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삼라만상의 건반을 두드려주는 연주자요, 그 소리는 음악이다. 봄비, 가을비, 겨울비가 실내악이라면, 여름비는 교향악이요, 군악이다.
여기에 천둥은 북소리가 되고, 번개는 심벌즈가 된다.
또 비에는 리듬이 있어 마치 춤곡인 양 들려 우리의 대중가요에도 <비의 블루스>, <비의 탱고>란 노래도 탄생된 것이다.
물이 증조할머니요, 수증기가 할머니요, 구름이 어머니라면, 비는 그 딸이다. 또 역순환으로 보면 비는 물의 어머니도 된다. 비는 땅으로 보면 스프링클러의 분무다. 링거 주사액이 되고 산천초목의 젖이 된다. 효녀 중 효녀다.
더 나아가 보면, 지상의 먼지나 때를 씻어주는 세탁기요, 청소부다. 또 있다. 비 온 뒤 자연의 모습을 더 한 층 맑고 청신케 해주는 세안수다. 비 온 후 하늘을 보라.
그 얼마나 생기가 돌고 청신해 보이는가.
특히 농경사회의 우리 조상들은 하늘과 비에 늘 의존해 살았기에, 마치 에스키모인들이 항상 접하는 것이 눈이라 그 이름이 많듯이 비의 이름이 다양하고 많다. 저 멀리로는 우리 민족이 해양민족이나 유목민이 아니었고, 또 근대 산업국가도 아니었기에 오로지 농사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던 결과이다.
계절별로 내리는 비의 이름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름에 정말 어울리는구나 싶은 또 다른 이름들이 재미가 있다. 봄에는 비가 오면 할 일이 많아지므로 일비, 여름에는 비가 오면 낮잠을 자기에 안성맞춤이라 잠비, 가을걷이가 끝나고 비가 오면 떡을 해먹으며 여유롭게 쉴 수도 있어 떡비, 겨울에는 농한기라 술을 마시며 놀기 좋기에 술비가 된다. 빗줄기 모양이나 굵기에 따라 안개비, 는개, 가루비, 꽃비, 이슬비, 실비, 가랑비, 보슬비, 부슬비, 싸락비, 주룩비, 채찍비, 장대비, 작달비, 땅을 다지는 데 쓰이는 달구 같은 쇳덩이처럼 거ㅔ세게 내리꽂는 달구비, 억수가 있고,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는 우레비도 있다.
내리는 시간이나 기간에 따라 도둑비, 해비, 한참 내리다가 잠시 그친 웃비, 여우비, 소나기. 장맛비가 있다. 특히 여우비에는 내 유소년 시절의 추억이 어리어 있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나는 맑은 날인데도 잠깐 뿌리다 마치 여우가 꼬리를 감추듯 금방 사라지는 이 비를 두고 소 먹이던 시절, 단발머리 또래의 소녀들을 일부러 골려도 줄 겸 ‘호랑이 장가 간다.’고 혼자 아니면 어울려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던 추억이다. 그 소년, 그 소녀들은 장가 들고 시집가서 지금 어디에 살고,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직접 농사와도 관련 있는 또 다른 이름도 많이 있다.
못자리하기에 알맞은 낙종물, 모낼 무렵 한목에 내린 목비, 모를 다 낼 만큼 흡족한 못비, 그리고 모종하기에 알맞은 모종비가 있고, 갈수기에 내리는 단비, 약비, 꿀비도 있다.
아무튼 비는 농사와 직접적이며 결정적인 연관이 있기에 우리 조상들은 비를 기다리며, 비 올 징조를 읽고, 날씨 점을 쳐보는 지혜를 보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