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하아무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난 일이란다. 알고는 있으라고, 아까 시누가 전화를 했더라.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녀도 더 이상 자세히 덧붙일 정보가 없는지 말이 없다. 침묵이 흐른다. 하하하, 우리 딸. 오랜만에 아빠랑 놀이동산 오니까 기분 좋지, 그렇지? 응, 당근이지. 근데 나보다 엄마가 더 기분 좋을 걸? 드라마 속 가족만 신났다. 나는 리모컨을 쥐고 그 가족을 텔레비전에서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CD를 틀었다. 내가 갖다 둔 김윤아의 CD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 아직 남은 님의 향기 /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새 맥주를 들고 와 일부러 ‘뻥’ 소리 나게 따고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 좀 낫다 싶다. 그리고 다시 침묵. 만일, 경숙이가 보름쯤 지나 제 남편이 죽었다고 전화를 해온다면? 그냥, 알고 싶어할 것 같아서, 알고는 있으라고 한다면?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새끼 내가 죽이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 말은 믿기지 않는다.

제 남편을 가로챈 계집애의 머리채를 잡아보지도 못 했으면서, 싶어도 말은 하지 않았다. 정말 무능한 인간이었거든. 잘 생기길 했나, 키가 컸나, 재미있는 이야기 할 줄도 모르고, 잘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취미도 없고, 밤일조차 시원찮았거든. 그런데 그렇게 예쁜 중국년을 꼬실 수 있는 능력을 어딘가 나 몰래 꼬불쳐 두었다고 생각하자 그 새끼가 진짜 미운 거야. 그래, 언젠가부터 속으로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어떻게 죽일까, 궁리도 해봤어. 그런데 이젠 절망스러워. 이미 죽어버렸으니, 내가 죽일 수가 없잖아.

부관참시(剖棺斬屍)라는 말이 생각났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맥주를 가져다가 ‘뻥’ 소리 나게 땄다. 다시 침묵. 오늘 빠리 이야기 영업은 이걸로 끝났다, 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술시가 지나고 해시가 되었다. 술 그만 마시고 해. 하기는 뭘 해, 난 술 먹기 전에 벌써 했는데. 재수 없는 그 새끼, 죽이고 싶은 그 새끼랑. 나는 속으로 말장난을 했다. 그 새끼라면 부관참시를 해도 시원찮을 거야. 그때 딸랑딸랑, 빠리 이야기의 문에 걸려 있는 요령이 울었다. 사내 둘, 백제고시원의 강주대와 이기원이다. 누야, 누야가 여게 있을 줄 딱 알고 왔다아이가. 여류 소설가님, 안녕하셨습니까? 둘은 이미 술을 꽤 마신 듯 얼굴이 불콰했다. 한 잔 했으면 들어가 잘 일이지 돈도 없는 새끼가 여러 차 갈아타고 다니냐. 면박을 주면서 보니, 한 벌밖에 없는 양복을 빼입었다.

면접을 보러 갔었던 모양이고, 또 보기 좋게 미끄러져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에이, 예쁜 누야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왔는데 그카먼 서운하제. 마담아지매, 우리 입가심하구로 맥주 쪼매 주이소. 마, 오늘 같은 날은 한 잔 이빠이 빨아도 괘안타. 맞다, 마시고 죽자. 씨펄,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기원도 맞장구를 쳤다.

둘은 나란히 붙은 방에서 형님 동생 하며 지냈다. 일용직 잡부 일을 하는 용식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