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분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열다섯 살의 처녀들이 모여 봄쑥을 캤다. 소쿠리에 담긴 수북한 쑥을 들고 순덕의 집으로 갔다.

순덕은 향긋한 쑥을 쳐다보더니 부엌 찬장에서 커피를 내놓았다. 부엌에서 물을 끓이더니 커피잔을 가져왔다. 사기로 된 커피잔은 매끄러우면서도 하얗게 빛났다. 순덕은 앙증맞게도 조그만 숟가락으로 재색의 커피를 한 스푼씩 떠서 담더니 끓는 물을 부었다. 거기에 삼양 설탕을 한 숟갈 넣어주었다.

모두 입을 쩝쩝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순덕이 우아하게 웃었다. 자기가 아는 어떤 친구는 돈 벌러 서울로 떠났다고 말했다. 전자 회사에 다니면 월급을 제법 받는다고 자랑했다. 한 친구는 집에 돈을 부쳐주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샀다고 했다.

“읍내에 장미 다방이 생겼는데. 말분이 너, 한 번도 안 가봤지?”

“내가 그런 곳에 왜 가냐.”

“사람을 만날 때는 푹신한 다방 의자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이렇게 커피를 마시는 거야.”

누가 모르나. 말분은 화가 나 얼굴을 붉혔다. 이장 집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 사람들이 다방에 모여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파마를 한 후 우아하게 드라이를 하고 얼굴에 화장을 멋있게 한 여자는 더 멋있어 보였다. 말분도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니었다.

‘밖에 좀 나돌아다니더니 이게 나를 무엇으로 보나. 여자가 진득하게 참을성도 있고 그래야지.’

말분은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라는 것을. 그것을 알아준 사람이 바로 진우 오빠였다.

진우 오빠가 군대에서 월남으로 파병을 나가기 전, 말분은 함께 한글을 배운 친구들 이름을 적어서 오빠에게 건넨 적이 있었다. 점례, 순자, 영자, 정희, 옥순, 월매, 달순…….

“너는 진득하게 속이 깊어서 좋아.”

오빠는 볼을 쓰다듬듯 만져주고는 손을 잡아 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말분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했다. 푸근한 손길이 그녀를 평생, 참을성이라는 말 하나 안고 살아오게 했다.

그 무렵 진우 오빠는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순덕이 임신한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정혜가 찜솥에 물을 부은 다음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다. 씻어둔 어린 쑥에 쌀가루를 버무리자 하얀 쌀가루가 잘 들러붙는다. 물이 끓어오르자 구멍이 난 찜기에 흰 천은 깔았다. 그런 다음 쌀가루에 버무린 쑥을 찜기에 올려놓는다. 꼭 꽃가루 같다. 정혜가 뚜껑을 덮고 소금과 사카린을 제자리에 두었다. 말분이 식탁에 앉아 입맛을 다시며 쑥범벅을 쳐다본다. 정혜가 얼굴을 돌려 말분의 몸을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찜기가 끓으며 김이 나기 시작한다. 정혜가 그 위에 준비해 둔 벚꽃을 몇 개 얹는다. 떼어먹기 쉽게 칼금을 내자 말분이 박수를 친다. 말분이 막무가내로 솥뚜껑을 열려고 하다 그만 살갗을 덴다.

“앗 뜨거!”

“아~ 엄마, 어쩌려고 그래. 조심해야지.”

동네 사람들은 겨우내 농사 대금을 갚고 나면 보리가 익는 봄이 오기까지 굶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쌀가루나 밀가루에 쑥을 버무려 쪄서 먹으면 끼니를 때우기에는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