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 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시집 간 딸이 딸을 낳았다. 덕분에 나도 이젠 가족상 할아버지라는 정식 호칭을 갖게 되었다. 이 기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일찍 손주를 본 후배가 만날 때마다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대충 알 것만 같은 오늘이다.

손주를 안고 얼리다 보니 33년 전 딸을 얻었을 때의 그 감격이 겹쳐진다. 졸린다고 ‘갱조개’ 껍질만한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 경이롭고 행복해서 눈물을 훔쳤었는데, 지금 그 때 그 행복을 다시 한 번 복습하고 있다.

손주는 이 세상에 막 태어나 아직 적응을 못해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은 할 줄 몰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의사는 백 퍼센트 다 표현을 한다. 그저 우는 것 하나로…. 칭얼대는 손주를 안고 얼리면서 ‘시답잖은 시(詩)’ 한 수를 자작(自作)하여 흥얼거려 본다. “갓난애의 하루는/ 우는 게 일이다/ 젖 달라고/ 안아달라고/ 기저귀 축축하다고”

갓난애는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다. 사리 분별을 전혀 할 줄 몰라도 ‘철’이 없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때’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 철이 바뀌고 세월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철’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사람다운 역할을 하게 된 어느 날 우리는 철이 들었다고 말하게 된다.

우린 평소 ‘철부지’란 말을 자주 쓴다. 이 ‘철+부지’란 말은 ‘철’과 ‘알지 못한다’는 의미의 ‘부지(不知)’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란다. 앞 글자 ‘철’은 또 계절이나 절기를 나타내는 ‘절(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원래는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른다’는 뜻에서 출발했으나, 지금은 의미가 확장되어 주로 성인이 돼서도 어린애처럼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거나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비꼬아 얘기할 때, 철이 없다고 하거나 철부지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계절도 철이 없어지는 듯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도 자꾸 철부지가 돼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뚜렷했던 계절의 구분도 날로 애매해지거나 없어져 가고, 철에 따른 사람들의 옷차림도 상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지구 온난화에 따른 자연환경의 변화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까지 ‘철’을 잃은 철부지가 되어선 안 될 일인데 말이다.

‘때’를 알고 또 그 때에 맞춰 살아갈 줄 아는 것이 곧 철이 드는 일이라면, 계절에 맞춰 옷을 제대로만 입을 줄 알아도 철이 들었단 증거다. 씨를 뿌려야 할 때 파종하고, 농사를 갈무리해야 할 때 내년을 생각할 줄 안다면 이 역시 철이 든 농부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웃어야 할 때와 울어야 할 자리를 구별하여 같이 기뻐해 주거나 함께 슬퍼해 줄 줄만 알아도, 철부지란 비난은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소망이 하나 있다. 내 인생, 철부지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엉뚱한 생각이 간혹 들 때가 있다. 철없는 일도 한 번 해 보고 싶고, 철없는 길도 한 번 걸어보고 싶다는 말이다. 물론 내 생각을 발설하면 식구들에게 정말 철없는 생각이라고 공격을 받을 것 같아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고, 또 실제 행동으로 옮길 용기도 없다. 하지만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철’의 정도는 나이에 비례해야 이치적으로 옳다. 오래 살고 경험이 많을수록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인격적으로도 추앙받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철이 든다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고 싶어도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철이 든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늘 어려운 일이다. 갓 태어나 아직 ‘철’이 안 든 손주를 안고, 내 인생 만년의 ‘철’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