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 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땅 끝’ 마을 해남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그 지역 특산물인 고구마가 생각났다. 특별히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 현지에 간 김에 조금 사 가지고 왔다. 역시 맛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다. 고구마는 맛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있지만, 말만 들어도 보기만 해도 고향이 생각나고 어렸을 적 추억이 떠올라 무엇보다 정감이 가는 먹거리이다.

고구마를 맛나게 먹는 법은 다양하지만, 요즘 아내는 ‘에어프라이기’로 구워주는데 그리 좋을 수가 없다. 물론 소죽솥 아궁이의 ‘잉그락불’에 구워낸 군고구마에 비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기계가 현대판 ‘잉그락불’이 되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어쩌면 고구마에 재가 묻지 않아 좋고, 시간을 넘겨 ‘숯검댕이’가 될까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선 훨씬 더 좋다. 그래도 고구마를 구워내는 과정에선 낭만이 있어야 제멋인데 그런 것까지 기대하는 건 욕심이다.

나는 물고구마보단 밤고구마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쩐 일인지 어린 시절 우리집 밭에서 수확한 고구마는 주로 물고구마였고, 그것도 질긴 섬유질 ‘실’이 많이 들어있는 고구마였다. 다른 집 고구마는 속살이 토실토실하여 그렇게도 맛있었는데, 우리집 고구마는 정말 별로였다. 그럼에도 그 정도 불만은 먹을 게 부족했던 현실에선 분에 넘치는 사치였을 뿐이다. 그냥 감사하고 행복하기에 족했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물고구마도 좋아한다. 품종 개량 덕인지 속살에 ‘실’이 없고, 그러면서도 고소한 맛에 ‘꿀물’이 넘쳐흐른다. 한 입 깨물 때마다 물컹거리는 식감은 오감을 행복하게 해 준다. 덥석 깨문 고구마 살이 너무 뜨거우면 오물거리며 바람을 불러들인다. 입천장이 까질까봐 혀로 이쪽저쪽으로 ‘토스’를 해가며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고구마는 목구멍으로 미끄럼을 타고 사라진다. 요즘 내가 즐기고 있는 호사 중의 호사다.

고구마는 뿌리식물이다. 씨고구마에서 난 싹을 마디마디 잘라 땅에 심으면 땅에 박힌 부분에서 뿌리가 생겨나고, 그 뿌리가 점차 비대해져 우리가 먹는 고구마가 된다. 고구마 줄기는 땅을 따라 뻗어간다. 뻗어가던 마디가 땅에 닿으면 거기서도 또 다른 뿌리가 생긴다. 중간에 난 뿌리는 원뿌리에서 실한 고구마가 열리는 것을 방해한다. 원뿌리에 집중되어야 할 양분을 중간에서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고구마줄기를 들쳐서 중간 뿌리를 제거해주곤 했다.

토실토실한 고구마가 열리는 과정은 인생의 은유이기도 하다. 고구마 잎에서 만들어지는 양분은 한계가 있다. 그 양분이 마디마디로 분산되면 제대로 된 고구마는 기대하기 어렵다.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린 모두 한계를 가지고 산다. 그럼에도 성공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요 ‘무기’가 될 어떤 한 분야를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고 추구하는 일의 갈래가 너무 많고 복잡하면 성공은 어렵다. 고구마의 교훈이다. “먼저 선택하라, 그리고 집중하라.”

삶은 선택의 연속이요, 그 선택이 결국 인생이 된다. ‘선택’은 언제나 ‘버림’을 전제로 한다. ‘최선’을 택하려 할 때는 ‘차선’은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차선의 것이 무가치한 것이어서가 아니다. 그 역시 버리기 아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튼실한 고구마를 수확하고 싶으면 고구마 중간 뿌리를 제거해야 하듯, 포기하기엔 너무나 마음이 쓰린 것이라 할지라도 우선순위에 들지 않는 건 포기하거나 미뤄야 한다. 인생에서 어려운 게 바로 이 ‘선택’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하나’에 집중하려고 많은 걸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며 살아왔다. 이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일의 목록, ‘버킷리스트’를 작성 중이다. 그동안 하나의 ‘선택’ 때문에 ‘버림’ 받았던 것들을 다시 하나씩 쓰다듬어보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소중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오늘의 나를 위해 버려졌던 것들이다. 기다려 준 것들이다. 참으로 미안하고 감사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