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작가

그때 여름휴가가 지나고 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병원을 그만두고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하여 몹시 바빴다.

“민주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나 봅니다. 문학에 해박하고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할 줄 아는 그는 아마, 민주가 평소에 꿈꾸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내가 아니라, 말이죠.”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둘은 연애를 한 모양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문학에서 나올 법한‘지고지순한 사랑’… 하하.”

그는 내가 봐도 민망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나의 입술은 가늘게 떨렸고, 심장은 벌렁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

“문제는 그보다 민주가 더 깊이 빠진 데에 있습니다. 아시잖아요? 민주는 한 번 불이 붙으면 확 타버리는 성격인 것을요. 하지만 아무리 순수하고 바른 남자라도, 그는 가정이 있었어요. 그는 가정을 버릴 만큼은 아니었어요.”

그때 난 솔직히 그의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공포가 내 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는 그의 격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민주는 그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지리산에 가지 전날, 야간 근무 때 하염없이 우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니, 가증스러운 그녀까지도요.”

그는 얘기 도중에도 간간이 폭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일부러 그녀가 잠든 간호사실 탁자 위에 그동안 내가 쓴 일기장을 두고 갔지요. 그녀가 그 남자에게 빠져있는 동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입술이 바짝 탔다. 곧바로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통을 빼앗아 버렸다.

“민주는 다음 날 지리산에 갔던 겁니다.”

그제야 나는 민주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폭포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이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삶이 구차하게 느껴질 때,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민주는 자신의 가족에 관한 절망과 자신의 삶과 관련한 상실감, 세상에 대한 체념 등 모든 게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그런 것들이 얽히고설켜 풀지 못할 실타래가 되지 않았을까.

그새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민주가 죽고 한 달쯤 지나 나 혼자 이곳에 몇 번 왔습니다. 물론 그 남자에게 복수할 생각이었지요.”

“여기를?”

“네. 그땐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방을 잡고 기회를 엿보던 중 우연히 그가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맥이 확, 하고 풀리더군요. 그래서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집을 살짝 엿보았는데, 주인 여자가 어린아이를 업고 마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지요. 순간, 나도 나지만, 한 집의 가장을 잃은 그 여자가 어찌 그리 불쌍하게 보이는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다, 힘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마침내 우리는 어제 못 올라갔던 폭포 입구에 도착했다. 쌍계사 북쪽 3㎞ 지점에 펼쳐진 불일 평전에서 약 4㎞ 들어가 있는 이곳, 높이 60m로 전국에서 몇 번째 안가는 폭포로서 백천단애의 비폭과 오색 무지개, 한여름에도 냉기를 느끼게 하는 장쾌한 물줄기는 가히 장관을 이룬다는 불일폭포를 이틀 만에 온 셈이었다.

폭포 입구에 다다르자 뿌연 안개가 장엄하게 드려져 있었다. 안개 사이로 우리보다 먼저 온 등산객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김을 토하며 폭포의 웅장함에 관하여 말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좌측 샛길을 통해 언덕 위로 올라갔다. 중간쯤에서 본 폭포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아래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안개와 어우러진 폭포의 광경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황홀감이었다. 이쯤에서 나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삶이 얼마나 하잖고 보잘것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현실에서 버둥거리는 인간이 아닌 폭포 위를 떠다니는 물방울이 되어버린 민주가 오히려 부럽게 생각되었다.

폭포 정상이었다. 우측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그는 짊어진 배낭을 풀고 돗자리를 비롯한 초 한 자루, 향 두어 개, 마른 명태 그리고 소주 한 병을 꺼냈다. 그의 어깨를 줄곧 압박하던 무거운 짐이 비로소 떨어져 나온 셈이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 묘한 빛이 나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에게서 가장 숭고하고 절실한 의식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가 물러서자 그는 곧 무릎을 꿇었고 그의 뒷모습에선 엄숙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오랜 방황이 끝나, 두 번 다시는 민박집 남자와 그녀가 잠들어 있는 이 폭포에 오지 않았으면, 하고 말이다. 그런 상념으로 내가 지리산 불일폭포 위에 깊숙이 서 있을 때였다. 사월에 벚꽃이 내리듯 이곳의 소담스러운 눈이 내 머리 위로, 폭포 위로 사박사박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