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요 몇 년 동안 코로나19로 우리는 소중한 일상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할 수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맘대로 만날 수 없었으며, 가고 싶은 곳을 맘대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엔 감염자 확산이 좀 완화됨에 따라 요모조모 행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행사를 할 때 조심스레 부담을 가지고 결정을 하곤 한다. 듣자하니 지난번 화개초등학교 총동문회 행사도 이런 고민을 거쳐 가까스로 거행이 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화개초등학교 졸업생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번 이 학교 행사에 참석을 했다. 총동문회 회장의 부탁을 받아서다. 사연인 즉, 적은 예산을 가지고서라도 프로그램을 좀 다양하게 구성하려다 보니 내 생각이 나더란다. 그래서 졸업생은 아니지만 화개가 고향이니 잠깐이나마 출연을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던 것이다.

행사는 축복 속에 진행됐다. 쾌청한 가을 날씨는 참석한 동문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주었고, 몇 년 만에 만난 동문들은 서로의 건재함을 축하하며 웃음꽃을 피워냈다. 나 역시 초등학교 동문은 아니지만 중학교에서 동기가 된 친구들을 만나 반갑게 회포를 풀 수 있었으니,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지로 분장하여 촌극 하나를 공연했다. 동문회 잔치에 찾아온 거지가 날씨도 좋고 분위기도 좋다며 너스레를 뜬 다음, 모두가 함께 <고향의 봄>을 ‘떼창’할 수 있도록 선창을 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화개…” 순간, 거지의 어눌한 노래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시켰는지, 단번에 하나가 되어 ‘떼창’으로 가을 하늘을 크게 울려주었다. “십리벚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흰 동네, 화개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나의 촌극은 시시한 몸짓에 불과했지만, 풍금에 따라 초등학교 때 배운 그 추억의 동요는 모든 이들의 감정 선을 건드렸고, 그 울림은 뭣보다도 컸으리라 생각되었다.

나의 행복은 여러 출연자들의 재기 발랄한 노래 솜씨와 장기를 감상하면서 극치를 만끽했다. 어쩌면 그렇게 다들 노래를 잘 할까. 어쩌면 그토록 감정 표현과 몸동작이 자연스럽고 멋질 수 있을까? 구경을 하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었다. 가사를 암기 못한 출연자들이 햇빛에 반사된 모니터 속 가사를 볼 수 없어 애를 먹던 모습이다. 그런 출연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반사된 빛을 아무리 차단해 보려고 해도 쾌청한 가을의 날씨와 햇빛은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과학문명이 발전해갈수록 기억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막 때문에 노래 가사를 암기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고, 핸드폰 저장 기능 때문에 전화번호를 암기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막을 볼 수 없는 환경에선 노래 한 곡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전화기에서 번호를 검색하지 않고는 식구 전화번호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살다보니 깨닫게 된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그 ‘무엇’이라 해도 그것이 다방면에 다 유익한 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한쪽이 좋으면 다른 한 쪽은 안 좋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기뻐하는 일에 누군가는 한숨을 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린 어떤 현상에 너무 호들갑을 떨거나 지나치게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한 번 해 보게 된다.

노래는 가사를 완벽하게 외워서 불러야 제 맛이다. 자유롭게 완급을 조절해 가며 가사를 ‘가지고 놀아야’ 흥이 더 나고 자신감도 충만해진다. 모니터에 물들어가는 가사를 따라가며 노래를 하다 보면 가사에 대한 감동도 별로 느낄 수 없고, 내가 기계의 하수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도 간혹 있다. 나의 경험을 말하자면 그렇단 말이다. 그래서 난 평소 노래 가사 외우는데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특별히 콧노래는 내 행복의 밑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