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 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어떤 일에 관심이 가면 아무리 찰나적이어도 삶의‘레이더’에 포착이 되고, 결국에는 그것이 운명이 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서예작품 낙관용 도장, 즉 ‘전각(篆刻)’을 즐기고 있고, 또 한 때 서예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치의 증거라 하겠다.

대학원 다닐 때 한 선배가 있었다. 어느날 가방에서 손 안에 집힐만한 자그마한 사각기둥의 돌을 하나 끄집어내더니 그 위에 조각칼로 글자를 새겨 도장을 파는 것이었다.“별로 큰 힘도 안 들이고 돌에다 글자를 새기다니….” 선배의‘돌 도장’은 내게 큰 관심사가 되었고, 그 관심은 세칭‘도장 글씨’라는‘전서(篆書)’로부터 서예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내가 서예와 뗄 수 없는 운명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슬쩍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던 당시 그 일이 결국엔 내 인생의 중요한 노선으로 연결이 된 것이다. 그 후로 조금씩 서예 연습을 하다가 실력이 늘자 서예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여기서 모은 돈으로 중국에 가서 박사학위 공부까지 할 수 있었으니, 지금에 와서 자문해 본다. 도장을 파던 그 선배와의 만남이 내 인생에‘우연’이었을까 아님‘필연’이었을까? 뭐라 대답 할 순 없지만, 인생, 참 복잡한 듯하면서도 또 참으로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다보면 알게 된다. 일상은 그저 수많은‘우연’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인생의 운명적인‘물꼬’는 그 우연들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 찰나적인‘우연’들을 내 인생에‘필연’적인 것으로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결은 하나다. 그 우연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몰입하는 일이다. 결국에는 그 몰입의 정도에 따라 우리네 인생이 만들어지기에.

물론, 우연적인 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몰입하다 보면 점차 그림이 그려진다.

아주 희망적이라 판단될 수도 있고, 시간 낭비만 하고 있단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문제는 후자다. 희망도 없는 일에 몰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다. 그러나 이 역시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다. 시간을 허비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다른 웅지(雄志)가 샘솟게 되고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된다. 어떤 일에도 몰입하지 않을 땐 아무런 결과도, 또 다른 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희망과 절망의 경계는 몰입이다. 몰입은 인생의 위치를 발견하게 해 주고, 아니다 싶을 땐 또 다른 앞날을 설계하게 해 준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든지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몰입하는 것이다. 열심히 하다 보면 그것이 길이 될 수도 있고, 아니다 싶을 땐 얼른 노선을 바꿔 다른 길을 찾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오늘날 핸드폰 속의‘구글 맵’역시 세상의 이 같은 이치를 뒷받침해 준다. 어떤 목적지를 찾아 나섰을 때 사람이 움직여야 구글맵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면 목적지로 가고 있는지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지 그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일단 움직여야 그 방향을 알려준다. 그래서 늘 구글맵의 외침은 변함이 없다.“일단 움직여라, 그래야 방향을 알려 주리라”

난 요즘 만년에 행복할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고 있다. 아니 이미 출발했다. 그건 ‘캘리그라피’다. 간단한 그림에 손 글씨를 보태어 만드는 초간편 예술이다. 시간과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종이 한 장에 붓 하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늘 생각을 깊이 해야 하는 작업이다. 단순하지만 철학이 들어 있어야 작품에 수준이 실리기 때문이다. 매일 한두장 씩 그리고 쓰는 것이 목표다. 몰입하다 보니 이미 행복의 절반은 다 찾아 먹은 것 같다.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작품 전시회라도 한 번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다 보니, 아침에 늦게까지 누워있을 수가 없다.“행복, 몰입에 답 있다.”엊그제 만든 나의 어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