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이 소설은 경남예술진흥원의 2021년 신중년 사회공헌사업 일환으로, 평사리 문학관에서 활동 중 집필한 작품이다.

말분은 마분지에 적힌 ‘벚꽃’ 글자를 보며 망설인다. 글의 자음과 모음을 연결하여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야 하지만 오늘도 쉽지 않다. ‘벚’라는 단어를 만들려면 머릿속에서 ‘ㅂ’과 ‘ㅓ’, ‘ㅈ’을 인지하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녀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컴퓨터 자판을 일별한 후 화면을 바라본다. ‘벚꽃’이라고 쳐야 하는데 열여덟 살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열여섯 살의 말분은 연분홍 블라우스에 진초록 벨벳 치마를 입고 벚꽃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만개한 꽃잎이 날렸다. 그때 딸이 목소리를 높인다. 말분의 검은 눈이 흔들린다.

“엄마! ‘ㅂ’을 먼저 치고 그 다음에 여기 ‘ㅓ’를 쳐야지.”

정혜가 답답하다는 듯 재촉한다. 엄마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다. 한글을 가르쳐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족친다.

조금 전 말분은 정혜가 잠시 부엌에 간 사이에 장롱에서 진초록 벨벳 치마를 꺼내 입었다. 엄마, 치마 바꿔 입었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정혜가 엄마의 몸빼가 한쪽 구석에 던져진 것을 보며 핀잔을 주었다. 말분은 딸의 눈치를 보면서 치맛자락을 잡는다. 그러나 눈은 컴퓨터 자판의 ‘ㅇ’과 ‘ㅜ’를 쳐다본다.

정혜가 말분 옆에 붙어 앉으며 ‘벚꽃’이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그녀는 그 말을 따라 ‘벚’이라고 세게 발음한다. 말분의 입에서 나온 바람에 붙여 놓은 자음과 모음 종이가 떨어져 나간다. 손톱만 한 크기의 종이 뒷면에는 밥풀이 말라붙었다.

열여섯이었던가. 말분은 터미널에서 쌍계사 쪽으로 진우 오빠와 함께 걷고 있었다. 햇살은 이미 누그러졌지만 화창한 오후였다. 벚나무에 활짝 핀 벚꽃을 보니 말분은 기분이 좋았다. 파마머리의 여자가 벚나무 앞에서 양복을 입은 청년과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진우 오빠가 말했다. 하동터미널에서 신흥까지 벚나무를 도로가에 줄줄이 심어 십 리 벚꽃 길을 조성할 거라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보릿고개에 굶어 죽는 사람도 있는데 꽃나무가 웬 말이냐며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말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 오빠가 사진 찍는 두 남녀를 일별하더니 바위에 앉아 조금 쉬었다 가자고 했다.

“집안 사정은 어떠니? 야학을 할까 하는데. 한글 공부 말이야. 다들 농사짓느라 집안일 하느라 바쁘지?”

말분은 글을 깨우친다고 생각하자 신이 났다.

“아무리 바빠도 공부는 해야지요. 친구들이 좋아할 거예요.”

밥은 굶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 이른 봄이면 처녀들은 봄나물을 캐거나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채집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보리는 이제 겨우 푸릇하게 대를 밀며 자라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월부터 보리가 익는 유월까지가 제일 힘들었다.

*홍혜문 작가 : 2006년 경남문학 등단. 2016 문학나무 재등단. 제6회 창원문학상 수상. 경남 소설가협회장. 경남예술진흥원의 신중년 사회공헌사업 일환으로 박경리문학관에서 하동10경 집필 중.