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비 문 찬인

음력설 전후에 악양 개치 삼거리를 지나다 특별한 현수막이 보았다.
‘여기가 소상낙원 악양입니다’
소상낙원이라는 좀처럼 듣기 힘든 어휘에 유독 관심이 쏠렸다.
아마도 소상팔경(瀟湘八景)이라는 중국 호남성의 8군데 절경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악양 사람들은 참 유별난 자긍을 지녔다.
왜 악양이라 하였을까?
악양 사람들은 말한다.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이곳을 지나다가 자기의 고향 중국 악양과 매우 닮은 곳이라 하여 그 후부터 악양이라 불렀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의 소정방은 이름은 열(烈)이고 자는 정방(定方)이다.
하북성(河北省) 기주(冀州) 무읍(武邑) 출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호남성 악양 사람이 아니다.
하북성과 호남성은 수 천리를 북과 남으로 떨어져 있다.
소정방이 악양을 지나갔다고 하는데 역사기록에 보면
소정방이 당군을 이끌고 지금의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 상륙한 것이 660년 7월 9일이고,
곧바로 사비성을 공략하여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것이 동년 7월 18일이다.
공식 항복식은 8월 20일에 있었고, 소정방이 의자왕등 포로를 이끌고 귀국한 것이 9월 3일이다.
귀국 준비 등에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므로 악양을 지나갔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악양면지(岳陽面誌)에 따르면
악양은 ‘따사롭다’에서 한자를 차음한 것으로 보인다.
악(岳)은 ‘악아, 아가’ 즉 어리다. 작다에서 차음한 것이고,
양(陽)은 ‘해,볕’ 즉 따뜻하다 에서 차음한 것이라 한다.
악양은 한마디로 ‘따사로운 곳’이란 의미이다.
옛날에 악양을 ‘소다사(小多沙)’ 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소다사 역시 따사롭다에서 음을 빌린 것 같다.
하동의 옛지명 ‘한다사’도 역시 같은 유래이다. 한(韓)은 크다, 환하다는 뜻이니 악양보다 하동이 더 따뜻했던 것 같다.

소상(瀟湘)은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 동아시아의 시와 그림에 가장 많이 인용된 것이 소상팔경(瀟湘八景)이다.
소상(瀟湘)에 대해 11세기 중반의 서화가 미불(米芾)은 그의 ‘소상팔경도시병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수(瀟水)는 도주에서 발원하고, 상수(湘水)는 전주에서 발원하여 영주에 이르러서 합류한다.
동정호(洞庭湖) 남쪽으로 상음에 이르러 비로소 원수(沅水)와 만나고, 다시 동정호에 이르면 파강(巴江)과 더불어 물이 합쳐지기 때문에 동정호 남쪽을 모두 소상(瀟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일대의 8가지 절경이 수백km의 거리를 두고 흩어져 잇는데 이를 ‘소상팔경’이라 한다.
소상팔경의 아름다움을 개관해 보면
『동정호 남쪽으로 오면 수면이 끝없이 넓고 아득하여 깊으면서도 푸르고, 겹겹의 산들이 층층마다 바위가 이어지면서 천리를 가는데, 하늘의 지붕이 텅 비어 푸른 사이에서 안개와 노을이 삼키고 토한 것에 물들고, 바람에 돛단배와 모래밭에 새들은 나타났다 사라지며...』

악양에는 동정호와 군산이 있다.
중국 동정호는 호남성 북부에 있으며, 총면적 3,915평 방 킬로로 서울시의 5배 면적 크기이다.
끝없이 넓고 아득하여 호수라기보다는 바다 같은 느낌이다.
동정호대교라는 긴다리가 있는데 길이가 10,174m이다.
동정호 안에 조그마한 섬이 떠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는데 군산(君山)이다.
중국 삼황5제중의 하나인 순(舜)이 제위에 오른 지 39년 되는 해에 남방영토를 돌아보다 창오에서 죽어 구의산에 제사 지냈다.
순임금의 두 비(妃)인 ‘아황’ ‘여영’은 순임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소상강변에 달려와 애통해 하며 3일 밤낮을 피눈물을 흘리다가 호수에 빠져 죽는다.
이후 피눈물을 흘린 자리에 예전에 없던 대나무가 자라났는데 이를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 불렀다 한다.
악양 사람들은 고소성 아래 대나무 군락을 소상반죽이라 부른다.
현재 동정호 안의 군산에 가면 두 비(妃)의 묘가 있고, 그 주위에 소상반죽이 자라고 있다.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반에 있는 높이 20m의 3층 누각이다.
이곳은 산을 뒤로 하고 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두보(杜甫)를 비롯한 많은 시인과 문장가들이 이곳에 올라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중국 4대 누각의 하나로 당나라 재상이던 장석이란 사람이 3층 20m정도의 누각을 지으면서 못하나 쓰지 않고 지었다고 한다.

악양 사람들의 악양 사랑은 은근하면서도 유별나다.
형제봉을 ‘성제봉’으로 부르고, 악양이 중국 호남의 소상팔경에 못지않다 하여 ‘악양팔경’을 지어 예찬한다.
심지어 외둔 삼거리 입구에 둥글고 큰 돌을 날라 와 ‘소상낙원(瀟湘樂園)’이라 새기고 악양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임을 스스로 자랑한다.
게다가 개치 삼거리에 ‘악양동천’ 이라 새긴 예쁜 바위까지 갖다 놓았다.
혹자는 옛 선비들이 중국의 악양과 하동의 악양을 무리하게 연결시켰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땐 중국이 최고였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악양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있는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우린 낙노국의 오랜 역사를 지닌 대단한 후예들이야 하는 자부심이 그때 당시의 콘텐츠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악양은 중국정도가 아닌 더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일지도 모른다.
소정방 이야기, 소상낙원 이야기, 동정호와 군산. 소상반죽, 악양루 등 다시금 찬찬이 생각해보자.
중국에 빗대어 스스로를 키워야 했던 슬픈 역사가 우리 선조들에게 있었음도 되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