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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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 하동군 하동읍 비파리에 갔더니 사람은 안 뵈고 어두운 시대처럼 흐르는 소나무만 빽빽이 서 있더라

비 오는 날은, 하동군 하동읍 비파리 사람들은 가슴이 비어 어두운 시대처럼 흐르는 강가 나가 발 벗고 우두머니 선채 조선의 슬픔에 흠씬 젖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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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하동읍 비파리에 갔더니 정숙한 조선조 여인의 걸음새 마냥 가만가만 내리는 명주실 같은 빗발을 타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한 서린 꽃잎이 하늘 하늘 떨어져 내리더라

언뜻 갈라진 수묵빛 하늘 틈새기로

소복 입은 어머니의 파아란 눈썹이 보이더라

비 오는 봄날에 하동군 하동읍 비파리에 가본 사람은, 사람은 죽어서도 살아 있음을 아니 믿지 못하겠더라.

-. 봄날의 비는 세차지 않다. 바람 또한 이슬을 털어낼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한 날, 어둑시근한 하늘과 그를 닮은 강물을 타고 범종음이 건너온다. 강위를 건넨 범종음 역시 빗물에 젖어 있다. 시인도 젖어 있다. 젖은 시인의 마음으로 아픈 역사가 꽂힌다. “역사는 이긴 자의 힘이고, 패배자의 군소리”라하지만, 이 강가에 서면 시인의 마음은 자신의 몸처럼 아프다. 아린 핏물이 아직도 배여 나올 것만 같은, 그 사연들 세세하게 눈으로 쓸어 담았을 수백의 고목들 마음을 닮아 간다. 하여 지난 역사도, 아픈 역사도 우리들 모두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사람은 죽어서도 살아 있음을/아니 믿지 못하겠다”고 하동군 하동읍 비파리에 가면 다 안다. - 최영욱 -

► 백청 황선하 시인(1931~2001) 창원시 출생으로 1960년대부터 40여년간 창원·마산·진해 등에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왔다.

시인은 박두진 시인에 의해 '벽(壁)', '거울', '밤' 등이 '현대문학'에 추천돼 문단에 등단했으며, 옛 진해시에서 문학회를 조직하고, 한국문인협회 진해시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1년에 작고한 시인의 시비가 창원시 의창구 용지호수 인근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