3년 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과 ‘전후 독일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르하르트 총리 간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 중이던 군사정부는 미국의 차관 거절로 자금이 부족했다. 우여곡절 끝에 광부와 간호사 7000여 명을 긴급 모집해 서독에 파견하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박 대통령) “각하, 우리를 믿어주세요.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우리도 독일처럼 분단국가입니다. ‘라인강의 기적’처럼 경제를 살려서 갚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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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두 정상 간 대화는 박 대통령 통역관으로 수행했던 백영훈(80·사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이 통역했다.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집무실에서 만난 백 원장은 “그때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돈 꿔달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며 “에르하르트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니히트 바이넨(그만 우세요)’이라고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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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일행은 그 다음날 본에서 쾰른까지 20㎞ 구간을 아우토반을 이용해 이동했다. 이 구간은 1928년 착공해 32년 완공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였다. 박 대통령이 탑승한 벤츠 승용차는 시속 160㎞로 달렸다. 큰 충격을 받을 만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도중 두 번이나 중간에 차에서 내렸다. 장기영 부총리, 이동원 외무부 장관, 이후락 비서실장도 따라 내렸다. 아우토반을 자세히 살펴본 박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좋죠? 히틀러가 했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힘든 일입니다. 그 시절이나 가능했지….”


박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승한 서독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처음 건설계획 수립부터 건설 방식, 관리 방법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통역관이 전해주는 답변을 손수 메모하기도 했다. 백 원장에게 “우리가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한국에 가서 실현할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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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아우토반을 달려 본 지 2년4개월이 지난 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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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원장은 한독 경제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독일 정부로부터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G20 회의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참석한 걸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며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대한민국의 고단한 역사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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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285826

박 대통령, 경제 살려 차관 갚겠다며 눈물로 지원 호소”

[중앙선데이] 입력 2010.07.02

경부고속도로 출발점 한서독 정상회담서 통역 맡았던 백영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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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유지공업체를 인수해 삼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무렵 남대문 시장에서 ‘삼양라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시장 바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떠올린 전중윤은 ‘새로운 식품개발’이라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쿠데타정권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JP(김종필)를 통해 박정희에게 라면 샘플을 전달하고 라면 제조기 1대를 구입할 돈 5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외화는 총 16만 달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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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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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흔히 들을수 있는 소리 가운데 엿장수의 가위소리와 머리카락장수의 소리가 있다. 나른한 여름 오후, 동네 개들마저 졸음에 겨워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땐 머리카락 장수의 구성진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

『고장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

이들이 지나가고 나면 조금 있다가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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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머리카락을 원모상태로 수출했습니다. ......

....원모 수출을 금지해 주시면 됩니다 ........]



[...1964년에 처음 수출되었다. 1만 4,000 달러 어치였다. 1965년도는 155만 달러로 .....

... 1970년에는 약 1억 달러로...총 수출량의 9.3%를 점했다.....의류와 합판 다음으로 제3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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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초여름, 나는 박장관을 수행하여 면회장소인 구(舊) 상공회의소 2층 간부회의실로 갔다. 그 날 면회 신청자는 5명 정도였다.


첫 번째 면회자는 서울통상의 최준규(崔俊圭) 사장이었다. 당시는 중소기업자였는데, 나는 그때 처음 만났다. 최사장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상한 물건을 내 보였다. 나일론실 같은 것을 수십개 묶어 한다발로 한 조그마한 물건들이다. 길이는 담배 길이 정도일까. 색깔도 여러 가지여서 순백색부터 조금씩 황색기를 띤 것, 순황색, 갈색까지 50~60종이 되었다.



최사장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장관님, 이것이 가발 원료입니다. 이것으로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자는 건의를 올립니다. 박장관은 신기해서 만져보았다. 사람의 머리카락 같지가 않았다.
최사장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 머리카락은 검은 색 아닙니까. 그래서 우선 탈색을 해서, 순백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각종 색으로 염색하는 것입니다. 이 물건이 바로 염색한 우리나라 머리카락입니다.



햇볕에 반사하여, 반짝이는 우아한 색깔은, 검은 머리카락만 보아온 나의 눈에는 이것이 머리카락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최사장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머리카락을 원모상태로 수출했습니다. 원자재로 일본에 판 것이지요. 가발을 만드는 것은 완전히 수공업적 작업입니다. 여자가 손끝으로 머리카락 하나 하나를 꿰매야 합니다. 지금 일본이나 홍콩에서는 가발 제조 붐이 일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한발 늦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저렴한 인건비로 맞선다면 충분히 경쟁이 가능합니다. 수출가득액도 거의 100%입니다. 인모 수출하는 것보다 가발로 만들어 수출하면 2~3배의 수출증가가 됩니다고 말했다.



