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 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내가 집에서 소중하게 잘 쓰고 있는 물건들 중에는 직접 사지 않고 길거리나 재활용 분리수거장에서 주워와 활용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탁자와 책장을 비롯해서, 선풍기･책･그림액자 등 종류도 다양하고 개수도 적잖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책이다. 누군가가 보고 버린 책들, 그 중에는 나의 손을 거쳐 운명이 다시 한 번 달라진 것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엊그제도 횡재라 할 만한 일이 있었다. 누가 아동용 도서를 수북하게 내놓은 것이었다. 펼쳐보니 고급 정장 시리즈로 손때도 묻지 않은 거의 새 책과 다를 바 없었다. 아직 두 돌이 되지 않은 손녀가 보기에 딱 좋을 책이었다. 흥분된 가슴으로 손수레를 가져가 실어 왔다. 좋은 책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세상 최고다. 특히 싸게 사거나 그저 주워온 헌책들은 새 책보다 느낌이 다르다. 누군가의 영혼을 살찌게 해준 그 열매를 다시 한 번 더 맛보는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어쩜 내 인생은 이런 헌책들과의 인연으로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1970년대 말에 대학에 입학했고 전공은 역시 중어중문학이었다. 당시는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책들이 많지 않았다. 도서관에 중국어 관련 책이 있다 해도 몇 권 되지 않았고, 그것마저도 거의 절판이 되어 시중에선 살 수가 없었다. 특히 대도시가 아닌 지방에서는 변변찮은 중국어 회화책 한 권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헌책방이었고, 그 때 처음으로 가본 곳이 동대문 청계천 헌책방거리다.

동대문 헌책방거리는 가히 촌놈의 시야를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켜켜이 쌓여있는 헌책들 속에는 손이 떨릴 정도로 반가운 책들이 많았고, 수백 미터가 될 듯한 첫 가게부터 마지막 가게까지 사다리를 타고 서가를 오르내렸던 그 행복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구한 헌책들은 대학시절 중국어와 한문 기초를 쌓는데 소중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 삶의 나이테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 소용이 되지 않는 지점까지 왔음에도 쉽게 이별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요 며칠 역시, 누군가의 눈길과 손길이 먼저 스쳐간 책을 한 권 읽고 있다. 곳곳엔 표시를 해 놓은 흔적이 있고, 그 흔적들은 분명 그 독자가 공감했던 포인트였을 것이다. 나는 모른다. 그 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도. 그러나 곳곳의 흔적들이 나의 감정선과 많이 일치하고 있다는 생각에 어쩐지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지곤 한다. 누군지는 몰라도 같을 책을 보게 된 인연에 감사하며 오늘도 한 장씩 책장을 넘기고 있다.

언젠가는 재소자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교도소에 강의를 갔다가 맺은 인연이다. 중국어 공부에 필요한 책을 좀 보내주면 좋겠단 편지였다. 현재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얘기와 함께…. 얼마나 책이 절실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바로 새 책 몇 권과 내 손 때가 묻은 사전을 포함하여 몇 권의 헌책도 함께 보내드렸다. 그 헌책들은 과거 나의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런 책들이었다. 헌책을 보낸 이유는 나의 흔적들을 통해 영적으로 서로 소통이 되었으면 좋겠단 생각 때문이었고, 그 소통이 더욱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되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 때문이기도 했다.

한 번 태어난 책이 한 사람만의 영혼에 밥이 되었다 사라지기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귀한 양식이 될 수 있도록 돌고 또 도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헌책의 의미요 운명이 아닐까 싶다. 중국 유학시절, 어느 유학생이 읽고 버리고 간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중간 중간 접어놓은 책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찌 이토록 내용이 흥미진진한 순간에 쉬어갈 수 있었을까? 원래 책 주인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밤을 샌 기억이 오늘따라 아련하게 마음을 울린다. 지금도 내 뒤편에 꽂혀있는 저 책을 어찌 버릴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