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룡(진교면)

‘살다 지쳐 자주 팍팍한 날이면/ 세상사 낡은 외투 훌훌 벗어던지고/ 화개동천 지리산 옛길로 가자/......’ 이원규 시인의‘지리산 옛길’이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거쳐 의신계곡과 벽소령을 넘어 함양군 마천면으로 가던 옛길이 있었다. 이 길은 옛 보부상들이 하동이나 광양 등 남해안의 해산물을 함양 등 내륙지방으로 운송하던 길이었다. 그중 의신마을에서 화개면 신흥리까지 이어진 약 4.2Km의 계곡 길을‘지리산 옛길’이라 한다. 벽소령 주변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의신으로 내려와서는 깊은 계곡의 모습을 이미 갖추었다. 일명 서산대사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오가던 길이기도 하다. 지리산 계곡 길 중에서 단연 최고의 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흥리 쪽 입구는 큰길가에 연하여 있지만 표지판이 길 안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들키지 않도록 감추어 두었을지도 모른다. 소담스러운 길을 파헤쳐 넓히고 아스콘으로 포장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현실 때문일까?

사람이 걷던 길들이 사라지고 있다. 자동차에게 빼앗겼다. 옛길이 무너지면 세월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의 더께와 정취, 그 길에 녹아있던 역사와 문화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그게 잘 사는 길일까? 아름답고 정겨운 길은 보존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선(善)이며, 우리의 삶에 정겨움과 여유로움, 그리고 깊이를 불어넣는 멋진 전략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고향은 예로부터 버스가 지나가는 신작로를 따라 집들이 모여 있어 길이 동네보다 간단하니 이야기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산골 외갓집 동네는 올망졸망한 길 덕분에 마을의 이야기가 구구절절 깊었다. 고샅마다 사연이 깃들고, 그 길에 연한 옛집과 오래된 감나무, 이끼와 넝쿨, 꽃들과 함께 돌담 또한 정겨운 마을길을 지켰다.

하동읍에서 화개까지 산굽이를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 사람들이 걸으니 길이 생겼다. 그 길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는 동안 해와 달이 수도 없이 지나갔으니 길이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 구불구불한 길 따라 삶의 굴곡진 이야기가 만들어져 우리의 심금을 울리면서 팍팍한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악양과 화개장터에서 버물러진 박경리의‘토지’와 김동리의‘역마’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길들이 직선으로 바뀌면서 이제 이야기가 고일 겨를이 없어져 버렸다. 직선은 시간을 단축해준다. 그렇다면 순식간에 화개장터까지 간 우리들은 속도에 감동할까? 감동한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고향 면사무소 뒤, 경사지고 좁고 굽은 골목길을 좋아했다. 말뚝박기로 시끌벅적했던 그곳에는 이제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공간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낯선 곳이 되어버렸다. 면사무소 앞 큰길에서 친구들과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어둠이 가득 괸 좁장한 골목길로 휘어들면 무서워서 엄마를 크게 불렀던 추억의 그 길이 기계적인 직선으로 변해버렸다. 해거름에 뒷산 그림자가 내려오는 아늑한 동네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그냥 뎅그런 길이다. 인문학적 의미와 같은 고급스러운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옛 모습과 지금 이 시대의 요구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손자 손녀들을 이곳에 세워 내 어린 시절의 그리운 장면 하나라도 보여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인 고정희는‘모든 사라지는 것 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고 했다. 그러나 때로는 사라지는 것들로 해서 회한(悔恨)으로 얼룩진 후회막급의 경우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발 못지않게 보존의 중요성도 알아야 한다.

일 년에 두서너 번 지리산 옛길을 찾는다. 혹시나 시멘트를 바르거나 난간과 계단을 만들어 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다행히 아직까지 별일은 없지만 신흥리 쪽의 입구는 언덕배기에 잡목들을 베어내고 돌을 쌓는 바람에 입구가 드러나고 말았다. 걱정은 되지만 길은 그대로이니 그래도 그게 어딘가!

지리산 옛길에 마음을 모은다. ‘지리산 옛길이여! 부디 변함없이 구불구불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의미있는 불편함을 주기 바란다. 모든 감각을 통해서 사색하고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정겨운 맑은 물소리를 가슴에 안겨주기를 바란다. 꼭 그렇게 되기를 빈다.’역사와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인간이라는 키워드가 존재할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