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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리 시인의 『은모래』
하동 갔다 돌아온 가방에서 쫘르르
은모래가 쏟아진다
가을 섬진강변을 살짝 걸었을 뿐인데
언제 가방에 묻어 따라왔을까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님도
여인의 살갗처럼 부드럽다고 하셨던 다사강(多沙江)
강물은 강 속에 남겨두고
내 희미한 안방에 싸르륵 모래소리 부려놓는
이 은빛 사장을 나는 쓸어내지 못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오늘도 누군가의 음모에 파문 진
내 마음을 종이배처럼 떠내려 보내고
버석거리는 쓸쓸함 갈대꽃처럼 나부끼다 돌아온다
어떻게 발자국 짚어야
무너지지 않는 모래성이 될까
움켜질수록 빠져나가는 것들과
만진 적 없는데도 따라오는 것 사이에
잔금 많은 내 손바닥 펼쳐져 있어
여기까지 따라온 한 움큼의 은빛 강변을
밤늦도록 거닐어 본다.
‣ 하동을 다녀간 시인의 심사가 사뭇 혼란스럽다. 습기가 다 빠져나간 가을의 섬진강은 거울처럼 맑았을 터이고, 그 윤슬에, 그 은빛 백사장에 눈멀고 싶었을 터이고, 하여 살풋 누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묻혀간 모래 한 줌이 “쫘르르”방바닥으로 “쏟아지고”시인은 그 “은빛 사장을”쓸어내지 못하고 그만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모래 한 줌이 살아온 내력과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어서 일순 한 알갱이의 모래가 무거워 보이는 것이다. “움켜질수록 빠져나가는 것들과/ 만진 적 없는데도 따라오는 것 사이에/잔금 많은 내 손바닥”사이에서 시인은 고뇌하는 것일 터이다. 얼굴의 주름이나 손바닥의 손금이 가끔은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 보게도 하는 모양이다. “여인의 살갗처럼 부드러운”섬진강가에 서면 누구나 다 착해지는가.
-. 이해리 시인은 경상북도 청도군 출생이다. 1998년 <사람의문학>등단. 2003년 평사리문학대상 시부문 대상, 시집으로<감잎에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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