박장관은 신기하기도 하고, 수출이 된다니 흥미가 커진 듯했다. 그래서 얼마나 수출할 수 있소 하고 물었다.

가발은 과거 선진국에서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흑인여성에게도 인기입니다.


흑인여성이 노란 가발을 쓴단 말이오

아니지요. 흑인은 검은색 가발을 씁니다. 결국 미장원에서 소비하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자는 것입니다. 수요는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박장관이 최사장, 무엇을 도와줄까요하고 물으니, 최사장은 단지 원모 수출을 금지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이때가 우리나라 가발공업의 출발점이다. 박장관도 나도 가발은 아직 보지 못했을 때이다. 그 날 처음으로 가발 만드는 원료를 보았을 뿐이다.


가발은 1964년에 처음 수출되었다. 1만 4,000 달러 어치였다. 1965년도는 155만 달러로 거의 100배에 이르렀으나, 액수로는 크지 않았다. 가발업체는 7~8개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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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액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1966년 1,062만 달러, 1967년 1,978만 달러, 1968년 3,055만 달러, 1969년 5,336만 달러, 1970년 9,357만 달러로 급증했다. 1970년에는 약 1억 달러로 우리나라 총 수출량의 9.3%를 점했다. 단일품목으로는 의류와 합판 다음으로 제3위가 됐다.

물론 가득액에 있어서는 단연 톱이었다. 이때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가발장사를 했다. 미국 내에서 가발 하면, 코리안을 연상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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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가발 수출

저자 오원철








[ ..... 아침에 눈 비비면 나왔습니다.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잠들었고요, 휴일도 없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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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은 박 대통령이 수출 드라이브를 걸 때였죠. 남대문에 코트라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다보면 수출목표액과 달성액이 전광판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수출 많이 하면 애국자 대접을 받았습니다. 밤새서 일하는 데 보람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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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1972년에 한세실업의 전신인 한세통상을 세웠다. 당시 나이 28세였다.


"아침에 눈 비비면 나왔습니다.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잠들었고요, 휴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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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12.22. 수출백억달러 기념식




'1백억불 수출은 겨레의 저력 과시'


1977.12.22



'1백억불수출은 겨레의 저력과시'

박대통령 치사 장충체육관서 성대한 기념식
전진의 발걸음 계속

80년대엔 평화통일기반 굳혀
유공자 총7백76명 포상



「자립의지의 승리」로 표현되는 수출1백억달러달성 기념식이 22일 상오10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출유공자등 약7천4백여명의 수출관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충체육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 기념식에서 박대통령은 1백억달러 달성에 공이 많은 다액수출상사, 유공기관 및 유공근로자에게 억불탑과 유공기, 산업훈장과 포장 등을 수여하고 그동안 시련과 도전을 이겨 민족중흥의 획기적 이정표를 마련한 그들의 업적을 높이 치하했다. <관련기사 7·9·10·11면>



이어 박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1백억달러 목표를 당초 계획보다 4년이나 앞당겨 이룩한 것은 『수출입국의 목표 아래 굳게 뭉쳐 국력배양에 노력해온 성과』라고 지적하고 세계적 자원난과 경제불황등 갖가지 역경을 극복, 선진국보다 짧은 기간에 달성한 기록을 세웠다고 격려했다.


박대통령은 1백억달러 수출은 물량의 크기뿐만 아니라 『겨레의 무한한 저력과 가능성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와 보람이 있다』고 강조하고 이제 우리가 만든 상품이 5대양6대주로 뻗어나가 국위를 떨치고 있다고 선언했다.


또한 박대통령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새역사창조의 막강한 추진력이 되고 있다고 강조하고 1백억달러의 자랑스러운 고비는 넘겼으나 『전진의 발걸음을 잠시도 늦추지 말고 남보다 더 머리를 쓰고 더 부지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보다 앞서 박필수 상공부 상역차관보의 개회선언에 이어 신임 최각규 상공부장관은 1백억달러를 달성하기까지의 경과를 보고했으며 각종훈장과 포장이 수여될 때는 만장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날 수상자는 산업훈장45명,포장43명,대통령표창80명등 도합 7백76명에 이른다.


또한 올해 최고상을 수상한 정희영 현대조선사장은 전수출산업인을 대표하여 『수출1백억달러 달성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교훈삼아 앞으로 자립경제의 민족대업을 완수하는데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수출진흥선서를 낭독했고 창문여고합창단과 공군군악대의 수출의 노래를 끝으로 기념식은 1시간만에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


1백억불 수출의 날 치사


1977-12-22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

전국의 기업인과 근로자 여러분 !


