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비 문 찬인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하동의 우전차를 빨리 보내라고 독촉이다.
‘우전차는 얼마나 가려놓았는지 어느 때나 보내 이 차의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
평생의 벗에게 차를 보내라고 앙탈하는 대학자의 천진함이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고독하고 외로웠다.
8년간의 제주도 유배에서 방면 된지 불과 3년 만에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머나먼 북쪽으로 귀양길을 떠나는 추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세한도(歲寒圖)는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당시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적막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그려져 있고 그 사이로 초옥 한 채가 인적 없이 들어앉아 있다.
나머지는 텅 빈 공간이다.
텅 빈 여백은 추사 김정희의 신세이며, 극도의 생략은 그의 결기와 단호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숙연하고 처연하다.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제자 이 상적에게 고마운 뜻으로 이 그림을 그려줬다.
이상적은 유배지에서 외롭고 힘든 스승에게 수많은 책과 용품들을 꾸준히 보냈다.
역관인 그가 사신을 수행하는 길에 책이 아닌 다른 물품을 갖고 온다면 큰 돈을 벌수 있었지만 그는 스승인 추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데 갖고 간 돈을 아낌없이 썼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보통이다.
김정희가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어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처량한 신세임에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귀중한 물건을 사서 보내주니 그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했을까?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겠구나.
그대야말로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세한도 뒤에 붙어있는 소서(小序)에 쓰여 있는 글귀이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은 해에 동지사 이정웅을 수행해 연경에 갔다.
이듬해 정월에 청나라 명사들의 모임에서 추사의 그림을 보여 주었고 그 그림과 글을 보고 감탄한 16명이 감상문인 제발(題跋)을 적었다.
이상적은 그 제발을 한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해서 가져왔다.
세한도는 국보 제 180호이다.
돌고 돌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지만 서예가 손재형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추운겨울이 되어서야 송백의 푸르름을 안다.
권세를 가졌을 때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푸르름 이었으나나 권력과 돈이 없어지니 모든 나무가 시들어 지고
이제는 예전에 알아보지 못했던 소나무와 잣나무만 남아있다.
비록 추사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범인에 불과하지만 세한도를 보면서 가까이에 있는 송백처럼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난다.

50의 나이에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하동으로 이거 하면서 많은 인연을 뒤로 하였고 소위 출세라는 세속의 욕망도 떠나보내었다.
본 향 같은 하동 땅에서 새로이 만난 고마운 인연들
평소 번잡함을 싫어하고 이웃을 사귀는데 적극적이지 못한 성정 탓으로 우리 집 대문에 거미줄이 쳐진지 오래다.
산중 초옥에 마누라 잔소리와 하양이 짓는 소리만 요란 하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은 것은 조군수님을 비롯한 많은 고마운 분들 덕택이다.

정말 고맙다.
고마운 분들께 비록 영인본이나마 ‘세한도’를 구해 드리고 싶다.
올 세한에는 조리전에 땡빚을 내어서라도 꼭 그렇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