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 논설위원

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나의 책장에는 중국책이 많이 꽂혀있다. 그 중에는 내가 유학하던 중국 무한대학 도서관의 책이 적지 않다. 이들 ‘책등’에는 대학 도서관의 라벨이 그대로 붙어있고, 책 곳곳에는 도서관 전용 인장이 찍혀있다. 어찌 도서관 책을 개인이 소장하고 있을 수 있는가? 사정을 모르는 이는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사정은 이렇다.

무한대학 도서관에서는 정기적으로 책을 정리하곤 했다. 한정된 공간에 신간 도서가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너무 낡았거나 중복되는 책들은 어쩔 수 없이 폐기처분을 했던 거였다. 때가 되면 도서관 앞에 처분할 책들을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져가도록 했다. 최소한의 책값을 지불하고…. 하지만 책값은 그저 폐지 값 정도의 수준이었다. 도서 처리하는 날은 교수나 학생들이 책 잔치를 하는 날이었다. 눈만 잘 뜨면 횡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하루는 우연히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는데 마침 행사 날이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셈이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날 자전거로 몇 번을 오가며 책을 실어 날랐는지 모른다. 지금 내 책꽂이에 꽂힌 도서관 직인이 찍힌 책들은 너무나 우연적인 그날, 운명처럼 인연을 맺게 된 책들이다.

살다보면 이처럼 뜻하지 않게 재수가 좋은 날이 더러 있다. 아무런 계획이나 의도도 없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소중한 기회를 얻거나 물건을 손에 넣기도 하고, 또 남으로부터 귀한 인사를 받게 되기도 하는…. 내가 올해 아내에게 과도할 정도의 감탄과 감사의 인사를 받은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이 또한 비슷한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아들이 이발을 하러 간다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아는 꽃집 건물에 있는 미용실이라 했다. 순간, 지인의 꽃집 근황이 궁금했고, 코로나19로 꽃을 필요로 하는 여러 일정들이 취소되는 바람에 많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간 김에 엄마가 좋아하는 프루지아 꽃 한 다발 사 오라고 부탁을 했다.

특별히 풍성하게 싸주시더라는 꽃 한 다발을 거실에 앉혀놓으니, 분위기도 분위기려니와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퇴근한 아내가 꽃을 보더니, 연발 감탄을 쏟아냈다. “와~ 꽃이네! 당신이 샀어요? 나는 아무 것도 준비 못 했는데….” “준비라니…, 뭘 준비 못 해요?” “결혼기념일 선물요!” 그랬다. 바로 그 다음날이 우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던 것이다. 실은 며칠 전, 기념일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긴 했었지만 금세 잊고 있었다. 그래서 꽃은 기념일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산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는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내가 보여줄 반응은 두 가지일 수 있었다. 하나는 그냥 우연이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치 사랑으로 충만한 남편이 아내를 위해 마련한 선물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여차여차해서…. 이유야 어떻든 거실의 일부가 된 꽃 한 다발의 가치는 우리 식구들의 눈과 코를 행복하게 해 주는데 최고의 선물이 되어 주었다.

언젠가 누가 아내에게 묻더란다. “요즘은 생활이 안정되어 참 좋지요?”라고…. 그래서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예, 참 좋아요. 오랫동안 힘들게 살 때는 자장면 한 그릇도 고민해서 사먹었는데, 요즘은 별로 고민 안 하고 시켜먹을 수 있어서 좋고요, 한 때는 남편이 생일 선물로 꽃을 사 오면, 그런 데 쓸 돈 있으면 현금으로 달라고 짜증을 부렸는데, 지금은 꽃다발을 받으면 화가 나기보다는 기뻐할 수 있어서 그런 게 참 좋아요.”

세상엔 안타까운 죽음이 둘 있다고 했다. 돈만 ‘벌다가’ 죽는 사람과 돈만 ‘벌어놓고’ 죽는 사람이란다. 살아가는데 절약정신도 중요하지만, 필요할 땐 돈도 적절히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충고로 들린다. 꽃다발 하나에 기뻐하는 아내를 볼 수 있어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