드디어 우리는 수출 1백억불을 돌파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민족중흥의 창업 도정(道程)에 획기적 이정표가 될 자랑스러운 이 금자탑을 쌓아올리기 위하여, 그동안 우리는 한덩어리가 되어 일하고 또 일해 왔습니다.

자주ㆍ자립을 향한 우리 겨례의 집념은 그 어떤 시련도, 도전도 물리친 것입니다.


그동안 불철주야 헌신해 온 전국의 산업역군, 그리고 수출 유관기관 임직원과 특히 오늘 수상의 영예를 차지한 기업체와 수출 유공자 여러분의 노고에 대하여, 나는 충심으로 치하와 격려를 보내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돌이켜보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던 1962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은 겨우 5천여만불의 미미한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농수산물과 광산물 등 1차산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5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단일 업체가 6억불 수출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1억불 이상을 수출한 업체만도 17개사가 넘는 등, 엄청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당초 목표를 4년이나 앞당겨 1백억불 수출을 무난히 실현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일찍이 ‘수출입국’의 목표 아래 굳게 뭉쳐서 국력 배양에 노력해 온 성과입니다.



세계 경제대국의 하나로 불리고 있는 서독이 수출 10억불에서 1백억불에 이르는 데 11년이 걸렸으며, 일본도 1951년에 10억불이었던 그들의 수출고를 1백억불로 끌어올리는 데 16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1970년부터 7년이 걸렸을 뿐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국토의 면적과 인구가 우리보다 클 뿐 아니라, 세계경제의 호경기 등 유리한 여건 속에서 1백억불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단된 국토에서 호전적 침략주의자들과 대치하면서, 세계적 자원난과 경제불황 등 갖가지 역경을 극복하고 이와같은 성과를 올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룩한 이 1백억불 수출은 비단 물량의 크기에서뿐 아니라, 겨레의 무한한 저력과 가능성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와 보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네 차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오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의 중화학공업은 선진국 수준으로 착실히 확충되어 가고 있으며, 우리가 만든 상품들은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 세계 도처에서 국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을 비롯하여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진출한 우리 건설역군과 원양어업 종사자들은, 현지의 익숙지 못한 기후 조건 속에서도 구슬땀을 흘리며 우리 겨레의 기상을 세계 속에 심고 있습니다.


전국 고속도로망의 건설과 치산치수에 역점을 둔 국토개발계획의 진척 등으로, 이제 해마다 대풍(大豊)의 수확을 거두고 있으며, 도시와 농촌은 1일생활권을 형성하면서 고루 잘살기 좋은 나라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근면ㆍ자조ㆍ협동의 새마을 정신은 우리 국민생활 속에 뿌리를 내렸으며, 온 국민은 가슴 속에 넘치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야말로 새 역사창조의 막강한 추진력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 온 국민이 힘모아 키워온 국력은 이처럼 물질면에서 있어서나 정신면에 있어서나 커다란 변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중흥을 이룩하려는 우리 앞에는 아직도 많은 과제와 시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1백억불 수출의 자랑스러운 고비를 넘어섰다 할지라도, 오늘의 이 시점은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출한국’의 또 하나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렇다 할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 형편으로 볼 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자원난이라든가, 과거와는 달리 우리나라를 새로운 수출 경쟁국으로 의식하면서 보호무역의 장벽을 쌓고 있는 세계경제의 현황 등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새로운 결의와 분발을 다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진의 발걸음을 잠시도 늦추지 말고 남보다 더 머리를 쓰고 더 부지런하게 노력해 나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80년대에는 고도산업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족중흥의 발판을 반석같이 다져 놓아야 합니다.

이 목표를 차질없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더욱 강화하는 일이 급선무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 위주로 과감히 개편하고 기술혁신을 촉진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는 기술의 대외 의존도를 차차 줄여 나가면서, 독자적 기술개발에 주력하여 수출상품의 다양화와 품질의 고급화, 그리고 기술집약적인 두뇌산업 육성에 총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때입니다.


또,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생산과 건설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가발전의 제1선에서 헌신하고 있다는 드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견지하고 맡은 바 직분에서 더욱 창의를 발휘하고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기업인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공기(空器)가 바로 기업임을 명심하고, 기업활동에서 얻은 이윤은 다시 국가사회 발전에 되돌린다는 투철한 기업윤리를 생활신조로 삼아야 하며, 종업원의 처우개선과 복지향상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기업인과 종업원이 서로 돕고 아끼며 가족과 같은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일체감을 북돋아 나가는일이야말로 우리나라 공장 새마을운동의 정신이며, 또한 우리의 수출산업이 난관을 뚫고 세계무대로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고 확신합니다.


