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비 문 찬인

11월의 어느날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잊혀진 역사의 현장인 철원평야를 찾았다.
한국 DMZ연구소 함광복 소장님과 강원도문화도민협의회 고창영 사무총장님의 초청으로 DMZ 탐방하기 이틀째의 날이다.
아! 태봉국 도성. 풍운아 궁예가 1100년 전 저기 보이는 ‘풍천원’ 너른 들판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그곳에 닿았다.

신라 치세 말기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한 사내가 나라를 건국했다.
우리 역사 속에 짧지만 강렬했던 인상을 남긴 이 사내의 이름은 궁예다.
궁예는 가슴속에 늘 큰 뜻을 품고 있었다.
하나는 ‘삼한통일’, 또 하나는 ‘모두 다 잘사는 미륵세상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궁예(弓裔)라는 이름도 활 잘 쏘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뜻에서 따 왔다 한다.

궁예는 처음 영월, 평창, 울진, 강릉 등 동쪽을 휩쓸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점 서쪽으로 진격했다.
896년 마침내 개성의 왕건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퇴하였기에 평양 구도(舊都)는 묵어서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이 원수를 갚겠다.” (삼국사기 궁예전)

그러나 그의 꿈은 고구려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라 한 다음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다.
마진은 ‘마하진단(摩何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결국 궁예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의 건설을 꿈꾸었던 것이다.
호족중심의 통치체제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바꾸려 했던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918년 결국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면서 궁예의 꿈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역사는 이긴 자의 손에 의하여 쓰여진 기록이다.
처와 자식을 죽이고 폭정을 일삼다 백성들의 손에 맞아 죽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만을 남긴 채 궁예는 그렇게 사라졌다.

하지만 궁예의 철원 도성은 DMZ 숲속에 그대로 누워있다.
직사각형의 황성옛터는 달빛만 고요하다.
일제 때의 자료를 보면 궁예도성은 외성이 12.5KM, 내성이 7.7KM에 이른다.
백제의 풍납토성(3.5KM), 신라의 경주 월성 (1.8KM), 고구려의 국내성 (2,7KM)은 비할 바가 아니다.
조선의 서울 성곽 (17~8KM)에 견주어도 그리 손색이 없다.
그러나 금단의 땅. 그저 먼발치로 도성의 흔적만을 추측할 뿐이다.
궁예도성은 군사분계선이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반쪽은 북한, 반쪽은 남한 땅이다.
1100년이 지나도록 버려진 땅이 된 궁예의 옛터는 이제 닥 반으로 쪼개져 남북분단의 아픈 상징이 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궁예가 가고없는 그 자리에 두루미만 한가롭다.
두루미는 군자와 같은 새이다.
낟알을 주워 먹으면서도 촐랑거리지 않는다.
두루미는 보통 1M가 넘는다. 다리는 영덕대게처럼 가늘고 길다. 한복차림의 조선 선비가 양반걸음으로 휘적휘적 걷는 것 같다.
퍼덕거리는 큰 날개는 영락없이 선비의 휘 젖는 도포자락이다.
두루미는 학(鶴)이다. 흰 학이 천년을 살면 푸른빛의 청학(靑鶴)이 되고, 청학이 다시 천년을 살면 검은 현학(玄鶴)이 된다고 한다.

철원은 통일 한국의 수도를 꿈꾸고 있다.
철원평야는 한반도의 뱃살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다.
1100년 전 궁예가 철원에서 꿈꾸었던 ‘대동방국’이 이제 ‘통일한국’으로 우리에게 다가서지 않을까?
3일간 늘 함께했던 한구라(韓口羅)선생님의 구라학개설
그리고 철원의 꿈, DMZ를 뒤로 하면서 내내 가슴에 아렸다.

함께했던 이종수 시인은 노래하였습니다.

노동당사 바람벽
총탄에 뚫린 구멍사이로
비쩍마른 몸을 비틀고 나와
갈바람에 흔들리는 울음을 본다.

이념의 벽속에 갇혀
죄 아닌 죄로 죽어간 혼백들이
푸른 창공에 몸을 던지고
태극기처럼 휘날리는데

1000년 시공을 넘어온
궁예도성은
비무장지대 철조망 속에
가두어 놓고
역사는 헛바퀴를 돌린다.

왕이여 일어나소서!
철마여 녹슨 발굽을 차고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