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내게 특별한 사진 한 장이 있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출연해서 국제적 명배우가 된 오영수 선생과 찍은 사진이다. 선생과의 만남은 약 20년 전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국립극장 분장실에서 이뤄졌다. 내가 번역한 연극 ≪뇌우(雷雨)≫에 선생이 출연했던 인연 때문이다.

나는 중국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때, 중국 현대극작가 조우(曹禺, 차오위) 선생이 쓴 세 권의 작품을 번역･출판한 적이 있다. 그 중에 ≪뇌우≫란 작품이 있다. 이는 조우가 대학생일 때 쓴 최초 작품이지만 현재까지 중국에서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없다할 정도로 유명한 극작이다. 작품의 비극성과 예술성은 그를 ‘중국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까지 갖게 해 주었다.

≪뇌우≫는 우리나라 연극사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50년 국립극단이 이 작품을 공연했을 때, 관객 7만5천 명이 관람했고 이 ‘돌풍’은 당시 서울 사람 6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작가가 공산국가 출신이란 이유로 오랫동안 그의 작품은 공연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세상이 바뀐 2004년, 이윤택 연출가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되었고, 특히 내가 번역한 극본으로 공연이 이뤄지게 되었으니 내겐 더 없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은 2시간 정도로 압축해서 공연을 하지만, 당시 이윤택 예술감독은 원작 내용을 삭제하지 않고, 30분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총 4시간 30분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휴식시간에는 극장 로비에서 김밥과 우동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작품이 공연되기 전, 분장실에서 잠깐이나마 선생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었던 건 참으로 행운이었다. 그랬던 선생이 세계적 배우로 우뚝 서고 보니 더 없이 자랑스럽고 기쁘기만 하다. 당시 선생이 연기했던 배역은, 유학 중에 중국극단에서 ≪뇌우≫를 공연 할 때 내가 맡았던 배역과 동일한 인물이어서 묘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오징어게임’으로 큰 상을 받은 이후 선생을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선생은 대답했다. “우리 사회가 1등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흘러갈 때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승자는,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승자고, 그렇게 살면 좋겠어요.”

어록으로도 남을만한 선생의 귀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적든 크든 많이 받아왔으니” “살면서 받았던 모든 걸 남겨주고 싶은 생각”이라고 했다. “산속에 꽃이 있으면 젊을 땐 꺾어가지만, 내 나이쯤 되면 그냥 놓고 오지요. 그리고 다시 가서 보지요. 그게 인생과 마찬가지죠,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 선생은 “제가 우리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름다움’이란 말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름다운 두 분을 만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선생의 말은 달변도 아니었다. 멋있게 보이려는 모습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깊이가 있었고 울림이 컸다. 여성 사회자는 감격하여 눈물까지 훔쳤다. 참으로 멋지고 훌륭하신 배우임에 틀림없었다. 78세 ‘청년’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정신적 ‘깐부’ 오영수 선생, 골든글로브 수상 바로 다음날에도 그는 어제의 영광은 다 잊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무대로 돌아가 공연을 했단다. “아름다운 삶을 사세요.” 선생의 당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인생 후반에서라도 꼭 그 뜻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아름다운 내 고향 하동에서, 아름다운 이 가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