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보내고 싶지 않은 ‘님’을 붙잡는 방법이 하나 있다. 떠날 때 신고 갈 신발을 숨겨버리는 것이다. 신발까지 벗어놓고 떠나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님’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꼭 신발 때문만은 아니다. 보내기 아쉬워하는 이의 심정을 차마 떨치지 못해, 그저 못이기는 체 붙잡혀 잠시만이라도 좀 더 머물러 주는 것일 뿐이다.

살다보면 붙잡고 싶은 게 하나만이 아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세월이다. 마음 같아선 붙잡아 놓고 영원히 못 떠나게 하고 싶은 세월 말이다. 그러나 세월에겐 숨길 신발도 없다. 있다 해도 맨발로 떠나가 버릴 야멸찬 녀석이다. 올해 역시 기대할 필요도 없다. 1분 1초라도 잠시 머물러줄 일말의 여지도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무정하게 떠나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연말이다. 천천히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맞이를 해야 할 시간이다. 이때가 되면 빼놓지 않고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일 년 동안 손때 묻은 수첩을 정리하고, 잉크냄새 잔잔한 새해 수첩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간 꼼꼼하게 메모해 놓았던 올해 수첩은 1년 동안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녹화’해 놓은 내 삶의 ‘블랙박스’나 다름없다. 참으로 소중한 자료다. 새해 수첩은 내년 한 해의 또 다른 나의 자아성취를 위해 하나하나 수놓아 갈 미답(未踏)의 바다다. 참으로 기대되고 마음 설레는 기록장이다.

올해 2021년의 수첩을 넘겨보자니, 지난 1년간의 춘하추동이 하나하나 재생되어 돌아간다. 행복했던 ‘영상’들도 많지만, 또 가슴 조이던 순간순간의 흔적들도 역력하다. 축하의 봉투를 준비해서 달려갔던 지인의 결혼식도 군데군데 보이고, 부의(賻儀)의 뜻을 전달해야만 했던 누군가의 안타까운 별세의 메모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코로나19 때문에 예정됐던 행사가 취소되어 가위표로 지워진 일정들도 상당하다.

올 한 해는 여느 때보다 불편하고 짜증나는 한 해였음에 틀림없다.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구 위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이다. 계속되는 코로나19로 모두의 삶은 헝클어지고, 많은 계획들은 다 틀어지고 말았다. 행복해야 할 현장에 불평이 계속되었고, 불안은 종식될 여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내년에는 분명히 좋은 날이 오겠지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내년’은 반드시 일상다운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월은 토막토막 잘려져 있지 않는데, 우리는 편의상 그 세월을 잘라서 구분을 해 놓고 살아간다. 짧게는 ‘초(秒)’ 단위로 잘라서, 좀 길게는 ‘계절’ 단위로, ‘년(年)’ 단위로 말이다. 이렇게 토막 난 세월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하게 되는 때는 다름 아닌, ‘해’가 바뀌게 되는 연말이 아닐까 싶다. 살아온 흔적을 뒤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계획하는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

사실, 크게 보아 세월은 시작점도 없고 끝나는 점도 없다. 그러니 어떤 일을 반드시 마무리해야 하거나 개시해야 할 지점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인위적으로 ‘시종(始終)’의 시점들을 다양하게 설정해 놨으니, 12월은 금년을 정리하고 내년 1월을 맞이하게 되는 시점이다. 또 사계 중 마지막 계절인 겨울이니 이젠 내년을 시작하는 봄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할 일이 있다. 금년에 미흡했던 점, 아쉬웠던 점, 또 방전되어버린 뭔가가 있었다면 모두 다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기대되는 내년을 위해 더욱 알찬 일들을 계획하고 기도하는 일이다.

구분 없고 토막 나지 않은 영존의 시간 속에서, 꼭 새해아침에 새로운 계획과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지금’ 해도 괜찮지 않느냔 말이다. 왜냐면 계획의 가치는 세우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실천에 있는 것이고, 실천의 가치는 내일과 내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늘과 지금에 있기 때문이다. 꼭 실천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를 넘기지 말고 지금 시작해도 좋다는 말이다. 내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