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하동사람들은 피 속에 녹아내려 전해온 하동의 이야기만 하동을 말하는 줄 안다.
2만여년의 시간동안 저 높은 산속에 깊이 묻어두었다가 바람결에 들려오거나, 흐르는 강물 속에 던져두었다가 물안개 속에 피어나는 하동 이야기는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하동이요, 하동이 나이니까 굳이 하동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은 더 흘러가고 세대가 더 바뀌어 가면서 산속에 묻었거나 강물에 담가둔 이야기들이 점차 바래지고 마침내 서서히 사라진다.
피 속에 담아둔 하동도 세대를 격하면서 점차 엷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하동인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하동이 나이고자 찾아든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10여 년 전, 하동의 정체성을 찾는 학술대회를 가진바 있었다.
한 지역이 갖는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그 지역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성을 말한다. 사전적 의미는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하동의 정체성을 말로 하라 하면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지역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별함....과연 그게 무엇일까?
10여 년 전의 학술대회는 결국 학자들의 지적유희의 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난 뒤 7년여가 흐른 후 어느 용감한 공무원이 신년 업무계획의 제목으로 ‘하동다움의 창조’를 붙였다.
그래서 물었다. ‘하동다움’이 무어냐고?
자긴들 딱 부러지게 무어라 말 할 수 있었겠는가? 묵묵부답..
그래도 ‘하동다움의 창조’는 꽤 근사한 아이템으로 널리 소개되었다.
물론 제목만 근사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했지만 철밥통 공무원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했느냐는 칭찬성 격려가 이어졌다
하동다움은 하동이 가진 여러 요소들 중에서 공통적으로 특별한 무엇을 뼈를 바르듯 잘 발라낸다면 하동의 정체성이 무어라고 손에 잡히듯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또 세월이 흘러 7년여가 지났다.
하동 정체성 학술대회를 준비했던 책임자였고, ‘하동다움의 창조’에 의문을 제기했던 그 사람이 이제는 하동의 역사를 더듬고 있다.
하동의 역사를 더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모두들 연세가 고만고만하시는데 이어갈 후학조차도 변변하지 않다.
나림 이병주선생께서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하셨다.
누가 있어 2만년 하동의 이야기를 전하여 내려갈까?
또 그동안 하동의 이야기는 얼마나 잊혀져갈까?

얼마 전 하동문화원에서 ‘하동박물대학’을 개설하여 희망하는 군민들에게 하동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는 열성들이다.
1학기에는 하동의 역사와 인물들 이야기를 나누고, 2학기에는 하동의 민속, 사투리, 문화재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하동의 지리와 자연, 생태와 환경, 문화예술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어야 하는데 가르칠 사람도 없고 자료도 부족하다.
언젠가 하동 군수께서 ‘하동학’ 이야기를 하셨다.
하동의 역사 문화, 자연, 환경 등 총체적인 연구와 자료수집이 필요하다.

군청이나 각종 단체에서 이런 저런 대학들을 운영한다.
그럼에도 하동학을 정규 커리큘럼에 넣는 대학은 문화원의박물대학뿐이다.
왜 그럴까?
하동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들 잘 안다고 생각해서일까?
과연 하동의 역사와 문화를 잘 알고 있을까?
초중고교에서는 하동을 어떻게 가르칠까?
하동군의 연혁 따위나 가르치는 것은 아닌지?
결혼 이주민 중심의 다문화가정도 200여세대가 훌쩍 넘는다.
그들에게 누가 하동을 이야기 해주고 있을까?
귀농 귀촌한 주민도 전체의 20%가 넘을 것인데 그 분들에게는 하동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 주어야 할까?
신규 공무원의 거의가 타지 출신인데 그들에게 군청은 제대로 하동 이야기를 해주고 있을까?

우리 하동에는 우리 역사를 관리하는 박물관이 없다. 그렇다고 하동의 역사를 관리하고 수집하는 역사자료관 조차도 없다
군도, 문화원도, 아무도 역사를 관리 하지 않는다. 자료는 점점 망실되어가고 있다.
많은 자료를 가지고 나름의 연구를 해 오신 분들이 돌아가시면 그 자료들은 어떻게 될까?
‘하동군사’를 혼자서 쓰신 고 여재규 선생님 그 분이 가졌던 자료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양보의 어르신, 화개의 명인, 이분들도 많은 자료를 갖고 계시는데 살아 계실 때 그분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보관해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박물관이 당장은 어려우니까 옛 역사와 선각들의 자료를 정리 보관하고 우리의 역사를 전시해서 알리는 역사자료관이라도 우선 설치하여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관리하고 배우고자 하는 이유는 하동의 동질성, 정체성을 찾아내어 미래를 개척하는 정신적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더 큰 하동, 새로운 하동을 이끌어 가는 정신적 동력은 바로 하동이란 이름으로 우리 모두를 엮어내는 동질성이다.
이러한 아이덴티티(identity)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오랜 세월 우리의 피 속에, 우리의 산하에, 우리 곁을 스쳐가는 바람에 파묻혀 있는 하동을 찾아 나서자.
이러한 작업이 바로 ‘하동학’이다.
하동군에서 ‘인문도시’에 선정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양이다. ‘하동학’의 토대 없는 인문도시는 어째 우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