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분은 눈을 떴다가 감는다. 가슴이 뻐근하고 통증이 엄습하는지 그녀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숨을 삼키며 천천히 숨을 쉰다. 손가락에 힘이 없다.

잠을 자던 말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정혜의 얼굴을 보더니 꿈을 꾼 듯 말했다.

“덕이니. 순덕이 온 거야?”

“엄마, 왜 그래요?”

정혜가 말분을 흔들자 그녀는 한기가 드는지 떨고 있다. 정혜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준다.

“순덕아! 덕아, 네 딸이 정말 잘 자랐어. 보고 있니?”

그날 순덕은 말분을 불렀다. 밤새 순덕은 배를 움켜잡으며 말분에게 어디 가지 말고 자기 옆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진통하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순덕은 새벽이 밝아올 때 딸을 낳았다.

“이름은 벌써 진우 오빠가 지어주었어. 정혜라고.”

땀에 흠뻑 젖은 순덕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진우 오빠는 그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심란해했다. 순덕이 마지막으로 진우 오빠를 만났을 때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건네주었다. 순덕은 오빠가 주었다는 시계를 말분에게 주었다. 말분은 순덕이 시키는 대로 가위로 보드라운 탯줄을 끊었다. 하혈을 심하게 한 순덕은 아기를 부탁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아기를 만져보았다. 작은 두 손과 두 발,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는 모습까지. 주름진 아기는 신비로웠다. 말분은 아기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다음 날 의사가 도착했을 때 순덕의 숨은 멎어 있었다. 그녀의 치마 아래로 검붉은 피가 엉긴 상태였다. 갓난아기를 안은 말분은 경찰서에서 조서 작성을 위한 진술을 했다. 술도가 집 순덕 엄마가 찾아와서 죽은 딸 앞에서 엎드려 울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주검을 하얀 천에 싸서 가져갔다.

진주에 사는 진우 오빠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사대 독자인 외동아들의 핏줄이라고 했다. 아기가 딸인데도 반겨주니 고마웠다. 말분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시계를 내놓았다. 장진우 어머니는 말분이 아들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녀에게 아들과 혼인신고를 하라고 했다. 월남에서 소식이 끊어져 행방불명된 오빠와 혼인신고라니. 더군다나 아기는 말분이 낳은 딸이 아니었다. 말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진우 오빠의 어머니는 혹시나 아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외교부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연락을 취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진우 어머니는 반드시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며 아기 옷과 기저귀 미역국을 끓여 말분을 찾아왔다. 그다음에는 논 네 마지기와 대나무밭 문서를 들고 나타났다.

“너는 내 며느리야. 딸이지만 자식이라곤 하나밖에 없으니 귀하디 귀한 핏줄 아니겠니? 땅을 너 앞으로 이전해 줄 테니 우리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꾸나?”

말분이 잠을 자다 뒤척인다. 그녀의 귀에 시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실종된 진우 오빠가 돌아오지 않아 끝내 혼인 신고는 하지 못했다. 사대 독자라며 눈시울을 적신 시어머니는 논과 대나무밭의 등기부등본을 그녀에게 내놓았다. 진우 오빠의 어머니는 자주 찾아왔다. 고사리 같은 어린 손녀를 쓰다듬으며 옷을 갈아입히기도 했다.

새벽녘 말분은 부엌으로 가 정혜가 쪄놓은 소담스러운 쑥범벅을 바라본다. 쑥범벅 위에 벚꽃이 피어난다. 만개한 벚나무들 사이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말분은 진우 오빠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신이 나 두어 발짝씩 스텝을 밟으며 걷는다. 그들 머리 위로 연분홍 꽃잎이 떨어진다.

말분이 방으로 들어와 반듯하게 이불 위에 눕는다. 눈앞에서 길게 자란 대나무들이 공중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질투와 증오는 너무나 사사로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듯 대나무의 끝자락은 쉼 없이 부딪친다. 머리가 환해지고 등줄기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말분은 눈을 감는다. 그녀의 목에 붉은 무엇이 걸린 것 같다.

정혜가 방문을 열자 말분이 조용히 누워 있다.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보았다. 어깨가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엄마 왜 많이 아파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엄마! 엄마!”

정혜가 참았던 질문을 한다.

“엄마, 그때 왜 순덕의 아기를 안고 대나무밭으로 간 거죠?”

엄마는 엷은 미소만 보일 뿐 말이 없다.

“그 오빠에게 자식이 있었다며, 딸이야, 아들이야? 그 아기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름이 뭐야? 말해줘. 엄마. 제발 알려주고 가요? 응?”

정혜는 자신이 순덕의 딸이라는 사실을, 엄마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신을 키워주었다는 사실을 직접 듣고 싶다. 엄마를 껴안고 세게 흔들어보지만 그녀의 하얀 팔이 아래로 축 처진다. 눈을 감은 얼굴은 평온한 모습이다. 베개 옆에는 쑥범벅이 푸릇한 달처럼 접시에 오롯이 담겨 있다. <마지막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