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내려온 진우 오빠는 어머니가 들려준 것이라며 가방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쑥향이 향긋했다. 안에는 어린 쑥과 쌀가루를 버무려 찐 쑥범벅이 들어 있었다. 손으로 떼어 먹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진우 오빠가 한 덩이를 떼서 말분에게 건네주었다. 말분은 쑥범벅을 입에 넣자 목이 멨다. 그녀의 가족들은 곡식이 떨어져 끼니 때우기가 힘들었다. 눈물이 어룽졌고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벚나무에 수많은 별을 달아놓은 것 같았다.

“엄마, 그게 그렇게 힘들어?”

말분은 검은 치마를 접고 몸을 움츠렸다.

정혜가 소리친다. 그러나 말분의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다. 오빠와 헤어지고 벚나무 아래 평상을 지나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순덕이가 나타난 것이다. 꼭 어딘가 숨어 있다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녀는 노란 블라우스에 자주색 벨벳 치마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옷은 긴 파마머리와 잘 어울렸다.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 검은 고무줄로 생머리를 묶은 그녀와는 때깔부터가 달랐다. 신흥 아래 합수 장터에 자주 들락거리는 순덕의 옷은 세련되면서도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엄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혜가 말분의 어깨를 잡으며 외쳐보지만, 그녀는 엷은 미소만 지을 뿐 반응이 없다. 말분은 조금 전 장롱에서 꺼내 입은 진초록 벨벳 치마를 만지작거리다 정신을 차린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떨고 있다.

“엄마! 이게 그렇게 안 돼? 전에는 편지도 쓰고 그랬잖아.”

말분은 몹시 자존심이 상한다. 옛날 순덕은 멋있었고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가져다줬다. 그때마다 그녀는 열등감을 느꼈다.

“날 바보축구로 알아? 그런 것도 못 할까 봐.”

말분이 정혜에게 퉁명스럽게 화를 내며 컴퓨터 자판에 눈을 준다. 검지를 세워 ‘ㅂ’과 ‘ㅓ’를 천천히 두드린다. 정혜가 다음 진도를 나가려는데 말분은 이내 순덕 생각에 마음을 뺏긴다.

“그때만 해도 순덕은 제 이름밖에 쓸 줄 몰랐어.”

친구 중에서 말분은 글을 제일 많이 아는 사람으로 통했다. 말분의 집에서 십여 미터 아래에는 오래된 벚나무가 계곡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었다. 말분은 열두어 명의 친구들과 함께 진우 오빠에게 한글을 배웠다.

“술도가에서 제 엄마 일을 돕던 순덕은 공부를 마칠 때면 진우 오빠를 보러 온 거지.”

노란 블라우스에 자주색 치마를 입은 순덕은 무릎이 보일 듯 말 듯 짧아서 다른 처녀들의 눈총을 받았다. 코가 유난히 오뚝하고 턱이 갸름한 진우 오빠가 말분에게 일어나 읽어보라고 시켰다. 말분은 보란 듯이 큰 소리로 글을 읽었다. 배는 고팠지만, 그 시간은 말분이 친구들과 어우러져 글공부에 대한 열정을 환하게 꽃피우는 시간이었다.

말분의 말을 듣고 있다가 ‘벚나무’를 다시 컴퓨터에 쳐 주었다. 그러나 말분은 ‘벚나무’를 치더니 ‘꽃잎’과 ‘처녀’를 천천히 검지로 두드린다.

“그때도 내가 순덕의 음침한 마음을 다 알았어. 글은 제 이름밖에 못 써도 노래는 순덕이가 젤로 잘 불렀지.”

‣ 소설가 홍혜문(본명 홍춘숙)

경남소설가 협회장, 경남 예술진흥원의 신중년 사회공헌사업 일환으로 박경리문학관에서 하동10경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