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 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건 어쩜 신이 주신 가장 축복의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 아닌지 모른다. 왜냐면 삶에 이상이 생겼을 땐 평범한 하루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잠도 잘 잤고, 그런대로 굶지 않았으며,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큰 불편함 없이 지냈다면 더 없이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건 또 건강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감사의 마음은 보통 ‘지각(遲刻)’을 많이 한다. 건강하게 살아갈 때는 모르고 살다가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야 비로소 그동안의 감사를 깨닫게 되기에 그렇다. 신체 각 부분이 자기 기능을 제대로 해 줄 땐 그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다가 문제가 생기게 되면 ‘아, 여기에 이것이 있었구나.’ 깨닫게 된다. 올 연초, 아내가 겪은 일도 이런 현상 중의 하나다. ‘그냥’ 피부가 ‘그냥’이 아닌 대단한 ‘축복’이고, 그러기에 감사할 일임을 깨닫게 된 일이 하나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아내 몸에 원인 모를 작은 뾰루지가 이곳저곳에 생겨나서 가렵기 시작,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긍긍했지만 ‘알레르기’라는 의사 소견만 들을 뿐이었고, 그 어떤 처방도 가려움증을 멈추게 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숯가마 찜질이 효과가 있더라는 지인의 말이 생각나 효과가 있든 없든 그냥 우직하게 꾸준히 한 번 다녀보기로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있듯, 바쁜 일과 때문에 그동안 한가로이 찜질을 하러 다닐 수 없었기에, 가려움증을 핑계 삼아 이 계제에 ‘억지’ 힐링이라도 한 번 즐겨보기로 한 것이다.

옛말에 ‘만물개위오사(萬物皆爲吾師)’라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의 스승이다.”란 의미다. 여기서의 스승이란 어떤 물건이나 현상, 그리고 사람일 수도 있다. 숯가마에 찜질을 하러 간 건 가려움증 때문이었지만, 이곳에서 얻을 수 있었던 건 원래의 목적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배울 수 있었으니, 전해지는 옛말의 이치가 참으로 빈말이 아님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숯가마엔 세상사에 해박한 인생 훈수꾼도 많았고, 민간요법의 스승도 적지 않았다. 불을 멍하게 바라보는 ‘불멍’도 내 지친 영혼의 스승이 되어 주었고, 흐르는 땀방울도 수많은 의미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숯가마에서 일하고 있는 어느 외국출신 종업원과의 소통에서 생긴 에피소드 하나도 내게 미소를 머금게 해 주는 추억이 되었다.

숯가마엔 식당도 있고 또 간단한 음료도 팔았다. 땀을 흘려 갈증이 나면 시원한 음료가 생각나게 된다. 우리 부부도 잠시 평상에서 땀을 식히던 중에 음료가 생각났다. 그래서 매점에 가서 ‘단술’ 한 통을 주문했다. 그런데 아직 한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탓인지 외국인 종업원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수차례 반복해서 천천히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하자, 마침내는 사장님이 나와서 한 마디 하셨다. “아니, ‘식혜’라고 말을 해야지 ‘단술’이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오잉…?”

알고 보니, 문제는 한국말에 서툰 종업원에게 있었던 게 아니라 내게 있었던 셈이었다. 뒤늦게 메뉴판을 봤더니 ‘단술’이란 말은 없고 ‘식혜’로 적혀 있었다. 그러니 종업원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식혜’라고 해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고장 하동에서 배운 언어를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했던 것인데 외국인에게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단술’이나 ‘감주(甘酒)’나 ‘식혜’나…, 이런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

다행히 아내의 가려움증은 부지불식간에 다 나았고, 이에 지금은 불편함 없는 일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렵지 않은 날이 계속되다 보니 또 다시 감사하는 마음은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간혹 기분 좋게 출근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아내 대신 흥얼거리곤 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