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덕 논설위원

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 냉기가 섞여 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단 의미다. 이제 서서히 여름과는 이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물론 영원한 이별은 아니다. 내년에 다시 만날 잠깐의 이별일 뿐이다.

중국인들은 헤어질 때 흔히 ‘짜이지앤[재견, 再見]’이라 인사한다. ‘다시 보자’란 뜻이다.

사랑하던 두 연인이 서로 헤어지게 되었을 때도,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상황에서도 ‘짜이지앤’이라고 말한다. 상황에 무관하게, 다시 만날 것을 전제로 한 이별이다. 오늘 여름과의 작별 인사도 중국식으로 해야 좋을 듯하다. ‘여름이여, 짜이지앤[再見]’.

내게 올 여름은 귀한 추억을 만들어준 한 해였다. 고향 지인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는 나들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친 일상을 떠난 충전의 시간은 아무 때나 허락되는 게 아니기에, 모든 짐 내려놓고 맘껏 영육간의 힐링을 할 수가 있어 참으로 좋았다.

우린 살면서 경험하곤 한다. 정다운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의 정서적 시간은 빛의 속도로 빨리 흘러간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느끼게 되는 안타까움은 늘 다음을 기약하게 되고, 헤어지면서 하는 인사는 ‘다시 보자’는 합창을 하게 된다.

만남에 정담(情談)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임에 가무(歌舞)가 없으면 무슨 낙이 될까? 놀이에 동심(童心)이 빠지면 또 무슨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올 여름, 우린 그렇게 짧은 만남에 많은 즐거움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 이마에 된장 싸매고 ‘열정’의 여름밤을 함께 할 수 있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게 하나 있다. 선배 한 분이 내가 부르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노래 한 곡을 소개해 준 일이다. 무슨 곡인가 했더니 오래 전에 나훈아가 불렀고 최근에는 임영웅이 불러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라고 했다. 난 아직 모르고 있던 노래였다. 덕분에 오늘도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좋다.

“늙은 산 노을 업고 힘들어 하네. 벌겋게 힘들어 하네.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 하얀 구름 한 조각. 여보게 우리 쉬었다 가세, 남은 잔은 비우고 가세. 가면 어때 저 세월, 가면 어때 이 청춘. 저녁 깔린 뒷마당에 쉬었다 가세, 여보게 쉬었다 가세.”

고향 선배님은 왜 내게 이 노래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을까? 내가 노을 업은 ‘늙은 산’처럼 보였던 것일까? 삶이 벌겋게 힘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못 마시는 술이지만 그래도 남은 잔은 얼른 비우라고 에둘러 채근한 것일까? 이유야 어떻든, 대단히 서정적인 노래 가사가 맘에 들어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린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이란 가사 속에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라고 말한 중국 소식(蘇軾)의 표현처럼 ‘시중유화(詩中有畵)’의 경지를 만끽할 수 있어 더없이 좋다.

그 어떤 힘에도 간섭 받지 않고 물 흐르듯 오가는 ‘저 세월’과 ‘이 청춘’ 속에서, 가수 나훈아, 아니 당대 최고라 하기에 부족함 없는 시인 나훈아는 내게 속삭인다. 일 년 삼백 육십 오 일을 마치 하루만 살고 말 것처럼 그리 여유 없이 달리지 말고, 가끔은 노을도 바라보고 흰 구름도 감상하며 살아가라고…. 이젠 천천히 저녁 깔린 뒷마당에서 쉬어갈 준비를 해도 괜찮다고….

그렇잖아도 이젠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한 어떤 광고의 메시지를 실천할 바로 그 날이…. 현실은 언제나 노래가사처럼 그리 낭만적일 순 없지만, 대리만족은 충분히 가능하기에 오늘도 이 노래 한 곡 흥얼거리며 멋진 삶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남은 얘기 다 하고 가세’라고 속삭이는 2절의 가사까지 깊이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