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 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연일 폭염으로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럼에도 식물들은 오히려 축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느 구멍가게 앞 빨간 고무통에는 고추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어지간한 텃밭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건강하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그 가게 주인의 지혜와 정성에 감탄을 한다. 매년 이삼십 개 되는 고무통 농사로 풍성한 고추를 수확하는 그 도시 ‘부농(富農)’의 모습이 참으로 멋져 보인다.

나보다 아내 반응이 더 폭발적이다. 부러워하는 기색이 더 역력하다. 실은 아내의 로망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가면서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을 한 두 개씩 가지고 살아간다. 아내에게도 그런 소망이 하나 있다. 텃밭이 딸린 한옥에서의 삶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채소들을 텃밭에 다양하게 심어놓고 틈나는 대로 모종도 심고 김도 매고 물도 주고…. 그러다가 힘들면 툇마루에 앉아 햇살도 즐기고, 낮잠도 자고….

그런데 살다보면 알게 된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른다. 도시 출신이 농촌에 정착하여 먹거리를 생산해 가며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물론 농촌생활을 즐길 줄 알고 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시골 한옥에서 약간의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기본은 갖춘 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남이 하는 건 쉬워 보이고 좋아 보이는 법이다. 몇 년 전, 아내도 고추농사에 도전을 해 본 적이 있다. 다름 아닌 ‘베란다 농사’로 말이다. 어느날 부푼 꿈을 안고 고추 모종을 열 포기 남짓 사다가 베란다에 심었다. 매일 쑥쑥 자라는 모습에 한껏 고무되었고, 여러 고춧대에서 꽃이 피어오를 즈음에는 춤을 출 듯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꽃이 진 자리에 고추가 하나도 열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해 고추농사는 그렇게 ‘꽝’으로 끝나고 말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뒤늦게 알았다. 원인은 너무나 ‘사소’한 것에 있었다. 아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에 있었다. 방충망 때문에 벌 나비가 들어오지 못했고 그래서 수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랬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시골 출신임에도 이런 기본도 몰랐던 것이다. 무지의 소치다. 자연수정이 어려울 땐 붓으로 인공수정을 해 주면 된다고 해서 그 이듬해에는 붓으로 수정을 해 줬지만 역시 꽃은 다 곪아 떨어지고 수확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재미로 로즈마리도 심어보고 바질도 심어보고 가지도 심어보고 방울토마토도 심어봤지만 결과는 늘 실망으로 끝나곤 했다. 다만 토마토는 몇 개 결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보기에도 민망하고 불쌍할 정도에 그쳤다.

나도 언젠가는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로 돌아가 여생을 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진 않았다. 하지만 돌아간다 할지라도 아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농사에는 크게 애착이 없다. 왜냐하면 고생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농사를 지어도 내가 기억하는 그런 고생은 없고, 오히려 힐링의 방편으로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농사에 손을 댔다 하면 조금이라도 더 잘 지어보려고 애를 쓰게 될 것 같고, 그러다 보면 내 삶에 과부하가 걸려 너무 힘들 것만 같아서 그렇다. 특히 아내는 일거리만 만들어 놓고 마루에 누워 지시만 할 뿐, 뒷감당은 ‘돌쇠’인 내가 다 해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고추 하나도 그냥 열리는 게 아니다. 200원짜리 모종 하나만 사다 심으면 끝이 아니란 말이다. 그냥 달린 것 같아도 그 자그마한 고추 하나가 빨갛게 익기까지는 수차례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수많은 땀과 정성, 걱정과 기도를 필요로 한다. 인생, 멀리서 바라볼 땐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다. 농사 역시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