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도심의 거리를 걸으며 나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그를 생각했다. 벌써 삼 년이 흘렀음에도 그는 민주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지켜보는 나와 아내에게도 큰 고통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된 후 나와 아내는 그에게 몇 번이나 여자를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아직 결혼하지 않고 있었다.

카페는 창이 무척 넓었다. 이탈리아풍의 대리석이 깔린 바닥 중앙에 벽난로가 있어 한결 따뜻했다. 그는 창가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아님, 지금이라도 우리 집으로 갈까? 혜린 엄마 본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미처 처리하지 못할 사무실 일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뇨. 그런데 정말 이건, 이건 아닙…,”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날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벽난로를 보고 있었다. 술 취한 그의 벌건 눈만큼 벽난로의 불길도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지리산에 다녀와야겠어요. 잠을 못 자겠습니다. 그 애가 날 놓아주질 않습니다.”

그의 말에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뜬금없이 무슨 지리산?”

“가서 내가 제사라도 지내줄 겁니다. 그것도 안 되면 굿이라도 할 겁니다. 그러면 날 놓아주겠지요.”

그는 몹시 힘들어 보였다. 최근에도 어떤 여자와 선을 봤는데 막판에 깨졌다고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는 민주가 훼방을 놓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결혼문제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부를 그녀가 관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지 삼 년이 지났다. 전 직장이었던 A 병원에서 나와 지금의 아내 그리고 그와 민주는 각각 연인이었다. 나와 그는 원무과 직원이었고 아내와 민주는 간호사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주 어울렸고, 그해 여름 휴가 때 그의 제안으로 넷은 지리산에 갔다. 그리고 그 겨울 끝자락에 민주는 여름 휴가 때 함께 올라갔던 불일폭포에서 추락했다. 왜,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 빼곤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알았어. 이번 달 마지막 휴일에 시간 내 볼게.”

산장 안은 벽난로의 온기로 한층 따뜻했다. 나는 겨우 얼어붙은 몸을 추슬러 주인에게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그리곤 가능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옆 좌석에 있던 등산객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자살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폭설에 여자 혼자 왜 올라갔겠어?”

술독이 빠지지 않아 코끝이 벌건 중년 남자가 말했다.

“무슨 소리! 죽을라카먼 약 먹고 뒤지지, 어데 할 일이 없어 이런 추운 날씨에 그까지 가서, 폭포 우에서 떨어지겠노? 아까 그 여자 옷 안 봤나? 등산복 차림 아이더나. 자살 할라는 딸내미가 그런 차림이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건강한 중년 사내가 말을 되받았다. 아까 올라올 때 본 그 여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 번째 말한 사내의 말에 수긍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구태여 등산복을 갖추고 폭포까지 간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로 그런 사람일수록 평상시 옷차림인 게 정상이었다.

“그라먼 여자 혼자서 빙벽 등반할라꼬 그랬단 말이가? 우리 같은 프로도 힘든데?”

두 사내는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겼다.

그때였다. 거의 말없이 듣고 있던 박이 갑자기 탁자를 세차게 쳤다.

“좀 조용히 하쇼!”

갑작스러운 그의 고함에 휴게소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자살이든 추락이든 당신들이 뭔데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거요?”

“뭐라?”

일이 심심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두 남자 중 코끝이 벌건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고 곧 우리 쪽으로 올 기세였다.

“개새끼들! 밥 먹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마누라하고 그 짓이자 할 것이지.”

그가 중얼거리듯 뱉은 말이 끝나자마자 그 사내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산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나는 그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려오는 길에 그는 말이 없었다. 민박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오전 내내 얼어붙었던 몸은 따뜻한 구들장 위에서 나른하게 녹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