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로 얼굴 씻고 쪽문 열고 나가니
백매화가 엷은 새벽의 가지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어젯밤에 오디주 한 주전자와 큰 대접에 찻물을
가득 담아 건네주고 간 처자는 보이지 않았다
언어장애가 있는지 말은 잘 못하면서도
몇 번씩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알아듣게 하려고
애를 쓰는 처자에게서 산복숭아꽃 향이 풍겨 나왔다
칠불사로 가는 이 골짝에 들어온 지 스무 해
혼자 사는지도 그 절반은 되었을 거라는 안주인은
동생이 죽어 어제 고향에 갔다고 했다
관향다원 觀香茶園
관세음이 아니라 향기를 통해 세상을 관하는 이와
차 한 잔 하고 싶어 지었을
이름 예사롭지 않은 민박집 아래로
십 리 이십 리 벚꽃이 피어 화개는 꽃으로 출렁거렸다
우리 속에서도 출렁거리는 것이 많아
밤 깊도록 우리가 지닌 세속의 칼 그 양날에 대해
오랜만에 속맘을 털어놓던 도반도
일찍 깨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붓 들어 내 남은 날이
섬진강 모래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화심에 수백만 개 향기의 촛불을 켜들고도
화려하기보다 은은한 벚꽃처럼 살 수 있기를
며칠째 비어 있는 방명록 여백에 적었다
백매도 산벚꽃도 가만가만 숨을 쉬는
사월 아침 화개 관향다원에서

‣몇 해 전 지인의 초청으로 시인은 화개에 왔다. 수천, 수만의 화심 아래에서 시를 낭송했을 것이다. 아마 그날 밤 칠불사 초입의 이 다원을 숙소로 빌렸으리. 시인의 깊은 속마음이, 번쩍거리는 조명보다도 하늘로 인해 수없이 피어난 벚꽃보다도 아침 일찍 시인의 눈에 비친 한 그루의 백매에 있었으리. 하여 시인은 그 꽃들에서 “관세음 아니라 향기를 통해 세상을 관하는 이”와 만나고 그의 상처를 같이 아파하고 지극히 시인답게,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에 “출렁거리고” 시인이 지닌“세속의 칼”을 털어놓고 듣는다. 
시인은 항상 비판의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옮은 일엔 뛰어들어 앞장서고 분노하고 비판하고 절규한다. 이러한 시대를 몸으로 살아온 시인의 시는 화개에서 이르러 느긋하고 관대하다. 이는 자연이 주는 향기의 관점 아래서가 아니라 시인의 연륜에 비김할 것이다. 
<최영욱(시인) 한국문인협회 하동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