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작가

그게 결정적이었다. 나는 그만 숨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녀의 남편이 안내한 여자는 민주가 분명했다. 이런 기이한 인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박은 이 사실을 알고도 짐짓 모르는 척, 폭설이 쏟아지는 날에 여기로 왔단 말인가.

나는 얼른 삼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민박집 내외와 우리 넷이 밤새워서 놀 때였다. 새벽녘에 나는 언뜻 주인 남자의 표정을 본 적이 있다. 해맑은 눈빛으로 민주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박은 술에 곯아떨어지고 민박집 여자는 애가 보채는 바람에 먼저 방에 들어갔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나와 지금의 아내가 된 김 간호사와는 달리, 민주는 주인 남자와 문학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듣기에도 둘은 문학에 해박했다. 평소 차갑고 이지적인 민주였지만, 그날만큼 그녀는 청초한 문학소녀였다. 주인 남자의 깊이 있는 논조에 민주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둘은 평상이 따분하다며 냇가로 내려갔다. 컴컴한 냇가에 앉아 있던 그들을 보고 나는 무슨 마음엔지 둘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민주가 피곤하다며 평상 구석에 누우려 할 때, 그는 모기향을 피워주었고 이부자리를 깔아주었다. 그런 그에게 민주는 다음 날 아침, 어제 고마웠다며 올겨울에 다시 오겠다고 하자, 그는 명함을 건넸다. 서로에게 매료되었던 민박집 남자는 그 겨울에 정말 민주가 연락하자, 폭설이 내리는 날이었음에도 두 말없이 나갔을 것이다.

문득 민주가 생각났다. 당시 그녀는 늘 책을 가까이했고, 문학에 대한 외경이 남달랐다. 병원에서 야간근무할 때 그녀는 항상 책을 보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의 얼굴은 빛이 났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늘 우울했고 눈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언젠가 나는 박에게 민주의 ‘우울의 근원’에 관하여 물은 적이 있다. 박은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의 가족사를 잠깐 소개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여동생의 정신병 발현, 오빠의 가출, 가난한 집안의 장녀의 의무 등….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다음 날, 날씨는 활짝 개어있었다. 간밤에 주인 여자와 늦게까지 술을 마신 나와는 달리 그는 모처럼 잘 잤는지 나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 우리는 주인 여자가 차려 준 아침밥을 먹고 다시 폭포로 향했다.

쌍계사엔 날씨 탓인지 제법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대웅전에 들러 조용히 합장했다. 마치 이때부터 민주의 넋을 달래는 양, 그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경이로웠다. 그의 경건한 의식이 끝나고 우리는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눈 덮인 등산로엔 우리보다 앞선 사람들의 발자국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널찍한 바위에 쉬어갈 때 그는 어젯밤 나와 주인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었다. 아마 잠이 깨어 평상 위에 앉아 있던 우리를 본 모양이었다.

“그 집 남편 얘기를 좀 했어.”

그러자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왜요?”

나는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조심스러웠지만, 이왕 꺼낸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해 겨울에 사고로 죽었다 하네. 폭포 안내하던 어떤 여자가 그길로 자살하는 바람에 충격받아서 말이야.”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두어 발자국을 먼저 떼었다. 나는 순간,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기대하며 더욱 내질러버렸다.

“그때 그 남자가 안내했던 여자가 민주야!”

나는 그의 등 뒤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성큼성큼 걷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형님! 그건 중요한 게 아입니다.”

그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 뭐가 중요한 데?”

나도 이참에 민주의 죽음에 관하여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녀에 관하여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녀가 폭포에서 떨어진 다음 날 그는 그곳에 다녀왔다. 그 후로 그는 한 달가량 집에만 틀어박혔다. 나와 아내가 찾아갔을 때, 그는 민주는 자기가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에 우리는 단순히 연인을 잃은 한 남자의 절규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민주의 자살에 관한 어떤 명백한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언덕을 오르고 또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심한 갈증이 일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에게 물을 달라며 먼저 말을 붙였다. 그제야 그는 못 이긴 채 물을 건네며, 말을 꺼냈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그 민박집 남자가 병원으로 몇 번 전화가 왔습니다. 민주는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지만, 난 다 알고 있었죠.”

그의 얼굴은 침울하다 못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둘이 만난 적도 있지요. 그 남자가 병원 근처로 왔습니다. 갈수록 민주는 소박하고 순수한 그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확인하니 기숙사에도 안 들어왔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