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령 시인의 『입하 무렵』

명치 끝 눅눅한 습기, 악양 너른 들판에
한나절쯤 말리면 꼬들해진다

산중에서 도망친 토끼처럼
눈 속에 머리만 숨긴 수꿩처럼, 쫓기는 날

한 발 옮기면 발에 딸린 몸이 옮아가듯
눈빛이 내는 길, 따라가길 바랐으나

자주 길을 잃은 마음

바람과 햇살에 멋대로 늙어가는 나무와
바람보다 가벼운 발자국 찍으며 어슬렁거리는
늙은 시인의 구부정한 어깨를 떠올리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구불구불 흐르다 말다 하는
강물이 되어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입하바람에 씨나락 몰리듯
핏줄기가 온통 남으로 쏠리는

입하 무렵, 평사리 간다.

‣. 과연 평사리는 피안인가? 천하의 시인묵객들이 지리산과 섬진강과 평사리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쏟아낼 때 이들은 “평사낙안”을 꿈꾸는 것이다. 살아가야 한다는 당면한 일이 버겁고, 무거울 때 또는 “산중에서 도망친 토끼처럼/눈 속에 머리만 숨긴 수꿩처럼. 쫓기는 날”평사리행을 꿈꾸는 시인, 그 평사리에 가면 시인의 친정어머니 같은 ‘박경리’문학 혼이 살아 있고, 시인이 살던 곳과는 다른 바람이 일고, 그 바람결이 소곤대는 말에 홀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며 또 다른 거처를 희망하는 것이다. 허나 당면한 삶은 늘 녹록치 않아 시인은 서둘러 발길을 살던 세상으로 옮기며 다시 ‘입하’를 기다릴 터
하여, “입하바람에 씨나락 몰리듯/핏줄기가 온통 남으로 쏠리”는 “입하 무렵”시인은 평사리 행을 기대하면서 또 한 세상을 잘 살아낼 것이다. 입하, 그 연두와 초록의 경계. -최영욱 

※. 김 령 시인은 전라남도 고흥군 출생으로, 2014년 평사리문학대상 시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현 광주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