국민 여러분도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해서 행여 무절제하고 낭비하는 생활, 안일하고 나태한 생황에 흐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근면, 성실하고 검소, 절약하는 강건한 기풍을 국민생활의 미덕으로 삼아 나가는 데 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이 국민적 경축의 식전에서 나는 그동안 우리 국민 여러분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오직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땀흘리며 매진해 온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가슴 벅찬 감회를 누를 길이 없습니다.


이 기쁨과 보람은 결코 기적이 아니요, 모두가 국민 여러분의 고귀한 땀과 불굴의 집념이 낳은 값진 소산입니다.


기나긴 민족사(民族史)의 소중한 한 시대를 일하고 또 일하면서 살아온 우리 세대의 땀에 젖은 발자취는 자손만대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끝으로, 그동안 일신의 안락을 돌보지 않고 증산에 힘써 온 모든 근로역군, 기술인, 기업인들과 중동지역을 비롯하여 멀리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건설역군, 의료진, 원양어업 종사원, 그리고 수출일선에서 일해 온 모든 기업체 및 관계기관 임직원과 공무원 여러분의 헌신적 노고를 나는 다시 한번 위로하며 높이 치하하는 바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의 이 기쁨과 보람을 민족 웅비(雄飛)의 도약대로 삼아 줄기찬 전진을 계속합시다. ◎









1977.12.22. 조선일보



수출 백억불


보호무역의 파고속에

'세계'를 헤친 '한국호'




기적 일으킨 과욕


"백억불 목표는 '3대 웃음거리'의 하나였는데 ... "

50년대 2천만불 보따리 장사에서 시작
한땐 3억불 수출만 되면 자립한다고도



........................................................................................

- 71년인지 미국이 우리나라의 대종수출품목인 섬유류를 수입규제하자 우리나라 수출신장은 끝장났다고 정부 스스로가 비관론을 폈었지요 .... .


" 사실 그랬읍니다. .......

그러나 업계는 미국의 수입규제조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섬유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품질을 고급화해서 여전히 총수출비중의 35%를 점유하는 대종품목으로 키워나가고 있읍니다. "


- 지난 73년 정부는 '중화학선언'과 함께 수출 1백억달러 달성목표를 비롯한 경제비전을 발표했는데 그때 모두 '쇼'라고 웃었지요.


" 그때 업계 언론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 '3대 웃음거리'가 있다고 꼬집었읍니다. 첫째는 상공부가 제창한 81년 수출 1백억달러, 둘째가 경제기획원의 1인당소득 1천달러, 세째는 교통부가 경부철도를 전철화 시켜 2시간 30분내로 주파토록한다는 것이었읍니다. 모두들 웃고 또 웃었지요. 하기야 1백억달러계획을 세운 상공부 실무자들까지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의욕과잉이 아닌가고 의구심을 품었읍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국제인플레 덕이기도 하지만 수출 1백억달러가 당초 목표연도보다 4년 앞당겨 달성됐읍니다. 64년 1억달러 이래 13년만에 수출이 무려 1백배나 늘어났읍니다. 기적 같은 현실이 나타난 것입니다. 국민과 업체가 총화체재로 일사불란하게 노력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도별로 본 증가


자원빈국엔 성장의 젖줄


62년후 평균성장률 42%로 세계 1위

중진국으로의 발돋움 주도 .... 국민의 35% 종사

초기엔 농산물 ... 올해는 공산품이 91%




우리나라의 수출이 1백억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사에 새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정부가 수출제일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첫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던 지난 62년의 수출 실적은 5천6백만달러였다. 2년뒤인 64년 11월30일 수출이 1억달러를 마크했다. 정부는 수출 1억달러를 기념하여 이날을 '수출의 날'로 책정했다. 한국경제가 비로소 성장의 돌파구를 찾았다고 해서 요란하고 떠들석한 수출의 날 기념행사가 베풀어진지 만 13년이 지났다.


이제는 수출이 1백억달러-. 수출실적이 제1회 수출의 날 이래 무려 1백배나 늘어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재정통계는 한국이 국별 수출증가에 있어서 세계 제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62년 이후 우리나라의 연평균수출성장률은 42%. 세계무역증가율 17.8%의 2.2배에 이르고 있다. 대만의 28%, 일본의 20.8%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비약적인 수출신장으로 산유국을 제외하고는 세계17위의 수출국가로 군림하게 되어 중진공업국의 기반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랭킹17위의 수출국가로 비약함에 따라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세계무역량중 한국의 비중은 1억달러 수출이 기록됐던 지난 64년 겨우 0.08%에 지나지 않았으나 올해는 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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